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소년기(53) - #파메르의 신도
“네!”
내가 대답하자 헤파이토 씨가 불에 달군 주괴를 모루에 얹었다.
“굳이 나처럼 강하고 빠르게 내려칠 필요는 없네. 오히려 지나치게 힘을 줬다가는 내가 때려야 할 지점을 때리지 못하는 거야.”
“정확도가 중요하다는 말이죠?”
“맞네. 망치를 일개 도구가 아닌 자신의 손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거야.”
헤파이토 씨의 말을 들으니 유대감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망치와의 유대감이라는 게 다소 뜬구름 잡는 말처럼 보였으나 헤파이토 씨가 망치를 자신의 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설명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무엇보다.
내가 유대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 이유는 조금 전 있었던 현상 때문이었다.
나와 망치 사이에 선이 이어진 느낌 말이다.
유대감.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모루 앞에 섰다.
“후우.”
헤파이토 씨는 물론, 다른 듀로프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망치를 가볍게 쓸었다.
망치의 매끄러우면서도 차가운 감촉에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헤파이토 씨의 자세를 떠올리며 손잡이를 잡은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무지막지한 무게에 손목이 꺾이려는 걸 바로잡았다.
“갑니다!”
별 의미 없는 외침을 내뱉고는 그대로 망치를 내리쳤다.
그때였다.
돌연 내 머릿속에서 띵, 하는 이명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내 몸속에 잠들어 있던 마나가 급격하게 요동치더니, 그대로 망치에 빨려들어갔다.
대, 대체 뭐지?
당황한 마음에 다급하게 눈동자를 뒤룩 굴렸다.
내 옆에 선 헤파이토 씨가 보인다.
어쨰선지 그는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정정한다.
분명히 헤파이토 씨는 움직이고 있다. 그의 코에서 뿜어지는 바람이 느껴지고, 잔잔한 바람에 수염이 펄럭이는 게 보인다.
단지······.
그 모든 것이 지나치게 느리게 감각된다.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된 영상처럼, 혹은 연속으로 찍힌 사진을 촤르륵 넘기는 것처럼.
프레임 하나, 하나가 내 눈에 틀어박혔다.
마치 나 혼자 동떨어진 세상에 덩그러니 서 있는 감각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분명히 지금 내 팔은 휘둘러졌고, 망치는 모루에 놓인 주괴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기묘한 감각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마침내 망치가 주괴에 닿았다.
번쩍!
어마어마한 빛이 내 시야를 뒤덮었다.
꽈르르르릉!
이어서 내 전신을 강타한, 그야말로 바로 옆에서 벼락이 떨어진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부지불식간이지만 나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길었던 시간이 지났다.
멀어버린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내 앞에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있었다.
이윽고 하늘과 땅을 뒤덮었던 흙먼지가 바람에 날아갔다.
그런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헤파이토 씨였다. 그 또한 초유의 사태에 놀랐는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모루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두 듀로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올룸스 씨는 아예 바닥에 납작 엎드려 땅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고, 스테인 씨는 그런 그의 옆에 바짝 붙어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헤파이토 씨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없다.
분명히 앞에 있던 모루가 보이질 않는다.
하늘로 꺼졌나, 땅으로 숨었나 찾아보던 내 눈에 볼록, 튀어나온 흙더미가 보였다.
설마 이거······.
나는 허리를 숙여 흙더미를 치웠다.
아니나 다를까.
모루로 추정되는 검은 금속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루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방금 내 망치질에 아예 땅속으로 깊게 박혀 들어간 것이다.
저걸 내가 했다고?
나는 황당한 눈으로 망치와 모루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까 이 망치를 보고 묠니르랑 비슷하니 어쩌니 했었는데, 어쩐지 말이 씨가 된 것 같았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마침내 패닉에서 깨어난 헤파이토 씨가 내게 물었다.
솔직히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그냥 헤파이토 씨에게 배운 대로 망치를 휘둘렀을 뿐이다.
그리고 기묘한 현상이 들이닥쳤고, 눈앞에서 천둥을 동반한 벼락이 내리꽂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 상태였다.
그게 내가 두 눈으로 보고, 몸소 겪은 전부였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 나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으음······.”
헤파이토 씨는 내 말이 진심임을 알아차렸는지, 침음을 흘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헤파이토 씨는 노련한 대장인답게 금방 감정을 추스르며, 내 등을 강하게 두드렸다.
“역시 그대는 보통내기가 아니로군. 껄껄, 이거 아까 내가 했던 말은 다 잊어주게나.”
보아하니 아까 시범을 보이면서 했던 말이 민망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모루가 땅속으로 박힐 정도라니······.”
“저도 좀 당황스럽네요.”
“그러게 말이야. 그대는 함부로 망치를 휘두르면 안 되겠구만.”
동감이다.
만약에 내가 망치를 휘두르는 족족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제작을 떠나 초토화된 주변을 수습하는 데 더 큰 시간이 들어갈 터.
그마저도 내 망치질을 버틸 수 있는 모루가 있다는 전제하였다.
“아마도 이 망치가 원인인 것 같긴 해요.”
따지고 보면 나는 망치를 다뤄본 경험이 있다.
물론 이처럼 커다란 게 아니라, 그냥 못을 박을 때 사용하는 손 망치라고는 한들 엄연한 망치다.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걸 보면 이 망치.
