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소년기(101) - #작별
-아르젠에게 이야기를 들었으니 알겠지만, 내가 아크니악을 만들게 된 것은 대륙에 살아가는 이들을 구하고 싶어서라네.
“일종의 피난 장소 같은 거군요.”
-피난 장소라. 데모스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한 장소니 그렇게 말해도 되겠지. 다만, 이곳은 단순히 피난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은 아니네.
피난 만을 위한 장소는 아니다?
-쉽게 말해서 미래. 그래, 미래를 보존하기 위해 만들었다네.
미래를 보존한다.
이상하네.
세이비오르 씨는 보존이라는 말을 했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단 말이지.
-자네의 생각은 알 것 같군. 아크니악은 이 공간이 전부가 아니라네.
“아하.”
-이제부터 그걸 확인하러 가세나.
“어쩐지, 아까 열쇠구멍 비슷한 걸 봤는데, 그게 그거였군요.”
-음? 열쇠구멍?
“네. 저쪽 벽에요. 거기만 딱 하나 구멍이 뚫려있던데요?”
내 말에 세이비오르 씨가 묘한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랬지.
말을 마친 세이비오르 씨가 몸을 돌렸다.
어, 저거 조각품은 안 가져가도 되는 건가?
이런 내 의문이 든 것도 잠시.
세이비오르 씨가 뚝, 걸음을 멈췄다. 마치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기는 듯한 모양새였다.
-흠흠. 아르젠, 부탁하네.
”예.“
세이비오르 씨의 민망한 헛기침에 아르젠 씨가 조각품을 들었다.
-자, 어서 가지.
어쩔 수 없나.
나는 세이비오르 씨를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걷던 중, 세이비오르 씨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내가 아까 방금 언급했던 구멍이었다.
세이비오르 씨가 고개를 돌리며, 구멍을 가리켰다.
-여기에 열쇠를 넣으면 된다네.
열쇠라.
내가 열쇠를 받았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가 말하는 열쇠가 아까 상자에 들어있던 반지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상자에 든 반지를 꺼내 구멍에 밀어넣었다. 어쩐지 규격이 맞질 않는 것 같다는 건 기분 탓일까.
그래도 세이비오르 씨가 날 말리지 않는 걸로 봐서는 이게 맞는 것 같긴 한데.
“응?”
하지만 정작 문이 열리긴커녕 작은 변화도 없었다. 내가 반지와 구멍을 번갈아 쳐다보자 옆에 서 있던 세이비오르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미안하네, 실은 그걸 손가락에 끼워야 하네.
이제 보니 세이비오르 씨는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네. 자고로 영웅이라면 위엄이 넘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근데, 제가 손가락에 끼우면 구멍에 들어가질 않는데요?”
“반지를 끼운 손가락을 넣으면 된다네.”
“아하.”
나는 당연하게 이 반지를 넣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가락을 넣어야 한다니.
그걸 몰랐네!
환생한 후로 알게 모르게 뿌리를 내린 고정관념들이 강제로 뽑혀 나간단 말이지.
-아, 참고로 그걸 끼우면 꽤 아플 걸세.
“컥!”
세이비오르 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통증이 들이닥쳤다.
흡사 불에 뜨겁게 달군 쇳덩이를 손가락에 두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걸 좀 미리 말해주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도 잠시였다.
진짜로 손가락이 녹아내리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끄으응.”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고통의 지속시간이 길진 않았다는 것이다.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지고, 이 악물고 고통을 참던 나는 다급하게 손가락을 확인했다.
타오르는 것 같았던 감각과는 달리, 손가락은 지극히 멀쩡했다.
움직이는데도 이렇다 할 불편함도 없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있었다.
그것은,
“반지가 없어졌는데요?”
분명히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어야 할 반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거기 있잖나?
“어디요?”
-자네 손등 말이야.
“네?”
나는 무심결에 손등을 확인했다.
“어라?”
세이비오르 씨의 말대로였다.
대체 언제 생겼는지, 내 손등에 반지에 음각된 것과 똑같은 형상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 반지는 아크니악의 열쇠일세. 중요한 물건이니 빼앗기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예 자네랑 하나가 되도록 제작했지. 음, 처음 만들어보는 물건이라 걱정했네만, 보아하니 별문제는 없는 것 같군.
“…….”
그러니까, 지금 제대로 된 테스트를 끝내긴커녕 아직 안정성도 입증되지 않은 걸 나한테 줬다는 거잖아?
아니, 내가 무슨 실험대상도 아니고 말이야.
근데, 이렇게 내 몸과 하나가 된 이상 누군가한테 빼앗길 일이 없긴 하겠네.
-자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해제할 수 있으니 걱정할 건 없네.
“아, 예.”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한 나는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저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요?”
-으하하핫! 미안하네, 이것도 장난이었네.
“…….”
아니, 이 사람이.
그럼 이게 열쇠 구멍이고 반지가 열쇠라는 것도 그냥 해본 말이라는 건가?
-아, 이거 미안하네. 왠지 자꾸 장난을 치고 싶어져서 말이야.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내 앞에 있는 세이비오르 씨는 영혼의 파편. 그것도 추후 이곳으로 올 세이비오르를 위해 조각품 속에서 지냈다.
즉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줄곧 컴컴한 어둠 속에 홀로 있었다는 이야기.
외로웠겠지.
-아, 물론 이건 열쇠구멍이 맞다네. 단지, 이건 아르젠을 위해 만든 열쇠구멍이지. 나도 자네의 말을 듣고 나서야 기억이 났어.
“응?”
아르젠 씨를 위한 열쇠구멍?
