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소년기(59) - #이것은 얼음입니다.
고개를 들자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그 전에, 정리부터 좀 해야겠네.”
나는 난장판이 된 주변을 보며 픽 웃었다.
홀로 실험을 하며 몇 가지 성과를 얻어낼 순 있었지만, 덕분에 근방은 초토화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중요한 걸 알아낼 수 있었으니 아무렴 좋았지만 말이야.
부지런히 움직여 뒷정리를 끝낸 나는 오늘도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다만 오늘은 회관 안에 있는 회의장이 아닌 건물 뒤쪽에 있는 공터로 향했다.
그곳에는 나의 가장 큰 협력자이자 지원자인 레비아 선생님을 비롯하여 도리아 아주머니와 두 듀로프가 모여있었다.
“아이넬 왔구나.”
“네! 다들 안녕하세요!”
모두와 짧은 인사를 나눈 나는 으레 그렇듯 근처에 설치한 화로에 불을 붙였다.
주전자에 물을 담아 보글보글 끓이고, 미리 준비했던 간식들을 꺼냈다.
“캬, 냄새가 끝내주는군.”
헤파이토 씨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군침을 흘렸다.
“호오, 이건 처음 보는 거네?”
“이번에 새로 만든 거거든요!”
레비아 선생님도 내가 꺼낸 간식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는 도리아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인 게 이곳에는 간식이라는 게 별로 없다.
그나마 미슐레 아주머니의 실험정신이 투철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그냥 나무에 열린 열매를 말린 게 유일한 간식이었으니까.
뭐, 건강을 생각한다면 참 좋은 간식이었지만 매일 그것만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아예 접해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나는 이미 지구에서 온갖 다양한 맛을 경험했다.
특유의 자극적인 맛이라고 해야 할까.
먹고 나면 괜스레 후회부터 되지만 정신 차리고 보면 이미 또 한 봉지를 뜯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마는 마성의 과자들이 곧잘 생각나곤 했고.
그래서 나는 미슐레 아주머니한테 요리를 배우면서 내 나름의 레시피 북을 만들었다.
레시피에 적힌 것들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찾는 게 더 어렵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었지만.
옛말에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레비아 선생님을 통해 장터를 알게 되고, 그곳에서 젠트리 씨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가장 중요한 재료를 손에 넣었다.
“이건 코코나트 쿠키라는 거고, 이건 아프루 파이라는 거예요. 이번에 수확한 뮐알로 만들었어요!”
그렇다.
가장 중요한 재료는 다름 아닌 뮐이었다.
나는 뮐알을 빻아서 가루를 냈고, 마침내 간식의 대명사라고도 볼 수 있는 과자들을 구울 수 있었다.
물론 지구의 것처럼 진짜 맛있는 과자를 만들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 이 상태로도 내 미각은 충분히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접시에 쿠키와 파이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올렸다.
“참기가 힘들군. 나 먼저 실례하지.”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역시나 헤파이토 씨였다.
그는 내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곧장 쿠키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헤파이토 씨는 먹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단연 선호하는 건 술이었지만, 함께 곁들이는 안주만 하더라도 족히 10인분씩은 먹는다.
나는 듀로프가 다들 대식가인가, 했는데 다른 세 듀로프를 보면 그건 또 아니었다.
물론 많이 먹긴 먹는데, 종일 망치만 두드리는 걸 고려하자면 오히려 소식에 가깝다고 봐야겠지.
즉 헤파이토 씨가 유별나게 많이 먹는 사람인 것이다.
만약 헤파이토 씨가 지구에 있었더라면 더 볼 것도 없이 푸드파이터 내지는 먹방 스트리머가 되었으리라.
“아, 그리고 이거 베니트 씨랑 스테인 씨 드리면 돼요.”
나는 올룸스 씨에게 작은 바구니를 하나 건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듀로프는 헤파이토 씨와 올룸스 씨 두 사람이었다.
스테인 씨는 이런 회의가 익숙지 않다면서 대장간에 남아 제작에 열을 올리기로 했다.
