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소년기(65) - #A/S 가능할까요?
오가른을 따라간 곳은 공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동굴의 입구에 멈춰 선 오가른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 루나에게 보여줬던 당당함은 어디로 숨었는지, 잔뜩 긴장한 사람처럼 얼굴이 굳어있었다.
“······따라 와라.”
게다가 말까지 더듬는 거로 봐서는 저 동굴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으으으······.”
청년 카제르도 동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겁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괘, 괜찮습니다.”
아까 청년 펜서한테 얘기할 땐 그렇게나 카리스마가 넘치더니 말이야.
지금은 그냥 옆에서 툭 치기만 해도 자지러질 것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곳에 그분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거겠지?
더불어 오늘 구출해야 할 비스테르도 갇혀있다고 들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던 오가른이 동굴의 입구로 들어갔다.
“자, 우리도 들어가요.”
“예.”
나는 청년 카제르를 다독이며 오가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얼핏 스테인 씨의 공방으로 이어진 동굴과 비슷한 것 같았다. 다만 어딘가 께름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게 다르다면 달랐다. 게다가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내는 소리였는데, 그것도 꽤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서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특정한 발음이 반복되고, 음률이 있는 게 노래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절에서 들을 수 있는 불경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 소리도 점점 커졌지만, 도통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었다.
애초에 저걸 언어라고 해야 할지도 애매했다.
확실한 건 저 이상한 소리를 내는 이들은 전부 비스테르라는 것이다.
더불어 청년 카제르가 말했던 그거겠지.
나는 이곳으로 오기 전 간략하게나마 동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청년 카제르도 직접 가본 건 아니었다.
하물며 평범하게 이야기를 해준 게 아니라 그냥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홀로 중얼거리는 걸 주워들은 게 전부라나.
그중 하나가 저 괴상한 소리였다.
청년 카제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친구가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중얼거리는 말이 저 주문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음.”
청년 카제르한테 들었을 땐 잘 몰랐는데, 이렇게 직접 들어보니 음침하긴 음침하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오가른의 걸음 속도가 느려지는 걸 보아하니, 녀석도 저 소리를 께름칙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그 외에도 나는 청년 카제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워낙 두서가 없어서 명확하게 알 순 없었으나 동굴 안에서는 무언가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동상이몽.
서로가 다른 생각을 하며 걷기를 10여 분.
마침내 오가른이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서 그분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정면을 쳐다봤다. 커다란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있었고, 양쪽에는 기괴하게 생긴 석상이 서 있었다.
석상은 여러 마수를 섞어 놓은 듯했으며,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내가 잠시 석상을 살펴보는 사이 오가른이 문을 두드렸다.
“데리고 왔습니다.”
끼이이이익.
오가른의 말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들어가라.”
같이 들어가진 않는구나.
나는 청년 카제르와 함께 문 안으로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문이 닫혔다.
자동문이라.
이것도 만들어두면 편할 것 같긴 하네.
특히 센서 같은 게 있으면 여러모로 편리할 것 같았다.
음, 이럴 게 아니라 룬어 중에 센서를 대체할 만한 걸 찾아봐야겠는데.
뭐, 굳이 센서가 아니더라도 스위치를 바닥에 두고, 발로 밟으면 열리고 닫히는 방식으로 해도 괜찮을 것 같긴 하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하여간 나란 놈도 양반은 못 된단 다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DIY를 떠올리는 걸 보면 말이야.
그래도 자동문은 참 편리한 기능이니 조만간 만드는 걸로 하고······.
애써 잡념을 날려버린 나는 방을 스윽 둘러봤다.
대리석처럼 새하얀 돌로 만들어진 테이블. 그 위에는 마수의 뼈로 짐작되는 것들과 함께 용도를 알 수 없는 도구가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더불어 방 곳곳에는 문 옆에 있던 것보다 크기는 작되 기괴하게 생긴 석상들이 빼곡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땐 놀이동산에나 있을 법한 귀신의 집이 연상되는 장소였다.
뚜벅뚜벅.
