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125화 (123/159)

125. 소년기(107) - #초대장

“어우, 배불러라.”

아브륄에서 먹었던 회도 맛있었지만, 역시나 제대로 된 소스와 반찬을 곁들이는 쪽이 내 취향이었다.

“그러게요, 오랜만에 너무 많이 먹은 거 같아요.”

셀리오스 씨가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아직 소화가 채 되지 않았는지 두둑해진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하기야, 많이 먹긴 하더만.

명색이 손님이다.

마냥 대접만 받긴 뭣해서 식사가 끝나고, 우리 마을의 특산물을 소개할 겸 내가 열심히 고안해서 만든 디저트를 대접했다.

모두가 좋아하는 아프루 파이부터 시작해, 비스테르들이 가장 선호하는 간식인 쿠키, 어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말랭이까지.

셀리오스 씨는 그게 꽤 마음에 들었는지 쉬지 않고 먹더라.

그게 다 어디로 들어갔는지, 족히 7명이 먹어도 될 양을 욱여넣는데……보는 내가 다 아찔하더라.

이미지만 본다면 되게 소식할 것 같았는데, 정작 마지막까지 테이블을 지킨 이는 셀리오스 씨였다.

“휴우, 그나저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아, 셀리오스……아니, 셀리도 알죠? 장터.”

“네! 모쿠 님한테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어요!”

“네, 이번에 열리는 축제 날짜가 정해졌으니, 소화라도 시킬 겸 초대장도 돌리고, 길도 좀 만들려고요.”

셀리오스 씨가 은근슬쩍 내 눈치를 봤다.

“궁금하시면, 같이 가실래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장터라는 곳이 사람을 가려 받는 장소도 아니거니와, 어차피 셀리오스 씨에게도 구경시켜줄 예정이었으니까.

“라프는……여기 있는 게 나을 거 같네요.”

나는 저 멀리 옹기옹기 모여있는 아이들을 쳐다봤다.

록시에게는 음식탐지용 레이더라도 붙어있는 것인지, 귀신같이 찾아와 시식회에 참가했다.

그렇게 배를 두둑하게 채운 록시는 라프린스 씨와 함께 공기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아앗! 록시 못 잡았다!”

록시가 공중으로 던진 공깃돌을 놓치며 아쉬워했다.

그러자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라프린스 씨가 공깃돌을 모았다.

“……여기, 다시 해도 돼.”

라프린스 씨가 록시에게 건넸다.

“록시 또 한다?”

“……응.”

보아하니 록시가 아쉬워하는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이에 공깃돌을 받으려던 아쉬르 씨가 허둥지둥 손을 거뒀다.

“아쉬르 언니 차례다!”

“예? 아, 아닙니다. 록시가 해도 괜찮습니다.”

아쉬르 씨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사양했다.

“잘 어울려서 다행이네요.”

내 말에 셀리오스 씨도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라프한테 친구가 없어서 많이 걱정했거든요. 고마워요.”

“뭘요. 그럼, 슬슬 장터로 가볼까요?”

우리가 장터로 향하려고 하자, 본의 아니게 차례가 넘어간 아쉬르 씨가 다가왔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넬이랑 같이 장터라는 곳에 가려고 해요. 아쉬르는 어떻게 할래요?”

“음…….”

아쉬르 씨가 셀리오스 씨와 라프린스 씨를 번갈아 쳐다봤다.

“라프가 걱정되면, 여기에 있어도 돼요. 저는 넬이 있으니까 걱정할 건 없어요.”

“으아! 또 못 잡았다! 아쉬르 언니! 아쉬르 언니!”

이번에도 공깃돌을 놓친 록시가 연신 아쉬르 씨를 불렀다.

이에 아쉬르 씨가 퍼뜩 뒤를 쳐다봤다. 꼬리가 들썩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눈치였다.

“자, 록시랑 라프가 기다리네요! 어서, 가봐요.”

셀리오스 씨가 아쉬르 씨의 등을 떠밀었다.

“예, 그럼 저는 라프……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네, 그럼 잘 부탁해요. 아쉬르.”

“예!”

순식간에 록시의 곁으로 향해 공깃돌을 던지는 아쉬르 씨를 뒤로하고, 아르젠 씨를 불렀다.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내 말에 답한 아르젠 씨의 몸에서 빛이 나더니, 돌연 몸집이 거대해졌다.