베니트 씨는 얼마 전 소개해준 미슐레 아주머니께 이것저것 배우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헤파이토 씨조차 베니트 씨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푹 빠졌다나.
그래도 매일 새로운 요리를 맛볼 수 있었으니, 헤파이토 씨에게도 좋은 일이겠지.
“뭐, 이런 걸 다······.”
“좋은 건 다 같이 나눠야죠. 아, 그리고 이거 축제 때 내놓을까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자연스럽게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잠시 소강상태였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내 제안에 조심스레 쿠키를 씹던 도리아 아주머니가 냉큼 고개를 끄떡이셨다.
“맛있구나. 이거라면 모두가 다 좋아할 것 같아.”
오케이.
“그럼 축제에 내놓을 요리 목록에 추가해 둘게요.”
“매번 고맙구나.”
도리아 아주머니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본격적인 회의를 진행해볼까.
“뭘요. 아, 맞다. 오늘 레비아 선생님이 말씀하실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짐짓 모른 척 레비아 선생님을 언급하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레비아 선생님이 호로록, 차를 마시며 내 말을 받았다.
“휴우, 좋구나. 그래, 오늘 이렇게 모여달라 한 것은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부탁이라는 말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집중했다.
“부탁이라면······?”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저는 새로운 축복을 부여한 가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가구!”
도리아 아주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헤파이토 씨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도리아 아주머니가 퍼뜩 헤파이토 씨께 고개를 숙였다.
“헤파이토 씨가 도움을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음? 어, 큼! 우리는 다 같은 이웃이 아니오? 그리 고마워할 건 없소이다!”
헤파이토 씨가 은근슬쩍 내 눈치를 봤다.
그도 그럴 것이, 듀로프에게 있어서 제작이란 곧 인생이다.
스테인 씨만 하더라도 그렇다.
내가 만든 도구를 그대로 카피하는 건 곧 제작자에 대한 모욕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지금이야 내가 스승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지만 말이야.
즉 헤파이토 씨의 입장에서는 내 공을 가로챈 것과 같았으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걸 알기에 헤파이토 씨도 순순히 내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도 손님이신데, 이렇게 큰 도움을 주시니 어찌 고맙지 않겠어요.”
“후후, 나도 그만큼 받고 있으니 너무 괘념치 마시오. 아니, 오히려 베니트도 이 마을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아서 걱정이오.”
“그런가요? 저야 여러분이 이곳에 계신다면 대환영이랍니다.”
“하핫, 그 말 기억하고 있겠소.”
“그럼요. 저는 진심이랍니다.”
오고 가는 칭찬과 감사에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아, 때마침 오고 있군요.”
레비아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공터로 진입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아, 대장이다!”
록시였다.
록시는 커다란 수레를 질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스테인 씨와 함께 제작한 냉장고와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 옆에는 특별한 손님도 함께 오고 있었다.
“흐음······.”
다름 아닌 데커드 할아버지였다.
데커드 할아버지는 늘 그렇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우리를 힐끗 쳐다보셨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로는 연신 나와 레비아 선생님을 힐끗거리셨는데, 안 그런 척하면서도 은근히 긴장하고 계신 모양이다.
데커드 할아버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했다.
레비아 선생님을 소개한 뒤에 자연스럽게 합류하기로 되어있었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으니까.
도리아 아주머니는 뜬금없이 등장한 데커드 할아버지를 보며 놀라셨지만, 이미 한 차례 언질을 받은 덕분인지 금세 표정을 추슬렀다. 아울러 한편으로는 반가워하는 눈치기도 했다.
뭐, 도리아 아주머니가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알았던 사이였으니 반갑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대장!”
근처에 수레를 놓은 록시가 후다닥, 달려왔다.
나는 록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 배고프지?”
“배고프다!”
“자, 여기 앉아.”
“우와아아아!”
록시가 테이블에 있는 다과를 보며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나는 록시의 손에 파이 하나를 쥐여줬다.
먹어도 되느냐는 록시의 눈빛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도 돼.”
