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소년기(110) - #저요?
모두가 위험해진다.
나르비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충격적인 발언임에도 상당히 침착한 태도였다.
“그랬지.”
표정이나 말투가 평온한 것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역시, 나르비는 알고 있었군요.”
“응.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그걸 엘리니아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나르비가 웰버른 아저씨랑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그때 나르비가 이런 말을 했었죠?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고요. 지금 함께 힘을 모아서 물리쳐야 할 상대는 따로 있다고요.”
“그걸 들은 거구나?”
“엿들어서 죄송해요.”
나르비 씨가 정중하게 사과하는 엘리니아 씨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건 괜찮아. 그래, 엘리니아가 들은 대로야. 지금은 너희들끼리 싸워야 할 때가 아니지. 웰버른은 내 말을 듣고도 오히려 모두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거든. 의외네.”
잠시 말을 멈춘 나르비 씨가 함께 온 두 에프렐을 쳐다봤다.
“네? 의외요?”
“엘리니아가 날 찾으러 왔다는 건 웰버른의 부탁을 받아서라고 생각했거든.”
“아니에요. 저는 나르비가 했던 말을 듣고, 나름 이것저것 알아봤어요. 그리고 그게 진짜였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웰버른 아저씨는 제 말도 듣지 않으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거고?”
“네. 맞아요. 나르비, 부탁이에요. 저랑 함께 웰버른 아저씨 아니, 모두를 설득해주세요.”
나르비 씨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엘리니아는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
“착각······ 이요?”
“응. 나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건데······. 웰버른 말이야.”
“웰버른 아저씨요?”
“응. 나는 웰버른이 가장 수상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르비 씨의 말에 반응한 것은 아까부터 잠자코 있던 에프렐이었다.
“크나프 아저씨?”
갑작스러운 고성에 엘리니아가 씨가 서둘러 그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크나프라 불린 에프렐은 도리어 한발 앞으로 내밀며 나르비 씨를 쳐다봤다.
“웰버른 님이 수상하다니. 그게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엘리니아 님,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치 아이에게 꾸중하듯, 크나프 씨가 쉼 없이 말을 쏟아냈다.
“크, 크나프 아저씨!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나르비 님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와 함께해 오신 분이에요. 부디 예의를 지켜주셨으면 해요.”
“나르비. 저자는 우리와의 오랜 맹약을 깼습니다. 신의를 저버린 이들과 한자리에 있다는 것부터가 불쾌합니다. 엘리니아 님, 어서 마을로 돌아가시죠.”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듯, 크나프 씨가 엘리니아 씨의 팔을 잡으려던 찰나였다.
“그만! 크나프! 지금 뭘 하는 거지? 감히 엘리니아 님께 멋대로 손을 댈 생각인가?”
장신의 남자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제이드, 너는 빠져라.”
“뭐라고?”
장신의 에프렐, 제이드가 후드를 벗었다.
“거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거다. 크나프. 이 이상 엘리니아 님께 무례를 범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두분 모두 진정하세요!”
때아닌 두 사람의 충돌에 엘리니아 씨가 뜯어말렸지만, 좀처럼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크나프 씨는 도발적인 말투로 조롱하며 제이드 씨의 감정을 계속 건드렸다.
“그만해라, 크나프!”
“그만하라니, 나한테 명령을 하는 건가? 운이 좋아 엘리니아 님을 모시게 된 주제에.”
한편 두 사람의 다툼을 가만히 지켜보며 홀로 무언가 고민하던 나르비 씨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네?”
“크나프. 당신, 웰버른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거군요.”
듣기에는 질문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이에 크나프 씨가 나르비 씨를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웰버른 님의 명을 받아 엘리니아 님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과연 지키는 걸까요? 제가 보기엔 감시처럼 느껴지는데요.”
“하하핫! 감시라니! 이게 보니 나르비 님은 말장난에도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분명히 존칭을 쓰고 있다. 그러나 느글거리는 톤 때문인지 존중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엘리니아 님은 보호하든, 감시하든 그것이 나르비 님과 무슨 상관인지요?”
“상관이 있고말고요. 엘리니아는 제 딸과 같은 아이니까요.”
“호오, 그래서 그 딸 같은 아이를 두고 떠나셨던 거군요! 이거 참,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조차 심장이 뜨끔거릴 만큼, 지독한 독설이었다.
나르비 씨 또한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앙증맞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단 나르비 씨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엘리니아 씨는 물론, 씩씩거리며 분노를 다스리던 제이드 씨 또한 헛숨을 들이키며 놀랐다.
언제 입술을 깨물었냐는 듯, 금세 씽긋 웃은 나르비 씨가 말했다.
“맞아요. 저는 에프렐과의 맹약을 일방적으로 저버렸어요.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크나프.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나는 엘리니아를 내팽개친 게 아니랍니다.”
“흐음?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에프렐과의 맹약을 깼다는 것부터 이미 엘리니아 님을 내팽개친 게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님페의 공주라는 분께서 하신다는 변명이 고작 그것입니까?”
님페.
장난기 많은 아이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지구의 단어로 치환한다면 요정이 된다.
생김새만 보고 요정을 떠올렸었는데, 진짜로 요정이 맞았구나.
그것도 요정들의 공주라니, 대단한 사람이었네.
“변명처럼 들리나요? 그게 아니라면 변명처럼 들리길 바라는 건가요? 좋아요, 그럼 진실을 알려드리죠.”