처음 조각상이었을 때 만났던 그 모습이었다.

“아, 혹시……. 아르젠 씨를 타고 가는 건가요?”

“네. 길을 만들려면 어쩔 수 없거든요. 자, 가요!”

“앗!”

나는 당황한 셀리오스 씨와 함께 아르젠 씨의 등에 올라탔다.

“자, 그럼 가요!”

* * *

먼 길을 날아 장터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도착했다.

“휴우, 길은 만들었으니 이제 초대장만 돌리면 되겠네……괜찮아요?”

말을 하던 나는 걱정스레 물었다.

“으으으, 괘, 괜찮아요.”

셀리오스 씨가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침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평소 하늘에 둥둥 떠다니기에 고소공포증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

“잠깐 휴식이라도 취하고 가요.”

“미, 미안해요.”

“뭘요. 어디 보자……. 기왕 쉬는 김에 작물이라도 좀 캐야겠네요.”

그렇게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캐던 중이었다.

돌연 주머니가 들썩거렸다.

뭔가, 싶어서 주머니를 슬쩍 들췄다.

호롱!

“어?”

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반디였다.

언제부터 내 주머니에 있었던 거지?

하물며 반디는 내 주변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숲을 향해 날아갔다.

뭐지?

평소와는 다른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왜요?”

셀리오스 씨의 목소리에 퍼뜩, 상념을 털어낸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 그럼 갈까요?”

나는 셀리오스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부지런히 걸었다.

* * *

“여기가 장터군요.”

셀리오스 씨가 장터의 입구를 보면서 물었다.

볼이 빨갛게 물든 게 적잖이 흥분한 듯한 기색이었다.

나도 장터에 처음 왔을 땐 저런 반응이었지.

“저도 오랜만에 오네요. 어디부터 보여드려야 하나.”

“넬한테 맡길게요!”

나한테 맡긴다라.

음, 장터의 명물이라면 역시나 먹을거린데. 방금 식사를 하고 온지라 아직 뭘 먹기에는 이른 것 같고.

“아, 일단 이것부터 입으세요.”

나는 셀리오스 씨에게 큼지막한 로브를 건넸다.

아무래도 셀리오스는 우리처럼 걷는 게 아니라, 허공을 유영하듯 이동한다. 나야 그것이 렐리크의 힘이라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가 떠있는지 아닌지 알아볼 수 없게끔, 로브보다 품이나 길이를 크게 만들었다.

이내 셀리오스 씨가 로브를 걸쳤다.

“얼굴은 굳이 안 가리셔도 돼요.”

어차피 그녀가 떠다니는 걸 숨길 목적이었으니까.

“그럼 구경하면서 초대장도 좀 돌리고……. 아, 이쪽으로 쭉 가면 모쿠 씨가 있거든요. 거기도 한번 들르는 게 좋겠죠?”

“아! 좋아요!”

좋아.

첫 번째 행선지는 정해졌다.

“이게 누구야, 아이넬 아니야!”

이제 막 입구를 지나 초입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저 멀리서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얼굴은 물론, 온몸에 털이 수북하게 난 사람이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르켈이라고 불리는 종족인 델린 씨였다.

그는 찰랑거리는 털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내게 다가왔다.

“델린 씨! 안녕하세요!”

“그동안 안 보이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요즘 이것저것 하느라 바빠서요. 아, 맞다. 저번에 우리 마을에서 축제가 열린다고 했었잖아요.”

“아, 그랬지. 그래서, 축제가 언제 열릴 지는 정해진 건가?”

“네. 안 그래도 축제 날짜를 알려드리려고 왔거든요. 괜찮으시면, 델린 씨도 축제에 참여하시는 게 어때요?”

“크핫. 장터의 대장인 아이넬 아닌가! 불러만 준다면, 가야지.”

윽.

또 시작이네.

“장터의 대장?”

델린 씨의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셀리오스 씨가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음? 아리따운 숙녀로군. 안녕하신가, 나는 델린이라 하지.”

“네, 안녕하세요. 셀리오스라고 해요. 근데, 장터의 대장이라는 건 뭔가요? 넬의 별명인가요?”

셀리오스 씨의 천진난만한 질문에 나는 무심코 이마를 짚었다.

“크핫! 그렇지. 아이넬이 없었으면 장터가 사라질 수도 있었거든.”

“장터가 사라져요?”

