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129화 (127/159)

129. 소년기(111) - #정령

난데없이 지목을 당한 내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자, 나르비 씨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몸에 비해 유난히도 커다란 날개가 펄럭일 때면 은은하면서도 상쾌한 꽃향기가 콧구멍을 간질였다.

내 당혹감과는 별개로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나르비 씨가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아까 요정의 공주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평소에는 잘 쓰이지 않는 고귀함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이넬. 맞죠?”

작고 앙증맞은 입술 사이로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응?

내 이름을 알고 있네?

“어······. 네. 맞는데요.”

내가 긍정하자 나르비 씨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굳이 뭘 하는 거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장터의 명물이자, 문화로 자리 잡은 그것.

악수였으니까.

검지와 엄지만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르비 씨 맞죠?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엿들었네요.”

“엿듣긴요. 처음부터 당신이 듣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사과를 하려거든 제가 하는 게 맞죠. 그동안 아이넬,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말인즉······.

“제가 장터에 처음 왔었던 날, 시선을 느꼈었거든요. 그게 혹시 나르비 씨가 맞나요?”

내가 은근슬쩍 운을 떼자 나르비 씨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네, 맞아요. 제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놀랄 게 있나?

그도 그럴 게, 나는 어디까지나 시선만 감지했을 뿐. 정작 나를 지켜보는 인물이 나르비 씨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만약 오늘 이렇게 얘기해주지 않았더라면, 평생 찜찜함을 안고 살았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시선의 정체가 나르비 씨였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이걸로 찜찜함 하나는 사라졌다.

“근데, 굳이 저를 보고 있었던 이유가 있어요?”

사실 장터에 왔을 때 가장 많이 하는 것들이 사람 구경이다.

나도 곧잘 장터에 오지만, 늘 새로운 종족을 마주칠 때마다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고.

근데, 나르비 씨의 경우는 무언가 다른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단순히 처음 보는 종족이라는 생소함에 눈길이 갔다기보다는 특정한 목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 또한 내 추측이었기에 그 의도를 명확하게 알진 못했고.

“향기가 났어요.”

“향기요?”

어쩐지 록시랑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록시는 나한테서 상냥한 냄새가 난다고 했지.

상냥함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그게 내 체취가 아닌 첫인상이었지만 말이야.

“네. 냄새요. 그것도 아주 고귀한······.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대자연의 향기.”

“대자연의 향기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록시가 맡았다는 상냥한 냄새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이었다.

“네. 대자연의 향기. 아이넬, 당신에게서는 대자연의 향기가 나요. 마치, 그분에게서나 맡을 수 있을 법한······.”

이런 나르비 씨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에 대답한 이가 있었다.

“나르비. 그분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엘리니아 씨였다.

어느새 내 근처까지 온 그녀는 호기심 넘치는 시선으로 나와 나르비 씨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엘리니아도 알지? 과거에 아티로스의 모든 정령들을 아우르던 분 말이야.”

“아! 정령의 왕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응. 맞아. 자세한 건 나도 알지 못하지만, 과거 정령의 왕께서는 아티로스를 참으로 아끼셨다고 해.”

“그랬군요!”

정령의 왕.

그 단어를 듣자마자 이로나스 씨의 기억 중 일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야.

진짜로 정령의 왕이라는 자가 존재했었구나.

“응. 그리고 데모스라는 자가 들이닥쳤을 때도 모든 이들을 지키기 위해 나서셨다고 해.”

나르비 씨의 말이 맞았다.

이로나스 씨의 기억에 따르자면, 정령의 왕 또한 이곳을 지키고자 했다.

아쉬운 건 내가 지닌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보아하니 이로나스 씨도 정령의 왕이라는 자가 있다는 걸 알뿐, 이렇다 할 접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향기라는 건 뭐지?

나는 그 정령의 왕을 아예 모른다.

이렇듯 나르비 씨와 이로나스 씨의 기억을 통해서나 알 수 있었지, 일면식은커녕 그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는 것이다.

엘리니아 씨도 내심 궁금했는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럼 저분이 정령의 왕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글세.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것은······.”

말을 멈춘 나르비 씨가 나와 눈을 맞췄다.

“아이넬 당신에게서 정령의 왕의 향기가 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제가 당신을 지켜봤던 이유고요.”

“음······.”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뭔가 있긴 있다는 것 같은데.

문제는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이런 내 의문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폭음에 깨어졌다.

콰아앙!

“뭐, 뭐야?”

난데없는 굉음에 엘리니아 씨의 뒤에 서 있던 제이드 씨가 허겁지겁 뒤를 돌아봤다. 내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에프렐이잖아?

예전부터 늘 궁금했던 종족이긴 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수의 에프렐을 만나게 될 줄이야.

문제는 마냥 반가워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는 자는 굉장히 분노한 얼굴이었다.

“설마······! 너, 크나프 이 자식!”

무언가를 알아차렸는지, 제이드 씨가 묵묵하게 서 있는 크나프 씨의 멱살을 잡았다.

“네놈이 부른 거구나!”

“나는 웰버른 님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아무도 모르게 지원군을 불렀던 건가.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이러한 상황을.

정확하게는 요정의 공주인 나르비 씨가 스스로 모습을 내게끔 유도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보는 게 옳겠지.