나르비 씨가 슬쩍 엘리니아 씨를 쳐다봤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달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엘리니아 씨도 이를 눈치챘는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웰버른은 힘을 추구하는 자예요.”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강한 힘은 필요합니다. 우리의 구역을 멋대로 드나드는 놈들이 있다는 건 나르비 님도 잘 아실 텐데요?”
“크나프의 말은 틀리지 않았어요. 힘은 중요해요. 자신, 그리고 종족을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하죠. 하지만, 힘은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돼요.”
그렇지.
힘은 어디까지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내가 이런저런 도구를 만들 때 쓰이는 연장처럼 말이다.
“웰버른은 어떻죠? 과거부터 웰버른은 욕심이 많았어요. 에프렐의 지도자인 그는 단순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힘을 쓰는 사람이었죠. 이건 모두 다 알고 있을 거예요.”
“······.”
여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는지, 크나프 씨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웰버른이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 이상으로 적합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 아마 웰버른도 그것을 알기에 더욱더 강한 힘을 추구했겠죠. 문제는······.”
나르비 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힘을 추구한 나머지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 될 것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손을 대서는 안 될 것?”
데모스를 말하는 걸까.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르비 씨는 아주 먼 옛날부터 살아온 인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역시나 데모스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데모스. 과거 대륙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자의 힘에 손을 댔어요.”
“데모스라면······.”
세 에프렐 모두 크게 놀란 기색을 보이는 게 데모스에 대한 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웰버른 아저씨가 데모스를 부활시키려고 한다는 이야기에요?”
“그래. 나도 믿고 싶지 않았어. 그냥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라는 거라고 믿고 싶었어. 내가 엘리니아, 너를 떠난 것은 진실을 알고 싶어서였어.”
“그래서, 진실은 알아내셨나요?”
엘리니아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나르비 씨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어.”
“웃기는 소리입니다! 웰버른 님이 힘을 추구한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데모스를 부활시키는 것과 힘이 무슨 상관입니까? 굳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마치 웰버른 씨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크나프 씨가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고 보면 크나프 씨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종합했을 때, 그 웰버른이라는 사람은 욕심이 많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원하는 건 권력.
소위 감투다.
쉽게 말해서 강력한 힘을 이용해 지도자가 되고 싶어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상하네.
그는 데모스를 부활시켜 자신의 힘이 더 강해진다고 믿는다는 건데······.
어떻게 그런 걸 확신을 하는 걸까.
그 모습을 보던 나르비 씨가 씁쓸하게 웃었다.
“웰버른 그는······ 단순히 데모스를 부활시키려는 게 아니야. 데모스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거지.”
“그,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나도 그게 묻고 싶다.
데모스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구나.
내가 이로나스 씨의 영혼을 통해 힘을 이어받은 것처럼, 그에게도 무언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어. 다만, 그가 단순히 데모스를 부활시키는 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는 거야.”
“또 뭐가 있나요?”
“다케스티아.”
다케스티아.
어둠으로 뒤덮인 곳.
이 또한 지구의 말로 치환한다면······ 마계쯤 되려나.
말 그대로 악마들이 사는 그런 곳이 절로 연상되는 지명이었다.
“다케스티아가 뭐죠?”
“엘리니아는 정령을 다루니까, 알지?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이야.”
“네! 페아로스에서 왔다고 배웠어요.”
마치 선생님에게 자랑하듯, 엘리니아 씨가 가슴을 펴며 답했다.
“그래. 엘리니아도 알다시피, 본래 정령은 페아로스에서 살아. 그리고 데모스라는 자로 인해서 이곳 아티로스와 연결되어 있던 문이 닫혀버렸지. 그래서 지금 아티로스에는 소수의 정령만이 살아가고 있고.”
오호!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이름이 아티로스였구나!
거기다 페아로스는 말 그대로 정령이 사는 곳.
정령계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특히 계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페아로스는 대륙에 존재하는 게 아닌 또 다른 공간.
쉽게 말해서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과거에는 아티로스와 페아로스가 연결되어 있었다는 거겠지.
다른 차원이라······.
하기야.
나는 환생하기 전에 지구라는 곳에 살았다.
아티로스와 지구는 엄연히 다른 세계다.
따지고 보면 애당초 내가 본래 살았던 지구도 다른 차원이라고 볼 수 있었으며, 나라는 존재.
그러니까, 영혼은 차원을 넘어온 셈이다.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품고 살긴 했는데, 이렇게 타인의 귀를 통해서 들으니 내심 신기하면서도 기묘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웰버른은 다케스티아와의 문을 열 생각인 것 같아. 아니, 이미 열고 있다고 해야겠지.”
“어째서? 어째서 다케스티아의 문을 열려는 거죠? 페아로스가 아니라 왜······.”
“그건 웰버른만이 알겠지.”
그렇겠지.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 의도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요? 지금이라도 웰버른 아저씨를 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웰버른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하,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잖아요! 모두에게 이걸 얘기하고 도움을 받는다면······.”
나르비 씨가 고개를 저었다.
“웰버른은 욕심만 많은 자가 아니야. 그는 굉장히 강해. 너도 알잖니? 그가 계약한 정령.”
“라그나······.”
“그래. 그에게 라그나가 있는 이상, 모든 정령들은 그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해.”
“······.”
단호한 나르비 씨의 말에 엘리니아 씨는 물론, 잠자코 듣던 두 에프렐이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내가 누구니? 걱정할 건 없단다.”
돌연 나르비 씨가 이쪽을 쳐다봤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봤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에프렐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다들 부리나케 도망쳤으니까.
혹시나 싶었던 나는 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나르비 씨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