“그럼, 그럼! 아이넬이라는 불세출의 대장이 장터에 오고 난 뒤로는 많이 바뀌었지.”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놀리는 것 같은데요.”

애당초 내게 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건, 진짜로 내가 대장 노릇을 해서가 아니다.

발 없는 말이라도 천리를 달리면 없는 발마저 생겨나기 마련.

그저 록시가 날 대장이라고 부르는 걸 들은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대장이라고 불렀고, 그게 사람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문의 출발점이 바로 델린 씨였다.

이제는 그 누굴 만나도 장터의 대장이라고 부르니, 들을 때마다 뱃속이 근질거리는 기분이다.

입술을 삐죽이며 딴죽을 걸자, 델린 씨가 내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만 하더라도 최근까지 장터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이보게, 아이넬이 누군가!”

델린 씨는 억울하다는 듯 옆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는 되도 않는 질문을 던졌다.

“응? 말해 보게! 아이넬이 누군가!”

얼떨결에 붙잡힌 것도 모자라, 델린 씨의 호된 재촉에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아이넬이라면, 장터의 대장 아니요?”

“그렇지? 이거 보게!”

델린 씨가 만족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왠지 여기 더 있다가는 부끄러워서 제명에 못 살 것 같았다.

“아, 저 뭐냐. 일단 축제가 열리는 날은 열흘 뒤니까, 그때 오시면 돼요!”

“그러지. 아, 근데 아이넬의 마을이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장터 외에는 길을 잘 몰라서 말이야.”

아, 맞다.

한시라도 빨리 델린 씨의 놀림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가장 중요한 걸 건네주지 않을 뻔했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초대장을 꺼냈다.

“여기요.”

“음? 이건 뭔가?”

“초대장이요! 여기 보시면…….”

델린 씨가 시야를 가린 털을 치우더니 초대장을 유심히 살폈다.

“여기가 장터거든요? 그리고 여기가 저기, 입구고요. 그리고 이 하얀색 선이 길이예요.”

초대장 위에 그려진 하얀색 선이야말로 우리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아무렴.

드라고스 산맥은 어마어마하게 넓다. 내가 알기로는 델린 씨도 본인이 사는 지역에서 장터까지 오는데 꼬박 하루가 소비된다나.

오죽했으면 장터에 오는 날이면 아예 며칠 씩 묵고 간다고 한다.

이는 델린 씨만이 아닌, 장터를 찾는 대다수에 해당되는 일이었다.

달리 말해서 델린 씨가 사는 곳에서 우리 마을까지 오려면 족히 이틀은 잡아야 하는 셈이다.

하물며 왕복으로 치면 4일이나 되는 거리를 무작정, 그것도 지도도 없는 곳을 찾아오라고 한다면?

아무리 축제라지만, 초대하는 입장에서도 적잖은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실제로도 나는 이 거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줄곧 고민했다.

물론 이를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아크니악이었다.

하지만 선뜻 아크니악을 공개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해야 할까.

무엇보다.

아직 데모스의 추종자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마음대로 공개할 순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떠올린 게 바로 이 초대장이었다.

내 설명에 델린 씨가 고개를 주억였다.

“호오? 그럼 이 하얀색 선을 따라가면 된다는 거지?”

쉽게 말해서 이 초대장이야말로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 초대장이 없으면 우리 마을 주변에 설치한 마나 배리어도 통과할 수 없을뿐더러, 내가 따로 만든 지도에는 이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뿐만아니다.

“네. 아, 참고로 이 초대장이 없으면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꼭 챙겨셔야 해요. 그리고, 혹시나 길을 잃어버리거나 하시면, 이 초대장을 찢어주세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해야 할까.

초대하는 상황이었으니, 그들의 안전도 내가 책임을 지는 게 도리니까.

“이걸 찢으라는 말이군. 뭐, 알겠네.”

“네. 반드시 와야 하는 건 아니니까, 부담은 갖지 마세요.”

“크핫, 장터의 대장이 여는 축제 아닌가! 내 기어서라도 가야지! 아, 근데, 가족을 데려가도 괜찮나?”

“그럼요! 가족이나 친구랑 같이 오셔도 돼요!”

도리아 아주머니가 말했듯, 축제는 사람이 많을수록 즐거운 법이니까.

이내 초대장에 대한 설명을 끝내고, 인사를 하려던 차였다.

“아, 중요한 걸 잊을 뻔했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