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81화 (79/159)

81. 소년기(62) - #고브의 정체

“진정하세요.”

다급한 소녀 라핀의 귓가에 잔잔한 소년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만약 목소리에도 색깔이 있다면 저 드넓은 산맥의 푸르름이 떠오른다고 해야 할까.

기쁜 날에도 슬픈 날도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서 자신을 보듬어주는 숲을 닮은 목소리였다.

소녀 라핀이 멍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브······?”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고브였다.

그는 로브라기도 뭣한, 말 그대로 거적데기를 걸치고 있었다.

후드 사이로 살짝 드러난 입이 호선을 그렸다.

두근두근.

어째서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고브를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불과 10분 전만 하더라도 소녀 라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단 오늘만이 아니었다.

오늘을 견뎌내더라도 또다시 내일을 버텨야 한다는 압박감에 하루하루가 우울했다.

소년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평생을 달고 살아야 할, 말 그대로 고질병과도 같았던 우울감마저 날려버릴 만큼 청량했으며, 또한 싱그러웠다.

소녀 라핀의 시선이 입에서 코로, 다시 코에서 눈으로 향했다.

이내 시선이 마주쳤다.

가볍게 두근거리던 소녀 라핀의 가슴이 쿵쾅쿵쾅 세차게 뛰었다.

한편으로는 들끓었던 모든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도 동반하고 있었다.

한결 침착해진 소녀 라핀이 살짝 벌려진 입을 오물거렸다.

“너는······ 누구야?”

처음 보는 상대에게 반말을 뱉었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소녀 라핀은 알고 있었다.

“너는 고브가 아니야.”

그녀는 이미 고브를 본 기억이 있다.

정확히는 명령에 따라 고브를 추적하는 임무를 맡은 경험이 있다.

그녀가 본 고브의 공통적인 특징은 피부가 탁한 녹색이라는 것과 얼굴의 중앙에는 유난히도 큼지막한 코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고브의 특징은 많았다.

단언할 수 있었다.

눈앞의 고브는 자기가 알던 고브가 아니었다.

소녀 라핀은 알고 싶었다.

“너는 누구야?”

그가 대체 누구인지, 왜 고브로 위장해서 이런 위험한 곳에 왔는지 궁금했다.

“아이넬이라고 합니다.”

소년이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아이넬? 이름이야?”

소녀 베아드였다. 자신의 친구가 갑자기 달려가니 엉겁결에 따라온 것이다.

자신을 아이넬이라 소개한 가짜 고브가 소녀 베아드를 올려다봤다.

“안녕하세요. 베아드 부족 맞죠?”

소년 아이넬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베아드 소녀는 그 산뜻한 미소에 움찔하더니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네. 라핀 씨가 본 것처럼 고브는 아니에요. 저는 인간입니다.”

“인간?”

소녀 라핀의 귀가 좌우로 까딱였다. 그녀가 모르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할게요. 아, 궁금한 게 있는데요.”

“으응.”

“혹시 이곳에 있는 비스테르가 전부인가요?”

인간의 질문에 소녀 라핀이 고개를 저었고, 소녀 베아드는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동굴이 있어. 그 안에도 비스테르가 있어.”

“음······.”

아이넬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야?”

“그건······.”

설명을 하려던 아이넬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소녀 라핀도 서둘러 소녀 베아드의 팔을 잡았다.

“오가른이 오고 있어.”

“알았어.”

소녀 베아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향했다. 소녀 라핀 또한 몸을 돌렸으나,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아이넬과 어린 캣시를 향해 말했다.

“그 목걸이는······. 위험해. 정말로.”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며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아이넬은 전혀 걱정할 거 없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너무나도 여유로운 그 태도에 소녀 라핀이 울상을 지었다.

“정말인데. 정말로 위험한데······.”

몇 번을 강조해도 아이넬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조심할게요. 아, 감시자가 오고 있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아, 알았어. 조심해야 해.”

이윽고 소녀 라핀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등에 커다란 몽둥이를 걸친 오가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속했던 대로 그의 손에는 자신들이 찬 것과 비슷한 목걸이가 들려있었다.

“후후, 많이 기다렸나?”

“아니.”

어린 캣시가 짧게 대답했다.

‘저. 저러면 안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가른은 어린 캣시의 태도가 불쾌했는지 표정이 굳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오가른은 서둘러 표정을 풀고는 목걸이를 내밀었다.

“자, 이걸 차라. 그럼 너도 저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듣기에는 상당히 매력적이었지만, 소녀 라핀의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르게 해석이 됐다.

-이걸 차면 앞으로 우리의 꼭두각시가 될 거다. 크크크, 그때가 기다려지는 군.

남들이 보면 지나친 과장이라며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으나, 소녀 라핀에게는 진짜로 저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소녀 라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캣시가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차라. 어려우면 도와줄 수도 있는데.”

혹여 어린 캣시가 목걸이를 차지 않을 것 같았는지, 오가른이 손을 뻗어 착용을 도와주려 했다.

탁!

“윽!”

어린 캣시가 벌레를 내쫓듯 손을 휘둘러 오가른의 손을 쳐냈다.

“만지지 마. 가까이 오지 마.”

마치 더러운 오물을 만진 듯한 태도였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오가른과 닿은 손등을 카제르 청년의 옷에 슥슥 닦았다.

‘아니, 자신의 옷에 닦으면 되는 거 아니야?’

오죽했으면 소녀 라핀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카제르 청년 또한 황당한 얼굴로 어린 캣시를 쳐다볼 정도였다.