“응!”
“그나저나, 루나는 안 보이네.”
“우웅, 루나······. 아직 안 왔다!”
“아직 안 왔다구?”
이상하네.
지금 시간이면 데커드 할아버지의 오두막에서 낮잠을 잘 시간인데 말이야.
루나가 원체 강한 아이였고, 혼자서도 잘하는 타입이다.
뭔가 큰일이 벌어졌으리라는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내심 신경이 쓰이긴 했다.
이럴 땐 서로 연락할 수 있는 도구가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단 말이지.
좋아.
조만간 만들어보는 거로 하고······.
“오랜만에 뵙네요.”
“오랜만이군. 코찔찔이였던 게 어제처럼 느껴지는데 말이야.”
“코, 코찔찔이요?”
도리아 아주머니에게 코찔찔이라니.
저런 거침없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이는 데커드 할아버지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래도 틱틱거리되 어딘가 밉지 않은 말투야말로 데커드 할아버지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친근함의 표시였으니까.
도리아 아주머니 또한 이를 알고 있음인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호호. 하여간, 여전하시네요. 아, 그러고 보니 레비아 씨랑 아는 사이였다면서요?”
“아는 사이라. 그냥 저 녀석이 일방적으로 알은체를 한 게지.”
“그런 걸 아는 사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흥.”
도리아 아주머니의 논리에 데커드 할아버지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리셨다.
“할아버지, 고생하셨어요!”
“저걸 옮기는 게 뭐 고생이라고.”
“헤헤. 그래도요. 아, 할아버지도 배고프시죠. 여기 앉으세요!”
나는 곧바로 데커드 할아버지의 차를 내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흐뭇한 얼굴로 이곳을 지켜보던 레비아 선생님이 수레에 쌓인 물건들을 차곡차곡 내렸다.
나와 도리아 아주머니도 레비아 선생님을 도왔다.
“먼저 이건 냉장고라는 겁니다.”
“냉장고?”
도리아 아주머니의 반문에 레비아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어깨를 살짝 밀었다.
“설명 좀 부탁해도 될까?”
“네!”
나는 레비아 선생님을 대신해서 냉장고에 대해 설명했다.
냉장고의 기능이야 워낙 단순해서 금방 설명을 끝낼 수 있었다.
“그, 그러니까 이 냉장고라는 게 있으면 오랫동안 음식을 보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니?”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냉장실을 열었다. 안에는 이미 몇 가지 음식들이 들어있었다.
“만져보세요.”
“차갑구나.”
“그쵸? 밑에 있는 이 칸은 냉장실이라고 해서,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에요. 그리고 이 위는 냉동실이라고 하거든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냉장실을 열었다.
“여기요.”
“이, 이건······?”
내가 건넨 그릇을 본 도리아 아주머니가 깜짝 놀랐다.
“훨씬 더 차갑죠?”
“그, 그렇구나. 이게 대체······.”
“그건 얼음이라는 거예요.”
“얼음?”
이런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 도리아 아주머니는 얼음을 모른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의 기후는 고정적이다.
정확히는 마을을 중심으로 반경 10km가량은 매일 비슷한 날씨를 유지한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살기에 최적화된 장소라고도 볼 수 있었는데, 대신 작물이나 동물이 살아가기에는 조금 애매했다.
애당초 농사를 짓지 못했던 것도 이러한 일정한 기후의 영향이 컸고.
“네. 물을 차갑게 하면 그렇게 단단해지거든요.”
“정말······. 정말로 신기하구나.”
도리아 아주머니는 처음 보는 얼음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일전에 레비아 선생님이 이런 대사를 읊었었다.
“파메르 님은 조화의 신입니다. 세상이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이해하고, 꿰뚫어 보는 분입니다.”
나야 별다른 의미 없이, 그냥 그럴싸하게 보이겠답시고 추가한 대사였는데, 도리아 아주머니의 입장에서는 이 얼음이라는 것 또한 파메르라는 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 믿어주는 편이 내게는 편하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