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소년기(57) - #매에는 장사없다!
청년 카제르가 공터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샤베르티가와 홀로 맞서 싸우는 루나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도와야······.’
머릿속에서는 이곳에 숨어있을 게 아니라 루나를 도와 샤베르티가를 상대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으나, 정작 그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단순히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나섰다가 방해가 된다면······.’
청년 카제르는 루나를 마주했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자신과 두 동료가 덤비더라도 루나를 이기긴커녕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그 증거로 그 무시무시한 샤베르티가를 상대로도 루나는 버텨내고 있었으니까.
농담이 아니라 만약 자신들이 샤베르티가를 상대했더라면?
5분 아니, 그것도 길다.
그냥 10초도 안 돼서 전멸했을 게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캣시였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다.
옛말에 가장 무서운 것은 강한 무력을 지닌 적이 아니라 무능한 아군이라고 하였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과 동료가 나섬으로 말미암아 루나가 위험해진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루나는 물론, 그녀가 살리고자 했던 자신들마저 죽음으로 내몰린다.
이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대로는······.’
청년 카제르가 주먹을 쥐었다.
언뜻 샤베르티가를 상대로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았으나, 조금씩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비록 루나가 자신 있게 이길 수 있다고 말했고, 충분히 잘 상대하고 있을지언정 어디까지나 버티고 있을 뿐이지, 도저히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도와야 할지, 아니면 믿고 기다려야 할지 홀로 갈등하던 중이었다.
돌연 루나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반면에 샤베르티가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루나를 향해 쇄도했다.
금방이라도 샤베르티가의 주둥이에 가냘픈 목덜미가 물어뜯길 것만 같았다.
“위, 위험!”
결국 참지 못한 청년 카제르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돌연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가 싶더니, 청년 카제르의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저, 저저, 저, 저거!”
갑작스러운 변화를 느낀 것은 청년 카제르만이 아니었다.
함께 숨을 죽인 채 싸움을 지켜보던 동료가 외쳤다. 연신 말을 더듬어 제대로 된 의미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무언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청년 카제르가 허둥지둥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저주·····?”
청년 카제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달라. 저건 저주가 아니야.’
지금까지 청년 카제르는 저주로 인한 변신을 숱하게 겪어왔고, 저주로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들을 지켜봐왔다.
그렇기에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루나의 변화는 저주로 인한 강압적인 변신이 아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분위기였다.
보통 저주로 인해 변신을 할 경우에는 찐득한 살기가 맴돌았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의 귓속으로 들려오는 속삭임은 잠들어 있는 분노를 자극한다. 그리고 그 분노는 맹목적인 살의로 변하며 이성을 마비시킨다.
눈앞에 있는 것은 파괴하고 죽인다.
살의.
이 단 하나의 감정만이 온정신을 지배하기에 살기가 뿜어지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
루나는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바뀌었으나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건 살기가 아닌 위압감이었다.
‘저 모습은 대체······.’
두 번째로는 외형이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저주가 발동하면 오롯이 살의 하나만이 비스테르를 지배한다.
그것이 원인인지는 모르겠으나 본래의 비스테르가 지닌 특성은 사라지고 마수와 거의 흡사한 모습으로 변한다. 비스테르를 아는 자들은 이를 마수화라고 불렀다.
‘저건 마수화······가 아니야.’
루나 또한 마수처럼 전신에 털이 돋아났으며, 팔과 다리 또한 마수의 그것처럼 변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은 비스테의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루나의 변신은 자의라는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비스테르를 속박한 저주는 수백 년을 이어왔다.
그동안 숱한 비스테르가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했으며, 청년 카제르 또한 동분서주했다.
그래 봐야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저주를 풀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목걸이를 받았고, 자유를 잃었으며, 남의 명령에 따르는 일개 꼭두각시가 되었다.
세 비스테르의 놀람도 잠시였다.
크허어엉!
재차 들려온 포효에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루나가 샤베르티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윽고 샤베르티가와 루나가 맞부딪히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돌연 바람이 불더니 루나의 모습이 팟, 사라졌다.
당황한 그가 재빨리 눈동자를 굴렸다.
마침내 그의 시선에 들어온 루나는 샤베르티가의 머리 위에 있었다.
크릉?
샤베르티가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분명히 바로 앞에 먹잇감이 있었건만, 마치 바람처럼 자취를 감춰버리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빠악!
부지불식간이었다. 자신의 정수리를 기점으로 퍼져나가는 무지막지한 고통에 샤베르티가가 커다란 주둥이를 벌리더니 괴성을 질렀다.
커허어엉!
자신이 샤베르티가임을 알리는 특유의 포효가 아닌, 치미는 고통을 참지 못해 지르는 비명이었다.
샤베르티가에겐 불행하게도 루나의 반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퍼퍼퍼퍼퍼퍼퍽!
비 오는 날 먼지 나듯 맞는다는 게 이런 걸까.
아이넬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의 루나는 샤베르티가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 힘이 어찌나 빠르고 강했는지 샤베르티가는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이에 샤베르티가는 그 어떠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언제까지고 얻어맞는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못 배길 통증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죽했으면 샤베르티가의 눈에서는 굵은 물방울이 주르르륵, 흘러내렸다.
아주 잠깐 루나의 주먹이 멈춘 순간이었다.
샤베르티가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는 납작 엎드렸다.
깨앵!
더불어 덩치에 맞지 않는 깜찍한 소리를 내더니 아예 배를 뒤집어깠다.
