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소년기(76) - #집들이&홈파티
“뜨거운 물이라니, 신기하네요.”
“호, 저 정도면 굳이 불을 때서 물을 데울 필요도 없는 거잖아?”
엄마와 아빠는 욕조에 쏟아지는 물줄기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한편으로는 아빠가 물벼락 세례를 받았던 걸 봤기 때문인지, 다들 선뜻 욕조로 다가가려 하진 않았다.
그러나 딱 한 사람. 록시는 달랐다.
“우와아! 물이다! 뜨거운 물이다!”
록시는 뜨거운 물이 마냥 신기했는지, 그대로 욕조에 손을 넣고는 휘휘 저었다.
귀여운 녀석.
록시가 저렇게 신난 이유라면 단순했다.
나는 마법을 배운 뒤로 나는 곧잘 목욕을 했다.
바깥에서 하는 노천욕도 나름 운치가 있고 지금은 오롯이 취미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목욕이라는 게 몸을 깨끗하게 씻는 것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진다고 해야 할까.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면 묵은 때도, 정신적인 피로도 함께 녹아내리며 심신이 개운해지는 감각이다.
근데, 이걸 나 혼자만 이걸 즐기자니 적잖이 아쉬웠던지라 아예 데커드 할아버지의 오두막 근처에 커다란 욕조를 만들었다. 그곳에서는 24시간 뜨거운 물이 흐르고 있다.
데커드 할아버지와 레비아 선생님은 물론, 이따금씩 록시와 루나도 이용하곤 한다.
록시야 원래부터 물을 좋아했는지, 목욕의 목 자만 들어도 꼬리부터 흔들었다.
오죽했으면 욕조에 몸을 담그고는 목만 쭉 내민 채 꿀잠을 자더라.
뭐,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너무 오래 목욕을 하는 것도 좋진 않아서 주의를 줬다.
반면에 루나는 목욕을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았다.
물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몸을 씻는다는 행위 자체를 어색하게 여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만약 설계도대로 만들었다면 3층에도 욕실이 있을 테니, 금방 목욕이랑 친해질 수 있겠지.
“이건 뭐죠?”
“아, 그건 사우나라는 거요!”
엄마가 욕실 구석의 문을 보고 묻자, 헤파이토 씨가 냉큼 그쪽으로 향했다.
내가 그린 설계도를 그대로 적용시켰다면 저 위치는······.
“이 사우나라는 게 말이오. 아주 기가 막힌다오!”
역시 사우나가 맞았네.
“그, 그런가요?”
갑자기 흥분한 헤파이토 씨의 모습에 엄마가 당황했다.
아, 그러고 보니 헤파이토 씨가 사우나를 되게 마음에 들어 했었지.
듀로프는 항시 더운 곳에서 지내니 싫어할 만도 할 텐데. 이상하게 세 듀로프는 사우나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아무래도 광산 특유의 건조하고 텁텁한 더움이 아닌 습하면서도 노폐물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한 가지 문제는, 사우나를 들어갈라치면 각자 커다란 술통부터 챙긴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우나 안에 냉장고를 설치해도 괜찮겠냐고 물어보는 헤파이토 씨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었지.
원래 음주 후 사우나는 불법인데 말이야.
“이게 참 좋은데, 어떻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구려. 정말, 해보면 알 거요.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기분이지!”
그 후로도 세탁실, 침실, 테라스, 보일러실 등등.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집이 어찌나 넓었는지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제 집 구경도 거의 다 한 것 같으니, 슬슬 우리 집으로 부르는 게 좋곘지.
나는 내 옆에 있던 루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루나.”
“응?”
“아까 내가 말했던 거 있지?”
“초대?”
“응. 이제 집 구경도 다 끝난 것 같은데, 지금 부탁해도 될까?”
“응. 알았어.”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인 루나가 조심스레 집을 나섰다.
“커험, 어떻소?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오.”
설명하느라 목이 칼칼했는지 헤파이토 씨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있나요?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요. 이게 정말로 우리 집이라니······. 정말, 이렇게 근사한 집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허헛. 그런 말씀 마시오. 우리는 말이오. 우리가 만든 물건을 써주는 것에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오. 그러니, 부담은 갖지 말고 언제든 필요한 게 있다면 우리를 불러주시구려.”