음산한 장소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모든 비스테르가 말했던 그 가면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심플이요, 있는 그대로 보자면 성의가 없다고 해야 할까.
하얀색 바탕에 구멍 두 개만 뻥 뚫려있는 게 오롯이 얼굴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만 제작된 듯했다.
그 밑에도 심플한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약간 어두운 공간이라서 그런지 얼굴만 동동 떠 있는 게 꼭 달걀귀신 같네.
앞으로 달걀귀신이라고 불러야겠어.
달걀귀신의 뻥 뚫린 구멍이 내 쪽으로 향했다.
“너는 고브가 아니로군.”
오?
첫인상이 워낙 강렬한지라 목소리 또한 개성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달걀귀신의 목소리는 깨끗했다.
다만 목소리가 약간 중성적인 느낌이라서 성별을 단정 짓긴 어려웠다.
그나저나 날 보자마자 고브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 줄이야.
오가른은 눈치가 없는 종족답게 내가 고브라고 철썩 같이 믿었는데.
“들켰네요.”
나는 웃으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치웠다.
“너는······ 그래, 인간이로구나.”
“정답. 아이넬이라고 합니다. 반갑······다고 하기엔 상황이 이상하네요.”
“그래, 결코 반가운 상황은 아니지. 그럼 네 녀석이 갖고 온 그것도 내가 찾던 물건은 아니겠지?”
“짜잔!”
달걀귀신의 말에 나는 물건을 덮고 있던 가죽을 확, 벗겼다.
드러난 것은 평범한 돌이었다.
사실 내가 이곳으로 올 때 들고 있었던 건 진짜 물건이었다.
그도 그럴 게 달걀귀신이 찾고 있는 건 고브가 아니다.
고브가 들고 있던 물건이며, 나는 고브로 위장한 채 이곳에 잠입했다.
즉 가장 먼저 물건부터 확인하리라 생각했다.
거기다 아예 나에게서 뺏어 따로 보관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때를 대비해서 몇 가지 안전장치를 추가해뒀고.
근데, 정작 오가른은 내가 가져온 물건을 검수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냥 주변에 굴러다니던 돌이랑 바꿔치기했다.
달걀귀신이 찾고 있던 진짜 물건은 지금 루나가 가지고 있으며, 지금쯤이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장소에 숨겼으리라.
“그것도 정답이네요! 아쉽게도 상품은 없습니다.”
“정답인데도 썩 기쁘진 않군.”
달걀귀신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거기다 내 능청스러운 태도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오히려 했으며, 유머러스하게 대꾸하며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내가 짠 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 터.
원래부터 침착한 타입이거나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이야긴데.
언행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긴 어렵지만, 왠지 내 육감은 후자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달걀귀신과 고브로 위장한 나.
원하는 걸 찾는 이와 그걸 숨긴 사람.
따지고 보면 칼자루를 들고 있는 쪽은 나다.
지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갑이고 달걀귀신이 을인 것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여유를 부린다는 건 뭔가 믿는 게 있다는 의미겠지.
그리고 그 여유의 원천이라면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일단 저 달걀귀신을 파악하는 시간을 가져볼까나.
“이번에는 내 쪽에서 문제를 내······.”
“잠깐!”
나는 달걀귀신의 말을 뚝, 잘랐다.
갑자기 내가 말을 끊어버리자 달걀귀신이 움찔했다.
“뭐······ 뭐냐?”
“그전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어진 내 말이 황당했는지, 달걀귀신이 헛숨을 들이켰다.
“지금 나한테 궁금한 걸 묻겠다는 거냐?”
“네. 꼭 듣고 싶어서요.”
“······뭐지?”
“고브가 들고 있던 그거요. 그게 대체 뭔데 그렇게 찾는 거예요?”
군더더기라고는 일절 없는, 말 그대로 직설적인 물음에 달걀귀신이 입을 꾹 닫았다.
“내가 그걸 알려줄 거라 생각하는가?”
“싫으면 말고요.”
“뭐?”
