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소년기(71) - #부침개!
조리도구를 챙긴 내가 식료품 창고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아이넬 님.”
여성 먼키.
지혜라는 의미를 담아 위즈라고 이름 붙인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을까요?”
“어, 도와주시게요?”
“네!”
“도와주신다면야 저야 좋죠!”
안 그래도 챙겨와야 할 게 많았는데, 잘됐네.
“저, 저도 갈게요!”
“저도요!”
내가 흔쾌히 수락하자 추가로 지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자, 그럼 갑시다.”
나는 지원자들과 함께 식료품 창고로 이동했다.
식료품 창고의 위치는 데커드 할아버지의 오두막과 아지트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이건 식료품 창고예요.”
창고라고 해봐야 통나무를 이어 붙인 것에 불과했지만, 이 또한 마법진으로 강화한 특수 창고였다.
“창고!”
“네. 이 안에 우리가 먹을 게 들어있어요. 나중에 비스테르들이 쓸 창고도 만들 예정이긴 한데, 당분간은 이걸 같이 쓸 예정이에요. 위즈 씨가 기억하고 있다가 알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본의는 아닐지언정 위즈는 비스테르들의 리더를 맡아온 사람이다.
다행히 위즈도 리더의 역할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비스테르들을 지휘하는 듯했으니 앞으로도 그녀에게 리더를 맡길 생각이었다.
“아, 그리고 배고프면 굶지 말고 언제든 꺼내 먹어요. 부담 같은 건 가지지 않아도 되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할 것까진 없는데 말이지.
“자, 그럼 안쪽으로 들어가죠.”
식료품 창고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바깥과는 달리 무척이나 건조한 바람이 뺨을 훑었다.
더불어 곡식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뒤에 선 비스테르들도 고소한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자, 들어와요.”
나는 러브하우스의 한 장면처럼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안내했다.
“와······.”
“이, 이게 다 먹을 겁니까?”
“네. 앞으로 우리가 먹을 것들이에요.”
식료품 창고에는 밭에서 수확한 곡식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곳에 있는 곡식들은 극히 일부분이었고, 내 나름의 요리 연구에 쓰려고 따로 챙겨둔 것이다.
대다수는 촌장님 댁에 설치한 식료품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주 관리자는 도리아 아주머니였다.
온도는 물론 습도를 완벽하게 맞췄기에 식료품 창고에 두는 이상 썩거나 부패할 일이 없었다.
나는 창고 한쪽에 쌓인 자루로 향했다.
“비스테르 66명에, 데커드 할아버지, 레비아 선생님. 거기다 고브랑······. 일단 달걀귀신 것도 챙겨야겠지.”
게다가 모두의 먹성을 염두에 뒀을 때 족히 100인분은 만들어야겠지.
“자루 하나면 충분하겠지.”
나는 자루 하나를 들어 바닥에 내려놨다.
“이거 꽤 무거운데, 들 수 있겠어요?”
내 말에 뒤쪽에 서 있던 소년이 다가왔다.
흡사 당나귀처럼 커다란 귀를 지닌 서글서글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제가 들게요!”
그는 아시너스 부족이었고, 그 특징을 살려 도키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도키가 선뜻 다가와 자루를 들었다.
“억!”
당당하게 나섰던 것과는 달리 그는 쉽사리 자루를 들지 못했다.
어떻게든 들겠다고 끙끙거리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내가 가볍게 드는 모습을 봤으니 쉽게 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무겁죠?”
“무, 무거워요. 대체 이게 뭐예요?”
자루와 실랑이를 벌이던 도키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뮐을 빻아서 가루로 만든 거예요.”
“뮐······?”
“그건 이따가 보면 알 거예요. 잠깐만요.”
나는 창고 구석에 놓인 지게를 꺼내 도키에게 착용시켰다.
“어때요?”
“오오오오! 편해요!”
“오케이. 그럼 출발!”
“출발!”
지게에 자루를 짊어진 도키가 떠나고, 나는 남은 두 비스테르를 데리고 창고의 구석으로 향했다.
“여기 손잡이 보이죠?”
“네.”
“이 밑에는 냉장 창고라고 해서, 고기나 열매 같은 게 있어요.”
“고기랑 열매!”