“고맙습니다.”
엄마가 헤파이토 씨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후로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중, 헤파이토 씨가 은근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별 말씀을. 그나저나, 슬슬 배가 고픈데······.”
하여간.
뭐, 애당초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둔 게 있지.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호오. 이런 집은 처음 보는군.”
“에잉, 귀찮은 녀석.”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오셨구나.
“이 목소리는······.”
가장 먼저 반응한 쪽은 엄마였다.
엄마는 귀에 익은 목소리였는지, 퍼뜩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향하셨다.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엄마가 화들짝 놀라더니 버선발로 뛰쳐나가셨다.
“스승님? 스승님이세요?”
그렇다.
손님의 정체는 레비아 선생님과 데커드 할아버지였다.
그 옆에는 촌장님과 도리아 아주머니, 내 부탁을 받아 초대장을 돌리러 갔던 루나도 함께 있었다.
나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어.”
“응.”
자고로 이사하면 꼭 해야 하는 게 있다.
다름 아닌 집들이였다.
오늘 우리들의 새로운 집이 완공되었다는 걸 들은 나는 초대할 사람들에게 미리 얘기를 해뒀다.
마음 같아서야 마을 사람 전원을 초대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또 너무 큰일이 될 것 같아서 소수의 사람들만 초대하기로 했다.
그들이 데커드 할아버지, 레비아 선생님, 위즈, 스테인 씨, 촌장님 내외분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오기를 바랐던 사람이 바로 데커드 할아버지였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데커드 할아버지가 엄마를 보며 말했다.
“스승님! 진짜 스승님이세요?”
“녀석이. 보고도 모르겠느냐?”
사실 엄마가 말은 안 했지만, 늘 스승이셨던 데커드 할아버지가 잘 지내는지 궁금해하셨다.
그러나 엄마는 그 약속을 지키고자 끝까지 데커드 할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으셨고, 나한테나마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
약속을 지키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관계가 틀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데커드 할아버지 또한 엄마를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집들이라는 명목으로 데커드 할아버지를 집으로 초대했다.
명목은 집들이 겸 소소한 파티였다.
다행이다.
솔직히 이곳에 오시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아무렴.
엄마와 거리를 먼저 두겠다고 한 쪽이 데커드 할아버지였고, 그걸 또 먼저 어겨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여러모로 난감하셨으리라.
그래도 이렇게 용기를 내서 와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흥, 다 큰 녀석이 왜 울고 그러느냐?”
비록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엄마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었다.
“잘 오셨어요.”
엄마가 눈물을 훔치며 웃자 데커드 할아버지가 민망하게 헛기침을 하셨다.
“흥. 됐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곳에 서 있어야 하는 게냐?”
“아, 내 정신 좀 봐! 자, 어서 들어오세요!”
* * *
“동작 그만!”
헤파이토 씨의 매서운 눈빛에 데커드 할아버지의 손이 멈췄다. 그의 손에는 길쭉한 나무 4개가 들려있었으며, 각각 1개에서 4개의 X가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
저건 대한민국의 민속놀이이자, 명절 때면 생각나는 놀이인 윷놀이였다.
명색이 파티다.
단순히 식사만 하고 끝낼 게 아니라 조금 더 왁자지껄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모두 함께 모여서 노는 것 또한 내가 꿈꾸던 것 중 하나였으니까.
더욱이 놀이를 통해서 조금은 딱딱한 분위기를 완화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었고.
거기서 나는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놀이이자, 그 누구도 쉽고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놀이인 윷놀이를 준비했다.
다만······.
내가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 게 있었다.
“뭔가?”
“자네. 수상하군.”
헤파이토 씨의 말에 데커드 할아버지가 입술을 씰룩이셨다.
“허? 내가 수상하다니, 뭐가 말인가?”
“자네, 아까부터 윷만 나오더군?”
“그건 내가 잘 던졌기 때문이지.”
그렇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승리욕이었다.
데커드 할아버지야 지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는 레비아 선생님도 마찬가지며, 둘은 라이벌에 가까운 사이다.