이번에는 내 도발이 먹혔는지, 달걀귀신이 잠시 멈칫했다.
“궁금하긴 한데, 몰라도 별로 상관은 없을 거 같아서요. 보니까, 그냥 시커먼 돌이던데. 아, 그거 그냥 장식품이죠?”
이번에는 깐족거림 한 스푼을 추가해서 대꾸했다.
달걀귀신의 어깨가 작게 떨리는 게 적잖이 동요하는 듯했다.
“노, 놈! 네까짓 게 감히! 그분의 영혼을 장식품이라고 표현하는 거······!”
“그분의 영혼?”
달걀귀신이 다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음!”
그분의 영혼이라······.
“그 돌이 영혼이라는 건 아닐 테고······.”
움찔.
“봉인 뭐 그런 건가.”
움찔.
“그리고 그 돌을 찾는다는 건 봉인을 풀기 위함이고.”
움찔.
“그럼 비스테르를 납치하고, 저기서 이상한 주문을 외우는 것도 봉인을 깨트리려고 하는 거구나.”
움찔.
“아니, 아예 이 장소가 봉인을 깨트리기 위해 지어진 장소였다는 거지.”
움찔.
얼씨구.
달걀귀신은 내가 한 마디 뱉을 때마다 어깨를 떨었다.
내 말이 무슨 술도 아니고, 언제까지 어깨춤을 출 생각일까.
원래부터 차분하긴 개뿔. 그냥 억지로 감정을 숨기고 있었던 게 맞았네.
이쯤 되니 감정을 못 숨기는 타입이라서 일부러 가면을 쓴 거 아닐까, 라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들었다.
그나저나 그 돌에 영혼이 봉인되어 있다는 건······그만큼 위험하다는 이야기겠지.
하기야.
좋은 일이었더라면 이렇게 은밀하게 할 이유도, 비스테르를 억지로 잡아다가 주문을 외우라고 시킬 이유도 없었겠지.
비스테르를 탈출시킬 계획이었는데, 이래선 소 뒷걸음질 치다가 소를 잡은 격이라고 봐야 하나.
뭐,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아예 봉인을 풀지 못하게끔 막는 게 정답이리라.
“거기까지!”
“응? 아, 아직 거기 계셨구나.”
“이익!”
드디어 달걀귀신의 포커페이스가 깨졌다.
“놈! 후환이 두렵지도 않은 거구나!”
달걀귀신은 이 이상 연기를 이어갈 생각이 없었는지, 아예 대놓고 분노를 표출했다.
저럴 거면 가면도 벗어버리는 게 좋을 텐데.
“문제를 내겠다!”
내가 맞장구를 쳐주지 않자 서운했던지, 대뜸 문제를 내겠다고 나섰다.
여기서 더 장난쳤다가는 울겠구만.
“내보세요.”
선심 쓰듯 대답해주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달걀귀신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과연 네 목에 차고 있는 건 뭘까?”
“목걸이죠. 아, 문제라고 했으니까 더 정확하게 말해야 하나? 음······. 저주의 힘이 담긴 목걸이? 차면 명령에 따라야 하는 목걸이?”
“······그래. 정답이다. 나는 특별히 상품을 줘야겠군.”
“상품이요?”
“그래. 너에게 더 없을 고통을 안겨주마!”
달걀귀신이 대뜸 품에서 짤막한 지팡이를 꺼냈다.
지팡이의 머리에는 둥그런 구슬이 달려있었는데, 그곳에서 풍기는 기운은 목걸이에 담긴 것과 아주 흡사했다.
달걀귀신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무어라 외쳤다.
그와 동시에 지팡이 끝에 달린 보석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도 잠시였다.
보석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공중에서 잠깐 머무는가 싶더니 스르륵, 사라졌다.
“뭐, 뭐가 어떻게······!”
“아, 맞다. 미리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요.”
나는 턱을 치켜들었다.
진작부터 해제해 둔 목걸이를 빼고는 여 보란 듯이 흔들었다.
“이거······ 고장 난 것 같은데, A/S 가능할까요? 무상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