명백한 항복선언이었다.
그제서야 루나가 움직임을 멈추며,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속도로 샤베르티가의 전신을 두들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다행이야.’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평온했지, 루나는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사실 루나는 자신이 변신할 수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건 야밤에 도리아를 따라다닐 무렵이었다.
당시 루나는 그녀를 몰래 따라다니며 그녀를 지켰다.
도리아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정작 루나는 수십 마리의 마수를 사냥했고 또 그만큼의 전투를 펼쳤다.
그것도 한시도 쉬지 않은 채였다.
제아무리 밤 사냥이 특기인 캣시라고 한들 단기간에 수십 차례의 전투를 이어나가면 지치기 마련.
지친 상태에서도 계속되는 전투에 루나는 조금씩 쌓이는 정신적인 피로가 쌓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변신을 하려고 했었다.
이를 깨달은 루나는 어떻게든 감정을 억눌렀고, 변신 도중에 멈출 수 있었다.
그때 느꼈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루나는 최대한 감정을 조절하며, 어떻게든 변신하지 않고자 주의를 기울였다.
물론 변신을 한다면 밤 사냥도 훨씬 수월해질 뿐만 아니라 산맥을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단지 변신을 했을 때 자신을 제어할 수 있을지, 나아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루나는 확신했다.
자신의 변신은 위험하지 않다.
더불어 이 힘이라면 아이넬에게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너, 또 덤빌 거야?”
루나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샤베르티가가 세차게 고개를 젓더니, 납작 엎드린 자세로 슬금슬금 기어 루나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착하게 있을 거야?”
컹!
확인차 묻자 역시나 샤베르티가가 순한 양처럼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루나가 대뜸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샤베르티가가 거대한 앞발을 척, 올렸다.
“앉아.”
척!
“돌아.”
휙!
그 모습이 큐우를 훈련시키는 아이넬과 똑 닮아있었다.
다소 뜬금없는 똥개훈련에도 샤베르티가는 군말 없이 따랐다.
하물며 주인을 만난 강아지라도 된 듯 꼬리까지 흔들었다.
잠시나마 샤베르티가의 재롱을 지켜보던 루나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컹!
“앞으로 누굴 괴롭히면 그때는 안 봐줄 거야.”
컹!
“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루나가 홱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자 얌전하게 엎드려 있던 샤베르티가가 재빨리 몸을 일으키더니 루나의 옆에 바짝 붙었다.
“왜? 가라니까?”
컹!
“같이 간다고?”
컹컹!
긍정이었다.
“안 돼. 아이넬이 싫어할 수도 있어.”
컹!
“아이넬이 누구냐고?”
컹!
잠시 말을 멈춘 루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장.”
평소 루나는 아이넬을 대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근데, 막상 아이넬을 설명하자니 대장보다 훌륭한 말은 없었다.
컹!
“내 대장인데, 너를 왜 싫어하냐고?”
컹!
“위험하니까. 대······아이넬은 위험한 걸 싫어해.”
아이넬이 싫어하는 위험의 기준은 자신이 아니었다.
애당초 루나가 보는 아이넬은 강자다.
록시나 루나 본인보다 강한 건 확실했다.
어쩌면 변신을 할지라도 이길 수 없는 게 아닐까, 라고 은연중 느끼고 있었다.
즉 그가 싫어하는 위험은 마을 사람들, 나아가 마을에 위협이 되는 걸 싫어하는 것이다.
컹!
샤베르티가가 재차 몸을 숙이더니, 유려한 앞구르기를 선보였다.
딱 봐도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려는 것 같았다.
고민하던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는 건 네 자유야. 대신 아이넬이 싫다고 하면 그 즉시 떠나. 이건 명령이야.”
컹!
어떻게 보면 허락이라고 보기 어려웠으나, 샤베르티가는 그조차도 기쁘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 * *
“아다만트라······.”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온 나는 얼마 전 헤파이토 씨에게 받은 망치를 쳐다봤다.
나는 이 망치를 손에 넣은 뒤로 몇 가지 실험을 하고 있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지금까지 내가 알아낸 건 이 망치가 내 마나를 흡수하는 걸 넘어 저장 기능까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원하면 다시금 마나를 회수하는 것도 가능했다.
어떻게 보면 마나 배터리에 회수 기능이 추가된 된 망치라고 보면 이해하기가 쉬웠다.
심지어 단단하기도 엄청났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진짜로 마나 배터리처럼 사용할 수 있다면······.”
나아가 만약 이 망치에 담긴 마나를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
안 그래도 나는 매일 꾸준하게 노력한 덕분에 어느 정도 마나를 컨트롤하는 게 가능하다.
이제는 마나 스냇치의 열매가 없이도 얼추 1시간은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아쉬운 건 딱 거기까지다.
“거기다 마법진이 익숙하기도 하고.”
매일 그리다 보니 이제는 간단한 마법진이라면 3분 만에 뚝딱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의 숙련도는 쌓인 것이다.
다만 마법진을 사용하다 보니 딱 하나 아쉬운 게 있었다.
“마나 배터리지.”
내 체질 때문에 결국 외부에서 마나를 빌려야하는데, 이걸 해결해준 게 마나 배터리다. 근데, 아주 기초적인 마법 하나를 발현시키는데도 마나 배터리를 사용해야하니 그 효율이 엄청나게 떨어질 수밖엔 없었다.
그리고 이 망치가 내 의도대로 움직여준다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마법진을 활용할 수 있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