정확하게는 이 망치를 만들 때 사용한 재료가 원인이리라.
애당초 내 마나를 빨아들인다는 것부터가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고.
“음, 그것도 그렇군. 드라고스의 눈은 단단하고 다루기가 어렵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알려진 게 없거든.”
“역시.”
그럼 이 망치가 원인이라는 건 확실하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잠깐 이것 좀 써봐도 될까요?”
“물론이네.”
나는 헤파이토 씨가 사용하는 망치를 쥐었다.
“자, 잠깐만 기다리게!”
내가 망치를 쥐자 헤파이토 씨가 부랴부랴 내게서 떨어졌다.
그 모습이 픽, 웃은 나는 가볍게 망치를 휘둘렀다.
카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파팟, 불꽃이 튀었다.
내 예상대로 아까와 비슷한 현상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망치라면 괜찮다는 거군.”
“네. 당분간은 다른 망치를 써야겠네요.”
솔직히 헤파이토 씨가 준 망치가 진짜 마음에 들긴 했지만, 당분간은 그냥 보관해두는 거로 해야겠다.
“자, 그럼 이어서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자, 다음으로는······.”
* * *
헤파이토 씨의 지도가 끝난 건 해가 중천에 뜰 무렵이었다.
일단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남은 수업은 다음에 받는 걸로 해야겠지.
“저는 잠깐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네요. 아, 이거 모루는······.”
“그건 그냥 둬도 된다네. 여분의 모루는 있으니까. 뭐, 여차하면 나중에 빼서 쓰겠네. 그러니, 걱정 말고 다녀오게나.”
“네! 그럼 오늘도 고생하세요!”
모두와 인사를 마치고 헤파이토 씨의 대장간을 뒤로했다.
내가 향한 곳은 회의장으로 쓰이는 회관에서 조금 떨어진 숲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풀을 헤치며 걷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일반적으로 걸치는 갈색이 아닌 새하얀 로브를 걸친 남자였다.
로브의 색깔 때문일까.
마치 성지순례를 떠난 수행자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 왔구나.”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 나도 금방 왔다.”
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자 큼지막한 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정체는 레비아 선생님이었다.
레비아 선생님은 후드가 갑갑했는지, 크게 심호흡했다.
그나저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걸 보니 적잖이 긴장하신 모양이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준비한 대로만 하시면 아무런 문제 없을 거예요.”
“그, 그래. 알았다.”
나는 레비아 선생님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이런 방법이 제일 자연스러울 것 같았거든요.”
내가 사과하자 레비아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잘 먹고 잘살았으면 하는 거지? 그리고 그 안에는 나와 데커드, 록시, 루나도 같이 있는 거고.”
“네.”
레비아 선생님의 말대로였다.
나는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비단 마을에서 사는 사람만이 아니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저의 행복이니까요.”
이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거면 됐다. 나는 아이넬, 네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아. 그러니, 나한테 미안할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다. 데커드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야.”
“고맙습니다.”
“고맙긴. 휴우, 그래도 이렇게 얘기를 하니 긴장이 좀 풀리는구나. 그나저나, 도리아 아주머니라는 분은······.”
말을 하던 레비아 선생님이 다급하게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근처에 다가오는 인기척 때문이었다.
드디어 오셨구나.
나는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윽고 숲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도리아 아주머니였다.
“아!”
그녀는 나와 레비아 선생님을 보고는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도리아라고 합니다.”
정중하면서도 떨림이 있는 인사에 레비아 선생님 또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나는 레이바라고 합니다. 그래, 저는 만나보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레비아 선생님의 말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잠깐 나를 쳐다봤다.
“네. 아이넬한테 들었습니다. 저, 파메르 님의 신도라고······.”
조심스러운 질문에 레비아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습니다. 파메르를 모시는 신도입니다.”
파메르라는 단어가 나오자 도리아 아주머니가 양손을 맞잡으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파, 파메르 님의 신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렇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그저 산맥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에 불과합니다.”
방금 전 걱정했던 모습은 엄살이었던 것인지, 레비아 선생님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 알겠습니다. 저, 다름이 아니라······.”
“말씀하시지요.”
“저희 마을에서는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예. 아이넬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네. 저희는 농사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도리아 아주머니가 주먹을 쥐었다.
“다짜고짜 이런 부탁을 드려 송구하지만, 저희에게는 파메르 님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파메르의 축복.
이게 포인트였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땅과 씨앗이다.
씨앗은 이미 있고, 밭 또한 개간하고 있으니 이 두 가지는 문제가 없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게 바로 물이다.
안타깝게도 마을 내에는 이렇다 할 수원지가 없다.
평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씻는 데 사용하는 물은 다 숲에서 길어온다.
즉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물의 양을 충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물을 끌어오자니, 그 또한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하다.
거기서 떠올린 게 있었다.
마법이었다.
굳이 물을 긷지 않더라도 마법만 있으면 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내가 마법을 쓰는 걸 아직 밝힐 순 없는 상황인지라 이걸 어떻게 해야 고민하던 나는 파메르를 써먹기로 했다.
그리고 파메르의 신도 역할을 맡아준 사람이 레비아 선생님이었고, 도리아 아주머니가 말한 축복이라는 건 마법임을 감추기 위한 위장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