고기라는 말에 유독 눈을 빛내는 걸 보니 비스테르의 취향은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바닥에 툭 튀어 나온 손잡이를 열었다.
안에 갇혀 있던 냉기가 흘러나오자 비스테르들이 흠칫했다.
이렇듯 식료품 창고에는 지하실이 존재했다.
나는 가로등을 축소 시켜 만든, 소위 마등을 조명 삼아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루나가 사냥해 온 마수를 비롯하여 상하기 쉬운 식자재들로 가득했다.
비스테르들도 조심스럽게 내부로 들어왔다.
“우와아······.”
“먹을 거 진짜 많다!”
비교적 차분한 위즈조차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변에 널린 식자재를 살펴보기 바빴다.
비스테르들에게 먹일 식자재를 챙기며 내가 주의를 주려던 찰나였다.
“여긴 꽤 추우니까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아, 아이넬 님?”
고기를 살펴보던 위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응? 왜요?”
“저, 저기 움직이는 것도 식자재 입니까?”
나는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엉?”
내 시선에 무언가 꼬물거리는 게 포착됐다.
나는 슬그머니 그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드러난 불청객을 확인한 나는 픽 웃었다.
“너, 또 여기 있었구나.”
선객의 정체는 다름 아닌 큐우였다.
녀석은 갑작스러운 소란으로 잠에서 깼는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우리를 훑더니 크게 하품했다.
큐하아암!
“여기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아, 얘는 큐우예요. 우리 마을의 마스코트.”
“마스코트? 그건 뭡니까?”
“어······. 그러니까, 일종의 상징 같은 거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거든요.”
“아하. 그럼······.”
“식자재가 아니라 그냥 여기를 제집 안방처럼 생각하는 녀석이에요.”
큐우가 이곳에서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며칠 전에 마을에서 큰 소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소란의 정체는 아빠였다.
아빠는 엄청나게 당황한 얼굴로 마을을 막 뒤지고 다녔다.
이를 알게 된 나는 곧장 아빠를 찾아갔다. 당시에 엄마도 함께였는데, 아빠와 마찬가지로 매우 놀란 듯하셨다.
내가 무얼 그리 찾느냐고 묻자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큐우가, 큐유가 없어졌다!”
요는 이러했다.
아빠는 아침 일찍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게 있다.
큐우 밥 주기였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니건만, 자연스럽게 아빠는 큐우의 아침을 챙겨주셨다.
늘 그렇듯 아침에 일찍 기상한 아빠는 큐우의 전용 밥그릇에 식사를 담았다.
어째서일까.
늘 이 시간이면 나타나야 할 큐우가 잠잠한 게 아닌가.
혹시나 늦잠을 자나 싶어, 큐우의 전용 러브하우스로 향했다. 그러나 정작 큐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어딘가 구석에서 자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이 흘러도 큐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홀로 발을 동동 구르던 아빠는 기어코 큐우를 찾겠다고 집을 나섰다.
그럼에도 큐우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큐우는 마을의 마스코트다.
아빠의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도 큐우의 수색에 나섰다.
큐우가 모래알처럼 작은 것도 아니고.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데도, 당최 보이질 않으니 가출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마저 나왔다고 한다.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나는 멋쩍게 웃으며 아빠와 함께 식료품 창고로 향했다.
그렇다.
아빠가 그토록 찾아헤맸던 큐우는 창고의 지하에 있었다.
그것도 배를 뒤집어 깐 채 단잠을 자고 있었다.
“그, 그렇군요.”
오해가 풀린 위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드나들다 보면 자주 볼 테니 그냥 그러려니, 하면 돼요.”
“알겠습니다.”
비몽사몽.
잠이 덜 깨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던 큐우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별다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몸을 뒤척거리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하여간, 너도 어지간하다.”
뭐, 자기가 좋다는데 별 수 있나.
큐우도 나름 눈치가 있는 녀석이라서 적당히 뒹굴뒹굴하다가 다시금 집으로 돌아가거니와.
이제는 아빠랑 엄마도 이곳에 큐우가 있다는 걸 알기에 신경 쓸 건 없었다.
“그래도 먹은 건 좀 치워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녀석이 이곳에 오는 건 비단 시원해서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엄연히 식료품 창고다.
