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80화 (78/159)

80. 소년기(62) - #소녀 라핀의 우울

라핀 부족의 소녀가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멍한 시선에 드넓은 창공이 들어왔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은 푸르렀고, 지상을 데우는 햇볕도 따스했다.

그러나 정작 햇볕을 쬐는 라핀 부족의 여성은 몹시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동안 하늘을 응시하던 라핀 소녀가 고개를 내렸다.

본래는 쫑긋 서 있어야 할 귀도 축 쳐져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여러 비스테르가 있었다.

그들도 소녀 라핀과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괜찮아?”

이런 소녀 라핀에게 말을 거는 인물이 있었다. 이곳에 잡혀 온 후로 친해진 베아드 부족의 소녀였다.

갈색 털과 동글동글한 귀가 특징이었으며, 엉덩이에는 앙증맞은 꼬리가 달려있었다.

한편으로는 소녀 라핀에 비해 유독 덩치가 컸는데, 살짝 드러난 팔과 다리에는 근육이 붙어있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땐 몹시도 건강해 보이는 소녀였다.

소녀 베아드의 걱정 어린 물음에 소녀 라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괜찮아.”

입으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소녀 베아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 또한 같은 소녀 라핀와 똑같은 마음이었으니까.

“너는 괜찮은 거야?”

소녀 라핀이 물었다.

이에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소녀 베아드가 근처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집어 땅을 헤집었다.

“가기 싫은 거지?”

재차 던져진 소녀 라핀의 말에 쿡쿡, 별 의미 없이 흙바닥에 낙서하던 소녀 베아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가기 싫어. 차라리 그냥 이곳에 있고 싶······ 미안.”

말을 하던 소녀 베아드가 다급하게 말을 삼켰다.

소녀 라핀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긴 뭘.

너는 베아드 부족이고, 나는 라핀 부족이니까.”

소녀 라핀이 괜찮다는 듯 웃었으며 말했다.

“······.”

이곳에 있는 비스테르에게는 저마다 임무가 주어진다.

일례로 베아드 부족의 경우는 유달리 몸집이 크고 힘이 세다.

따라서 힘을 쓰는 일이라면 항시 베아드 부족이 맡아서 한다.

반면에 라핀 부족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다.

태어날 때부터 지닌 재능이라고는 특출하게 민감한 청력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정정한다.

그나마 청력이라도 좋았기에 이렇듯 바깥에 나와 햇볕을 쬘 수 있는 거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방치되었을 터.

그래 봐야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으며, 숲을 좋아하는 라핀 부족에게 있어서 가장 지독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소녀 라핀은 알고 있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잖아.”

힘든 것은 본인만이 아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비스테르는 자유를 잃었으며, 막연한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런 소녀 라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베아드 부족이 곧잘 임무에 불려나가고, 비교적 대우가 좋은 건 맞다.

하지만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늘었다.

하물며 베아드 부족은 다른 종족과의 충돌이 잦기에 다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베아드 부족은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평화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다른 종족을 압박하는 임무를 도맡았으니 이러한 스트레스는 커다란 응어리가 되어 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실제 소녀 베아드만 하더라도 수시로 이어지는 전투와 충돌에 심신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소녀 베아드가 습관처럼 하던 말을 뱉으려던 찰나였다.

“이대로 도망······ 읍!”

소녀 라핀이 재빨리 손을 뻗더니, 그대로 소녀 베아드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대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소녀 라핀이 슬쩍 뒤를 쳐다봤다.

그곳에는 울창한 숲이 전부였으나 소녀 라핀은 알 수 있었다.

“누가 왔어.”

그녀의 예민한 귀에 인기척이 감지된 것이다.

언제까지고 축 늘어져 있을 것 같았던 소녀 라핀의 귀가 그 어느 때보다 높게 솟으며 주변의 소리를 끌어당겼다.