“만지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이 말이 결정타였다.

굳이 카제르 청년의 옷에 닦았는지는 당최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오가른과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 하나는 확실하게 전달됐다.

심지어 어린 캣시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더니 옆에 있는 고브에게 건넸다.

누가 보더라도 차는 걸 도와달라는 몸짓이었다.

“너, 이 자식······!”

자신과 고브를 대할 때 느껴지는 극명한 온도 차이에 오가른의 회반죽 색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

오가른은 평소 눈치가 없기로 소문이 난 종족이었다.

머리보다는 몸을 쓰는 걸 좋아했고, 평소 언행도 단순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제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한들, 이렇게 대놓고 감정을 표출하는데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둔한 건 아니었다.

오가른이 파들파들 떨며 몽둥이를 움켜쥐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청년 카제르가 허둥지둥 어린 캣시의 앞을 막아섰다.

“죄, 죄송합니다. 원래 캣시 부족의 성격이 이렇습니다! 거기다 어린 캣시라면 밤 사냥이 특기니 앞으로 활약도 많이 할 수 있을 겁니다!”

청년 카제르의 필사적인 변호에도 오가른의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에 청년 카제르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그, 그리고 목걸이만 차면······.”

목걸이만 차면.

달리 말해서 목걸이를 채우면 어린 캣시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수 있음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청년 카제르의 말에 소녀 라핀은 물론, 은근슬쩍 상황을 지켜보던 모든 비스테르의 표정이 굳었다.

비스테르에게 있어서 목걸이는 곧 트라우마였으며, 지금 청년 카제르의 말은 상처를 후빈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오가른 또한 그 의미를 파악했는지, 눈을 빛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고브의 도움을 받아 목걸이를 차는 어린 캣시가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넘겨 드러난 하얀색 목덜미 위에 목걸이를 둘렀다.

철컥.

이음쇠가 걸리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목걸이를 찬 것은 어린 캣시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고브 또한 목걸이를 착용했다.

“됐군.”

이로써 한 명의 고브와 어린 캣시는 자유를 잃었다.

오가른이 씨익 웃더니 슬그머니 몽둥이에서 손을 거뒀다.

“그렇군. 그래, 네 말이 맞다. 목걸이를 차면 해결이 되는 문제였지. 후후, 그래. 좋다, 내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물론 목걸이를 찬다고 오가른이 당장 벌을 주거나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감시자였으며, 지시를 받아 따르는 입장이다.

하지만 오가른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달리 말해서 어린 캣시가 가장 싫어하고, 꺼릴 만한 명령을 골라 전달할 수 있었다.

특히 모든 비스테르가 단연 피하고 싶어 하는 임무가 있었는데, 여차하면 그곳으로 어린 캣시를 보내면 되는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는지, 오가른의 입가가 씰룩이더니 홱 몸을 돌렸다.

“너는 그분이 오실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너는······ 언제까지 당당할 수 있을지 두고 보마.”

씹어 뱉듯 으름장을 놓은 오가른이 떠나고, 공터에 고요가 찾아왔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았던 정적을 깬 이가 있었다.

“너 이 자식!”

펜서 부족의 청년이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청년 카제르에게 달려들더니,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퍽!

“크윽!”

부지불식간에 얻어맞은 청년 카제르가 풀썩 쓰러졌다.

“뭐라고? 목걸이만 차면? 지금 그게 할 말이냐!”

펜서 부족의 청년은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쓰러진 카제르 청년의 멱살을 잡았다.

“니가 그러고도 비스테르냐? 오겠다고 해도 말렸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가 더니 다른 한손으로 어린 캣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린 캣시를 데리고······!”

청년 펜서가 재차 주먹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손을 잡아채는 인물이 있었다.

“그만. 거기까지만 하세요.”

아이넬이었다.

아이넬은 청년 펜서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에요.”

“너는 뭐······ 윽!?”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펜서 청년이 아이넬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손을 뿌리치긴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정하세요. 카제르 씨가 루나를 데려온 데에는 사정이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지? 그리고 루나는 또 뭐냐?”

“내가 루나야.”

“뭐?”

청년 펜서의 시선이 루나에게로 향했다.

“내가 여기에 온 건 이 목걸이 때문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예요. 우리가 이곳에 온 건 자유를 빼앗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빼앗겼던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거든요.”

아이넬의 말을 곱씹던 청년 펜서가 피식 웃었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지금 네가 찬 목걸이가 뭔지는 알고 떠는 거냐고!”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절망이 배어있었다.

“찾는 게 아니라 되찾는 건데. 아무튼, 이건 저주의 힘이 담긴 목걸이라고 하던데요?”

태연자약한 대답에 청년 펜서가 입술을 깨물더니 아이넬을 노려봤다.

“저주? 그래, 저주라면 저주겠지. 똑똑히 들어라. 그 목걸이를 차는 순간 너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이해했어요.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행하고 싶었는데, 그냥 여기서 밝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소리냐?”

청년 펜서의 말에 아이넬이 루나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턱을 치켜들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목걸이가 드러났다.

“보세요.”

뒤이어 아이넬이 로브를 들추더니 그곳에서 웬 망치를 하나 꺼냈다.

“그, 그건 뭐냐?”

난데없는 망치의 등장에 청년 펜서가 흠칫했다.

혹여나 자신을 공격할까, 겁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망치는 옆에 선 루나의 목으로 향했다.

아이넬이 망치로 목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청년 펜서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도 그럴 게, 단단하게 고정되어있던 목걸이가 너무나도 쉽게 풀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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