1층에 있는 건 대다수가 곡식이지만, 이곳에는 깔끔하게 손질된 고기는 물론, 내가 틈틈이 낚시를 하면서 잡은 물고기와 쉽게 보기 어려운 열매와 채소도 잔뜩 있다.
큐우에게 있어서 이곳은 보물 창고나 다름없었다.
“자,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나는 식자재를 넉넉하게 챙겨 한곳에 모았다.
“자, 마지막으로······.”
나는 또 다른 문을 열었다.
“윽!”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냄새에 위즈가 후다닥, 물러났다.
“이, 이겅 무승 냉새잉니까?”
그녀는 아예 손으로 코를 막아 발음이 뭉개졌다.
“메주라는 거예요.”
“에우?”
“네.”
내가 환생한 뒤로 가장 먹고 싶었던 게 뭐냐고 묻는다면, 역시나 자극적인 맛이다.
이곳에서도 소금을 쓴다.
다만 지구에서 흔히 사용하는 소금이 아니다.
솔트렌이라는 식물을 짜면 얻을 수 있는 즙을 이용한다.
신기한 건 이 즙을 말리면 하얀 결정으로 변하는데, 이게 진짜 소금이랑 비슷하다. 다만 솔트렌이라는 식물은 무척이나 희귀하거니와 이를 주식으로 삼는 마수들도 있어서 구하는 게 쉽진 않았다.
자고로 요리에 빠져서는 안 될 게 바로 짠맛이다.
그나마 반디의 힘을 빌려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솔트렌을 구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하던 중 젠트리 씨와의 물물교환을 통해 콩과 비슷한 작물을 얻었고, 얼마 전에 수확했다.
나는 마침내 마음속에 묻어둬야만 했던 메주를 쑤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시골에 살았기에 메주를 쑤는 방법은 숙지하고 있었다.
“냄새가 좀 심하죠?”
메주 하면 떠오르는 게 그 특유의 쿰쿰한 냄새다.
나야 익숙하니까 거부감이 들긴커녕 입에 침부터 고였지만, 처음 맡는 이들에게는 악취일 터.
그래서 아예 지하 깊숙한 곳에 숙성실을 만들었다.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메주를 살펴보던 나는 구석에 놓인 장독대를 열었다.
그 안에는 시커먼 액체가 가득 들어있었다.
나는 옆에 둔 국자를 들어 검은 액체를 떠 맛을 봤다.
짭조름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크! 이거지!”
완벽하다.
이건 더 볼 것도 없이 간장이었다.
메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간장만이 아니다.
이 밑에는 짙은 황토색의 잔여물이 깔려있는데, 그것이 바로 된장이었다.
더불어 이 된장을 이용해 고추장까지 만들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지.”
처음 만들어 보는지라 조금은 걱정했는데, 이렇듯 완성된 걸 보니 뿌듯했다.
역시 콩은 없어서는 안 될 작물이라니까.
그도 그럴 게, 콩 하나만으로 간장, 된장.
거기다 고추장까지 만들 수 있었으니 이거야말로 보배가 아니고 뭐겠어.
사실 이 창고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밑에도 또 다른 층이 있으며, 저마다 용도에 나누어져 있었다.
“이제 가죠!”
적당량의 간장을 챙긴 나는 데커드 할아버지의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나는 곧바로 모든 재료를 손질해 커다란 대야에 넣었다.
뒤이어 뮐을 빻은 가루와 적당량의 물을 넣고 휘저었다.
주걱을 들자 묽은 반죽이 토옥, 토옥, 떨어졌다.
오늘의 메뉴는 다름 아닌 부침개였다.
부침개야말로 비교적 간단하고 빠르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요리기도 했고.
맛이야 당연히 맛있는 데다가 다양한 식자재를 넣을 수 있었으니 영양적인 면에서도 흠잡을 게 없었다.
“대장! 대장!”
“응?”
“나도, 나도 하고 싶다!”
“아, 이거 하고 싶어?”
록시는 내가 주걱으로 휘젓는 게 재미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자, 이걸 이렇게 잡고 휘저으면 돼.”
“이렇게?”
내게 주걱을 건네받은 록시가 끙끙거리며, 반죽을 휘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