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소년기(93) - #아크니악
“응?”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될 줄이야! 들었답니다, 아이넬 님은 손재주가 뛰어나신 분이라고요!”
내 손재주가 좋다고 들었다고?
대체 누가 그런 얘기를 한 걸까.
아니, 추측하는 건 나중이다.
일단 질문에 대답부터 하는 게 먼저겠지.
나는 내 손을 꽉 쥔 셀리오스 씨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네. 나름 좋은 편이긴 해요.”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쑥스럽지만······이래 봬도 대장인인 헤파이토 씨에게 인정을 받았고, 또 장인이라는 호칭까지 받은 몸이다.
어디 가서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고 소개할 수준은 되겠지.
나아가 나 자신의 손재주가 나쁘다고 말해버리면 장인의 호칭을 준 헤파이토 씨에게 크나큰 실례이리라.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셀리오스 씨가 손에 힘을 더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진 게 적잖이 긴장한 모양이다.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셀리오스 씨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저에게 어떤 문제가 있냐고 물으셨죠?”
“네. 물었어요.”
“나키아로써 말을 번복하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실은 제게 큰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그 문제라는 건?”
“렐리크가······. 고장이 났어요.”
“렐리크가 고장이 나요?”
고대의 유물도 고장이 나는구나.
하기야.
아티펙트든, 렐리크든 결국 우리가 쓰는 도구임과 동시에 소모품이다. 시간이 지나면 낡고, 쓰다 보면 고장이 날 만도 하겠지.
그랬기에 나도 늘 여분의 도구를 챙기는 편이고.
그건 그렇고.
렐리크가 무척이나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 정도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당장 내가 끼고 있는 반지만 하더라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좋은 성능을 지녔으니까.
다만 나키아인 그녀가 이토록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할 정도라면, 렐리크 중에서도 엄청 중요한 물건일 것 같았다.
셀리오스 씨가 내 손을 놓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렐리크를 직접 봐주실 수 있을까요? 설령 수리를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가능할지만 봐주신다면 그것으로 저는 족합니다.”
수리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따지지 않겠다는 건가.
음.
아직 렐리크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내가 덜컥 부탁을 받아들여도 될라나.
그래도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거부하는 것도 좀 그렇겠지?
“대신, 아이넬 님께 렐리크를 빌려드리겠습니다.”
“어, 진짜요?”
“네! 방금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저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렐리크를 빌려준다니, 그럼 더 고민할 것도 없잖아?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봐볼게요. 음, 일단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지금 당장 보러 가도 괜찮을까요?”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럼 바로 가실까요? 라프린스, 아쉬르. 미안하지만, 여기서 잠깐 기다려줄래?”
“······응.”
“예, 알겠습니다.”
“록시랑 루나도 잠깐 여기에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알았다!”
“······응. 알았어.”
어쩐지 루나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 보였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해해주길 바라야겠지.
“자, 그럼 갈까요?”
“네.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안내하는 셀리오스 씨를 따라 응접실을 나갔다.
* * *
“이게 렐리크라고요?”
“예. 이 렐리크의 이름은 아크니악입니다.”
아크니악.
통로라는 해석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이름과는 달리 아크니악은 결코 문이나 통로가 아니었다.
거대한 링의 형태였는데, 재질은 역시나 내가 끼고 있는 반지와 비슷한 재질이었다.
빛을 받을 때마다 영롱한 빛을 흩뿌리는 게 고풍스러우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야 할까.
현대미술 전시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작품 같기도 했다. 아마 지구에 있었더라면 사진의 배경으로 자주 쓰였을 것 같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커다란 렐리크에 당황하기도 잠시.
“아크니악의 용도는 뭔가요?”
“어, 그게······.”
역시나 예민한 질문이었는지, 셀리오스 씨가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셀리오스 씨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크니악은 아브륄과 지상을 이어주는 렐리크입니다.”
“이어준다는 건?”
“말 그대로입니다. 아크니악이 있으면 곧바로 지상으로 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크니악은······.
“워프 게이트라는 말인 건가?”
“네? 워프 게이트요?”
“아, 혼잣말이에요.”
셀리오스 씨에게 어물쩍 핑계를 댄 나는 멀거니 아크니악을 바라봤다.
통로.
솔직히 아크니악이라는 이름을 해석했을 때 워프 게이트 비슷한 게 아닐까, 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그게 진짜일 줄이야.
그럼 이 아크니악만 있으면 지상과 아브륄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는 거지?
나아가 내가 이 아크니악을 똑같이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대박이지.”
“대박?”
“아, 이것도 혼잣말이에요. 제가 원래 혼잣말을 자주 하거든요.”
“아, 네.”
셀리오스 씨의 시선에 조금 차가워진 것 같지만, 아무렴 어떠랴!
지금 내 눈앞에는 꿈에서나 가능할 법한, 당장 내가 가진 마법의 지식으로는 실현하기 불가능에 가ᄁᆞ운 기술이 있다.
더군다나 이곳에는 마땅한 이동수단이 없다.
그나마 로토가 있기에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게 가능했지만, 그것도 쌓이면 결코 무시하지 못한다.
반면에 이 아크니악만 있다면?
그 어디라도 순식간에 이동이 가능했으니 탐이 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왜 셀리오스 씨가 이 렐리크에 집착을 했고, 또 왜 꼭꼭 숨기려고 했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상념은 여기까지다.
아크니악이 고도의 기술이고 나발이고.
정작 고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이 아크니악이 고장난 건 이번이 처음인가요?”
“아니요. 과거에도 몇 차례 고장이 난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어, 그럼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잖아?
“그럼 셀리오스 씨는 그때 어떻게 수리를 했는지는 모르는 거군요?”