흡사 안테나처럼 빙글빙글 도는 소녀 라핀의 귓속에 부산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6명이네.’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비록 컨디션이 나쁜 상태였다고는 한들, 발소리만으로도 정확한 인원수를 맞췄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명은 감시자인 오가른이고······. 뒤에 따라오는 3명은······카제르 부족이구나. 근데, 다른 둘은 누구지?’

소녀 라핀은 이곳에 있는 모든 비스테르는 물론, 이 근방을 지키는 감시자들의 발소리 기억하고 있다.

나아가 그들의 숨소리나 습관을 통해 나는 아주 사소한 소리까지도 빠짐없이 암기하고 있었다.

일단 4명은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라는 걸 확신했으나, 뒤에서 따라오는 둘은 아니었다.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졌고, 작게나마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의외로군. 늦게까지 오지 않기에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거든.

이는 감시자인 오가른의 목소리였다.

-도, 도망이라니요. 제가 어떻게 도망을 친단 말입니까?

-큭큭. 그냥 해본 말이다. 네 녀석의 목에 그게 걸려있는 이상 도망은 꿈도 못 꾸겠지. 아니, 그게 없어도 도망치지 못하겠지.

이어지는 오가른의 말에 소녀 라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지······. 이 목걸이가 있는 이상 우리는 도망칠 수 없어.’

잡혀 온 비스테르들은 어떻게든 목걸이를 풀겠답시고 갖은 노력을 했다.

소녀 라핀 또한 몇 번이고 시도를 해봤다.

그러나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목걸이를 풀고 자유를 되찾긴커녕 지독한 벌을 받아야만 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평생을 아니, 죽어서도 이 공터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내일에 대한 기대는 접혔고, 남은 것은 그릇된 선택에 대한 후회였다.

희망은 절망으로 변하고, 그러한 절망은 포기로 이어졌다.

이것이 이곳에 갇힌 모든 비스테르가 가진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소녀 라핀의 생각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우웁!”

“아! 미, 미안.”

소녀 베아드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서둘러 손을 거뒀다.

“누가 온 건데?”

“오가른이랑 카제르 부족.”

“카제르 부족이면 저번에 따로 불려갔었잖아.”

“응. 아, 그러고 보니.”

소녀 라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얼마 전이었다. 늘 그렇듯 공터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녀 라핀의 귀에 들려온 이야기가 있었다.

“고브가 뭔가를 들고 도망갔다는 걸 들었어.”

“고브가?”

“응. 그, 있잖아. 얼굴에 가면 쓴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었어. 되게 화가 난 것 같았어.”

당시가 기억난 소녀 라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곳에 잡힌 비스테르들은 가면의 남자를 두려워했다.

그가 무언가 악질적인 행동을 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면의 남자는 입이 무거웠으며,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존재감을 유지했다.

본능적인 공포라고 해야 할까.

가면에 뚫린 눈구멍으로 드러난 새카만 눈동자.

마치 달도 뜨지 않은 밤처럼 새카만 그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칠 때면 저도 모르게 뒷목이 뻣뻣해지곤 했다.

더불어 그 가면의 남자가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기도 했다.

“뭘 들고 도망갔다는 거야?”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근데, 되게 중요한 것 같았어.”

“중요한 거라니. 대체 뭘까?”

소녀 베아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잘 모르겠어.”

“으음······. 만약 우리가 그걸 찾으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소녀 베아드의 혼잣말에 소녀 라핀이 고개를 저었다.

“늦은 것 같아.”

“응?”

“이미 찾은 것 같아.”

소녀 라핀이 확신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아무튼, 옆에 있는 작은 녀석이 그분께서 찾던 고브냐?

소녀 라핀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귀는 열심히 움직이며 잡아낸 대화 속에 고브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럼 뒤에서 따라오는 두 사람은 고브라는 거네.’

-예. 고브가 맞습니다.

소녀 라핀의 짐작은 청년 카제르의 말에 확신으로 변했다.