금세 에프렐 무리가 우리들을 포위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저마다 이쪽으로 활을 겨눴다.

“드디어 찾았군!”

무리의 선두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는 나르비 씨에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는 것인지, 말 그대로 찢어 죽일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르비 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거군요.”

보아하니 나르비 씨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엘리니아 씨가 무리의 리더 앞을 막아섰다.

양팔을 활짝 펼친 엘리니아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니엘. 지금 뭘 하는 건가요?”

“엘리니아 님이야말로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에프렐의 차기 장로가 되실 분이 어째서 저런 악독한 자와 함께 계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나르비가 악독한 자라니요!”

“역시 모르고 계셨던 겁니까? 웰버른 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르비 저자는 데모스를 부활시키려고 한다고!”

“그, 그게 무슨······.”

이야.

그러니까, 자신이 부활시키려는 걸 감추는 게 아니라 아예 나르비 씨한테 뒤집어씌우겠다는 생각이었구나.

하기야.

듣자 하니, 웰버른이라는 인물은 에프렐의 우두머리다. 그것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한다.

어떻게 보면 지도자라기보다는 무력을 통해 모든 에프렐들을 발밑에 두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따라서 그의 말이야말로 곧 법일 테니,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 정도는 간단한 일일 터.

하물며 이렇게 먼저 선수를 쳐버린다면?

“그게 무슨 말이죠? 나르비가 왜······. 아니요, 오히려 웰버른 아저씨야말로 데모스를 부활시키려고 한다고요!”

“정신 차리십시오! 엘리니아 님은 나르비의 꾀에 넘어간 겁니다!”

니엘이라는 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나르비 씨의 말은 명백한 거짓말.

즉 당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과연 여기서 끝이 날까?

웰버른의 목적은 데모스의 부활 및 다케스티아와 아티로스의 연결.

만약 내가 웰버른의 입장이었더라면, 나르비 씨를 포획하는 데에서 그칠 게 아니라 일부러 놓아주겠지.

그리고 나르비 씨가 도망을 치는 사이, 자신의 목적을 완수하고 그걸 또 나르비 씨에게 뒤집어씌운다면······.

목적은 달성하되 모든 원망은 나르비 씨에게 돌아간다.

꿩도 먹고 알도 먹는 건 물론, 그야말로 완전범죄가 완성되는 것이다.

물론 웰버른이 여기까지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만 놓고 본다면 상당히 전략적인 사람이었다. 더불어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했다는 걸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으음······.

이걸 어쩐다.

상황을 보아하니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보다가는 나르비 씨는 이대로 잡혀간다. 그리고 웰버른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될 터.

그렇다고 선뜻 나서기에는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단 말이지.

그나마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웰버른이라는 자가 데모스의 부활을 바란다는 것.

거기다 다케스티아라는 무시무시한 장소와 이곳 아티로스 사이에 문을 열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전부다.

물론 이 두 사실만으로도 웰버른이라는 자의 행동을 막아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도 속고 있는 것 같았으니, 무작정 한통속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또 모호한 상황이었다.

“엘리니아······.”

그때, 나르비 씨가 엘리니아 씨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딱 봐도 순순히 잡혀가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엘리니아 씨도 이를 눈치챘는지, 세차게 얼굴을 흔들었다.

“나르비! 안 돼요! 이대로 잡혀가면······. 정말로 끝이란 말이에요!”

“엘리니아 님이 나르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를 속였습니다. 이 이상 저자를 감싸주시면, 곤란해지는 쪽은 엘리니아 님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엘리니아 씨가 급하게 항변하려 했지만, 그보다 니엘 씨의 행동이 빨랐다.

그가 손가락으로 나르비 씨를 가리켰다.

“조만간 모든 진실을 알게 되실 겁니다. 나르비를 포박해라!”

리더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에프렐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혔다.

그때였다.

돌연 엘리니아 씨가 손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엘리니아 씨의 머리 위에 자그마한 회오리가 생겨났다.

정령.

나는 본능적으로 저 회오리가 정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회오리는 조금씩 몸집을 불리는가 싶더니, 잔잔했던 대기가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싸움에 임하려고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엘리니아 님, 지금 설마······?”

“미안해요, 니엘. 저는 나르비가 이대로 잡혀가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부탁이에요. 그냥 이대로 물러나 주세요.”

“······그럴 순 없습니다. 저는 웰버른 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말을 마친 니엘 씨 또한 손을 들었고, 이번에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생겨났다.

“둘 다 그만하세요!”

나르비 씨가 다급하게 말렸지만, 정작 두 정령이 내뿜는 기운은 강해져만 갔다.

이거 내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진 것 같은데.

“하는 수 없나······.”

제아무리 평화주의자라고 한들, 이렇듯 누군가가 다칠지도 모를 상황에서까지 평화를 운운할 순 없는 노릇.

나는 조심스럽게 백색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후우웅!

돌연 상쾌한 바람이 뺨을 훑었다.

“어어······?”

“무, 무슨······?”

그와 동시에 금방이라도 맞붙을 것 같았던 두 정령의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아! 이건······.”

돌연 나르비 씨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덩달아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그런 내 시야에 빛나는 물체가 들어왔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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