“그게, 과거 아크니악이 고장 났을 당시에는 로플로드에서 온 자들이 고쳐줬다고 해요.”
응?
“로플로드라면, 사이가 나쁘다고 들었는데요.”
“과거에는 잘 지냈다고 하네요. 지금은 아이넬 님이 말씀하신 대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만요.”
셀리오스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그녀는 로플로드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한번 틀어진 관계는 쉽게 되돌리기가 어려운 법이지.
나아가 그들과의 관계가 좋아지지 않는 이상, 아크니악을 고칠 방법도 요원하다는 거고.
“후우.”
괜스레 긴장되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나는 렐리크의 겉면을 살펴봤다.
“음.”
일단 내 시선을 사로잡는 점이 딱 하나 있었다.
마나였다.
분명히 반지는 그 크기에 비해 상당한 양의 마나를 머금고 있다.
반면에 아크니악은 아니다.
이 정도 크기라면 적어도 반지의 수백, 수천 배는 머금고 있어야 했으나 정작 아크니악에게서는 단 한 줌의 마나조차 감각되질 않는다.
이래서는 렐리크가 아니라 그냥 잘 만들어진 장식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어때요?”
“음,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네요.”
겉으로 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딱 여기까지였다.
나는 챙겨온 짐을 내려놓고 렐리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특유의 차가운 감촉을 무시하며, 소량의 마나를 주입했다.
이윽고 렐리크가 내 마나를 흡수하며 옅은 빛을 뿜어냈다.
반지를 봤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렐리크를 만들 때 쓰이는 재질이 참으로 특이한 것 같단 말이지.
더불어 렐리크의 재질은 마나를 머금는 특성을 지닌 것 같았다.
이 작은 반지도 꽤 많은 양의 마나를 머금는데, 아크니악이라면 정말 끝도 모를 만큼 머금을 수 있겠어.
그뿐만 아니다.
아크니악에 주입했던 내 마나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파란색이었던 내 마나가 백색으로 변한 것이다.
흡사 투명한 물에 물감을 한 방울 떨어트린 것처럼 서서히 색깔이 변해갔다.
아울러 색깔만 바뀐 게 아니라 아예 속성 자체가 바뀌었다.
이것도 재질 때문인 것 같고.
이미 반지에서도 동일한 현상을 목격한 탓에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일단 아크니악의 기능 중 하나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밝혀낼 수 있었다.
“음, 일단 마나를 머금는 걸 보면 제대로 기능을 하는······.”
나는 말을 멈추고 아크니악을 쳐다봤다.
“뭐야, 다시 뱉네?”
아크니악은 내 마나를 흡수하긴 했다.
하지만 정작 흡수한 마나를 머금긴커녕, 그대로 외부로 방출됐다.
아니, 방출이 아니라 유출이라고 보는 편이 옳겠지.
“일단 마나를 머금지 않는다는 건, 꽤 심각한 문제인 것 같은데.”
아무렴.
렐리크든 아티펙트든 결국 마나라는 연료가 있어야만 그 진가가 발휘된다.
즉 마나를 머금지 못하는 아크니악은 그저 커다란 장식품이나 다름이 없었다.
“맞아요!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 군요!”
내가 홀로 중얼거리고 있자니, 옆에 있던 셀리오스 씨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나를 향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반짝이는 게 용한 점쟁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셀리오스 씨는 아크니악이 마나를 머금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네. 미리 말씀을 드릴까, 했는데 바로 아크니악을 확인하셔서 이제야 말씀드렸네요.”
그렇구나.
“단지, 아크니악이 마나를 머금지 않는 원인을 모르겠어요.”
하기야.
그 원인을 알았다면 굳이 날 부를 필요도, 홀로 끙끙 앓을 필요도 없이 알아서 뚝딱 고쳤겠지.
“고칠 수 있을까요?”
내가 단박에 원인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날 바라보는 셀리오스 씨의 눈에는 강한 믿음이 담겨있었다.
자고로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지는 법이다.
괜히 기대감이 높아진 것 같아서 적잖이 부담스러운데.
“그건 지금부터 확인을 해봐야 될 것 같아요.”
말을 마친 나는 다시금 아크니악의 표면에 손바닥을 댄 채 처음보다는 많은 양의 마나를 밀어 넣었다.
다량의 마나를 흡수한 아크니악이 한층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아크니악은 내 마나의 속성을 변환시키고는, 야금야금 외부로 유출됐다.
그래도 마나의 양이 늘어난 탓에, 외부로 유출되는 속도보다 머금는 양이 훨씬 많았다.
“보인다.”
지속해서 마나를 주입하자 드디어 아크니악의 흐름이 보였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흐름에 집중했다
확실히 크기가 커서 그런지, 반지보다 훨씬 복잡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집중력을 끌어올려 마나를 주입하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선지, 마나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특정 지점에서 흐름이 뚝, 끊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어져야 할 마나의 흐름이 끊겼다?
“이거구나.”
인간으로 치자면, 혈관이 끊긴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흐름이 끊긴 것이 고장 난 원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곤란하게 됐네.
원인을 발견한 거야 기쁜 소식이지만, 대체 이걸 어떻게 고쳐야 할지 막막했다.
아니, 막막한 걸 떠나서 이건 내 힘으로 고칠 수가 없겠는데.
셀리오스 씨한테는 미안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겠지.
씁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손을 떼려던 찰나였다.
“어라?”
돌연 마나가 꿀렁이는가 싶더니, 끊어진 다리를 앞에 둔 사람처럼 나아가지 못하던 마나가 아주 미세하게나마 전진했다.
이거 혹시······.
나는 아크니악에서 손을 뗐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내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아크니악을 보자, 덩달아 긴장한 셀리오스 씨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뇨, 아뇨.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만, 고칠 방법을 찾은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