-흐음, 근데 내가 듣던 거랑은 조금 다르게 생긴 것 같은데?

-그, 아닙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던 고브가 화, 확실합니다.

-흐음······. 뭐, 나야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고브가 들고 있던 물건은? 어이, 고브. 어디 있냐.

오가른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무척이나 앳된 목소리였다.

정황상 저 목소리의 주인이 물건을 들고 도망쳤다는 고브일 터.

-여, 여기 있습니다.

고브는 겁을 집어먹은 듯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라면 도망칠 수 있을까?’

비록 다시 잡히긴 했지만, 고브는 이곳에서 도망친 전적이 있다.

소녀 라핀이었더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용기였으며,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없던 존경심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음. 이게 그분께서 찾던 물건이라는 거군. 음? 그럼 고브는 필요 없지 않나? 굳이 데려가는 것보다는 여기서 처리하는 쪽이 편할 것 같은데.

오가른의 말에 청년 카제르가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 그건 안 됩니다!

-왜지? 굳이 그분이 원하시는 건 이 물건이 아니던가?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 말이야.

-그건······.

청년 카제르가 멈칫한 사이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이 고브가 갖고 있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이번에 들려온 목소리 또한 앳되었다.

다만 방금 전 고브와는 달리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흐음. 너는······. 캣시라고 했었나?

-맞아. 나는 캣시 부족이야.

소녀 라핀이 깜짝 놀랐다.

‘캣시? 캣시라고?’

캣시 부족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밤 사냥이 특기이며, 비스테르 중에서도 꽤 강한 축에 속하는 부족이었다.

하지만 소녀 라핀이 놀란 것은 캣시라서가 아니었다.

‘저 캣시도 우리처럼 속은 거야!’

진짜로 그렇다면 말려야만 했다.

그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을지언정 자신과 같은 비스테르다.

목소리를 들어봤을 때 아직 어린 캣시인 것 같았는데, 이곳에 갇혔다가는 얼마 버티지 못한다.

설령 버틴다고 한들 캣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고브가 가진 물건이 가짜일 수도 있다라. 듣고 보니 그렇군. 너는 꽤나 영특한 녀석이로구나. 아, 그러고 보니 너도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따라서 온 거겠지?

-맞아. 청년 카제르가 말했어. 이곳에 가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래. 저 녀석의 말대로다. 보면 저 녀석의 목에 차고 있는 목걸이가 보이지?

오가른이 후후, 웃더니 은근슬쩍 목걸이를 언급했다.

-보여.

-저걸 차면 너도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침 내가 여분의 목걸이를 갖고 있지. 어때? 괜찮으면 내가 가지고 오마.

오가른의 말에 소녀 라핀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안 돼. 목걸이를 차면 안 돼.’

하지만 이런 소녀 라핀의 바람은 금세 좌절로 바뀌었다.

-알았어.

-시원시원하군. 좋다. 어이, 카제르. 고브랑 캣시를 데리고 가서 대기하고 있어라.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오가른은 마지막에 속삭이듯 말했지만, 소녀 라핀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아, 알겠습니다.

이윽고 오가른의 발자국이 멀어져 갔다.

“어? 저기, 저기 온다.”

소녀 베아드의 말에 퍼뜩 고개를 돌리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돌연 소녀 라핀이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

소녀 베아드가 서둘러 잡으려 했지만, 이미 소녀 라핀은 날듯이 뛰어 그들의 앞에 도착했다.

“너는······.”

청년 카제르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하지만 소녀 라핀은 그를 매섭게 쏘아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너, 너가 캣시지?”

“맞아. 너는 라핀 부족?”

“응. 라핀 부족이야.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빨리, 빨리 여기서 도망쳐야 돼.”

“도망?”

자신에게 반문하는 어린 캣시의 어깨를 잡았다.

“여기는 위험한 곳이야. 목걸이를 찬다고 저주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오가른이 오기 전에 빨리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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