그때, 조각품을 들고 있던 아르젠 씨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구명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뒤이어 그의 부리가 구멍에 쏙 들어갔다.
그러자 벽이 꿀렁, 요동치더니 이곳으로 올 때 봤던 시커먼 그림자가 생겨났다.
진짜였네.
-저건 아르젠을 위해 만든 거라네. 아무래도 이곳을 관리해야 하니, 따로 만들었지.
근데, 굳이 부리를 열쇠로 한 이유……뭐, 그것도 누군가에게 빼앗길 걸 염려해서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부리를 열쇠로 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거기다,
“그럼 아르젠 씨가 없으면 어떻게 해요?”
-그건 걱정할 거 없네. 자네와 반지가 하나가 된 이상, 자네가 곧 열쇠야.
“제가 열쇠라고요?”
-그렇다네. 자네가 의지를 발현하면, 아크니악은 반응할 걸세. 그건 곧 알려 주겠네. 어디 보자, 그래…….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가 있다네. 기왕 아르젠이 문을 열었으니, 이대로 가도록 할까.
나는 앞장 서는 세이비오르 씨를 따라 통로로 몸을 던졌다.
잠시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더니, 전혀 다른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다처럼, 짙은 남색의 벽이었다. 더불어 시야 끝자락에는 노랗고 둥근 구체가 걸렸다.
“설마, 여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하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남색의 벽.
그것은 하늘이다.
중요한 건 그냥 하늘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늘이었다.
그 증거로 노랗고 둥근 구체는 다름 아닌 달이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온 적은 없다.
하물며 늘 멀리서 보는 게 전부였던 달은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었으니, 진짜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때마침 밤이로군. 어떤가?
“와……. 너무 예쁜데요?”
-후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로군. 이곳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라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로워.
세이비오르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한다.
제아무리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우두커니 서서 밤하늘을 눈에 담던 세이비오르 씨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다시 하늘을 볼 수 있었어.
“별 말씀을. 오히려 저야말로 고맙죠. 이런 경치는 정말 억만금을 줘도 볼 수 없으니까요.”
-후후, 다행이로군.
“네?”
-솔직히 내 뒤를 이을 세이비오르가 누가 될지 참 걱정이 많았거든. 근데, 자네를 보고 있자니 걱정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져. 그래, 아까 자네에게 준 반지가 열쇠라고 했었지.
“아, 네.”
나는 반사적으로 손등을 쓸었다.
문신처럼 새긴 게 아닌, 원래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 번째 열쇠는 나라네.
“네? 세이비오르 씨가요?”
-그렇다네. 나, 세이비오르의 파편. 이 안에 담긴 기억과 경험. 그리고 내가 지녔던 지식, 마음. 그 모든 것들이 자네에게 줘야 할 열쇠라네.
“그러니까, 지금 세이비오르 씨의 말은…….”
-맞네. 나 또한 자네의 일부가 되어야 하네.
세이비오르 씨의 말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 일부가 된다는 건…….”
-나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거겠지.
역시나, 그런 거였나.
어쩐지 아까부터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치고는 나한테 알려주는 게 적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세이비오르 씨 자체가 또 하나의 열쇠였다니.
“…….”
나는 멀거니 세이비오르 씨를 응시했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왜 세이비오르가 되었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영웅이다.
대륙을 구하기 위해 아크니악을 만들고,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그것도 모자라 기나긴 세월, 고독을 씹으면서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을 기다렸다.
죽고 난 후 남은 이들을 걱정했고, 이제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면서까지 모든 것을 전해주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면 대체 뭘까.
-하핫,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비록 대륙에서의 내 존재는 사라질지언정, 그대의 속에서 살아가게 될 테니까.
“꼭 해야만 하는 건가요?”
-꼭 해야만 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군.
“그래요?”
-한 가지 말해주고 싶은 건, 자네가 나를 흡수하지 않는다고, 내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것 또한 아니야.
세이비오르 씨가 짓궂은 미소를 띤 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부탁하는 거야. 나는 이제 쉬고 싶네.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느라 지쳤거든. 기왕 가는 길, 마침표는 제대로 찍는 게 좋지 않겠는가?
하고 싶은 말은 있었지만, 나는 애써 꾹 눌러담았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이런 부탁을 하는 날 용서하게나.
“그러게요. 왠지 억지로 떠맡겨지는 느낌이 들긴 하네요.”
-하핫, 억지로 떠맡겨지는 것 같나? 정답일세.
“됐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보아하니 렐리크도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 같은데, 마법을 배운 거지?
“네.”
-그럼 이야기가 쉽겠군. 내 영혼을 마나라고 생각하게.
“마나요?”
-자세한 건 내 기억을 읽어보게나. 자, 이제 시간이 별로 없네.
“알겠어요.”
나는 손을 내밀었다.
-음?
“악수라는 거예요. 서로를 신뢰하겠다는 의미로 하는, 가벼운 인사 같은 거죠.”
-호오, 악수라.
세이비오르 씨가 눈을 빛내며, 내 맞잡았다.
자고로 인사는 짧을수록 좋다고 했던가.
“잠깐이지만, 만나서 반가웠어요. 푹 주무세요.”
시간을 끌었다가는 이대로 손을 놓아버릴 것 같았던 나는 무심한 듯 작별인사를 건넸다.
뒤이어 세이비오르 씨의 영혼을 흡수했다.
그러자 그의 형체가 점차 흐릿해졌다.
-사실 내 뒤를 이을 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다네. 근데, 그대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이들을 잘 부탁하네. 아, 그리고 말일세. 이것도 꽤 아플 거야.
이 사람이 끝까지!
내가 불만을 담아 한마디 던지려던 찰나였다.
“……!”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로 격한 통증에 머리를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