놀이를 더욱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서는 이 라이벌 구도를 살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예 데커드 할아버지의 팀과 레비아 선생님을 각 팀의 리더로 정했다.
빨간 말의 1팀은 데커드 할아버지, 스테인 씨, 위즈 씨.
파란 말의 2팀은 레비아 선생님, 도리아 아주머니, 아빠.
초록 말의 3팀은 엄마, 헤파이토 씨, 촌장님.
노란 말의 4팀은 나, 록시, 루나.
이렇게 총 4개의 팀이 짜였고, 나는 선수 겸 심판을 맡았다.
“잘 던졌다고 윷만 나온다는 게 말이 되는가! 자네, 조금 더 높게 던지게!”
“에잉, 대장인이라는 녀석이 의심만 많구나!”
데커드 할아버지의 도발에 헤파이토 씨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헤파이토 씨, 스승님 진정하세요!”
엄마였다.
둘의 투덕거림에 엄마가 나서서 중재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사실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다름 아닌 레비아 선생님이다.
그다음이 헤파이토 씨고, 다음이 데커드 할아버지다.
한때는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였던 그가 이곳에서는 거의 막냇동생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것이다.
심지어 세 분의 나이를 합쳤을 때 평균 나이가 약 300세 전후다.
근데, 이 셋을 중재하는 사람이 20대 중반인 우리 엄마였으니, 웃음이 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나서자 데커드 할아버지가 한발 물러났다.
“대장인치고는 보는 눈이 없군. 좋네, 자네의 말대로 높게 던져주지!”
그래 봐야 도발적인 말투는 여전했지만 말이야.
이윽고 데커드 할아버지가 보란 듯 윷가락을 높게 던졌다. 공중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던 윷가락이 바닥에 떨어지며, 데굴데굴 굴렀다.
“개로군! 이보게, 개가 나왔잖나!”
“끄응. 시끄럽구나! 얼른 던지기나 해라!”
데커드 할아버지가 투덜거리며 빨간 말을 이동시켰다.
“으하하하하! 어디 보자! 그래, 걸만 나오면 되는 거로군.”
이내 헤파이토 씨가 냉큼 윷가락을 던졌다.
“아이고! 아까워라!”
아쉽게도 헤파이토 씨도 개가 나왔다.
이번에는 우리 팀 차례구나.
“자, 이번에는······록시 차례네.”
나는 윷가락을 모아 록시에게 건넸다.
“우아아! 록시다! 록시가 던진다!”
록시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윷가락을 받아들었다.
“던진다!”
록시가 힘차게 윷가락을 던졌다. 공중에서 빠르게 회전하던 윷가락이 바닥에 부딪히며 구르다가 멈췄다.
“모다!”
“모네?”
당황한 헤파이토 씨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루나의 손은 윷판을 향해있었다.
루나가 노란색 말을 집더니, 그대로 초록색 말을 밀어냈다.
“이거 잡혔어.”
“이, 이럴 수가······.”
자신들의 말이 잡히자 헤파이토 씨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록시는 재차 윷가락윷을 던졌고, 놀랍게도 도가 나왔다.
“데커드 할아버지도 잡혔어.”
“······.”
순식간에 두 팀의 말이 탈락했다.
“자, 록시 또 던지면 돼.”
“록시 또 던진다!”
이번에도 록시가 윷가락을 던졌다.
“유, 윷······.”
“또 윷이야?”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록시는 홀로 12번이나 던졌고, 윷판 위에 있던 모든 말을 탈락시킨 후 유유히 골인지점까지 점령했다.
대단하다 진짜.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록시는 진짜 운이 좋단 말이지.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우리 팀의 MVP인 록시의 손을 잡고 번쩍 들었다.
“승자는 4팀!”
“우와아아! 우리가 이겼다!”
록시가 나와 루나의 팔을 잡더니 폴짝폴짝 뛰었다.
“하, 한 판 더 하는 게 어떤가?”
헤파이토 씨의 제안에 데커드 할아버지도 은근슬쩍 날 쳐다봤다.
“그럴까요?”
그렇게 집들이 겸 소소한,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왁자지껄한 홈파티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