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59화 (58/159)

59. 소년기(41) - #든든!

도리아 아주머니가 모호한 얼굴로 반문했다.

“네! 답은 농사래요!”

“정말로 그분······. 그러니까, 노인이 그렇게 말씀하셨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리아 아주머니가 침음을 흘렸다.

이에 옆에 있던 촌장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농사라는 건 우리가 직접 작물을 심는다는 걸 텐데······. 하지만 우리 마을에는 그걸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던가?”

보아하니 촌장님도 농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체 무얼 어디에 심으라는 걸까요?”

두 분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시는 걸 보면 당장 내 얘기에 의심은커녕 전적으로 믿는 듯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지나치게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두 분이 농사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아주 좋은 현상이었다.

“실은요.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보여주고 싶은 거?”

“네! 같이 가요!”

나는 도리아 아주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굳은살로 까슬까슬했다.

“가요!”

내가 손을 잡아끌자 도리아 아주머니가 어색한 자세로 날 따라왔다.

“촌장님도 같이요!”

“안 물어봤으면 섭섭할 뻔했어. 그래, 어서 가보자. 뭘 보여주려는 건지 궁금해서 못 견디겠구먼.”

이윽고 두 분을 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부지런히 걷던 중이었다.

“여, 여기는 조금 위험하지 않겠느냐?”

촌장님이 불안한 듯 물었다.

그도 그럴게, 우리 바로 앞에 결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이 앞으로 가면 위험할 수 있었으니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슬쩍 도리아 아주머니를 쳐다봤다.

그녀 또한 살짝 굳은 얼굴로 결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도리아 아주머니가 나와 시선을 맞췄다.

“이 너머에 있는 거니?”

도리아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구나.”

“어?”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도리아 아주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혼낼 거라고 생각했어?”

“헤헤, 솔직히 화내실 줄 알았어요.”

아무렴.

다 큰 성인도 아닌 내가 멋대로 결계를 넘어갔다. 어떻게 보면 마을의 규칙을 어긴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꾸중을 들어도 할 말은 없었다.

“사실은 나도 이미 결계를 넘어갔단다.”

“어, 진짜요?”

사실 아까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도리아 아주머니가 결계를 넘어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그래, 나도 규칙을 어겼으니까 아이넬을 혼낼 순 없지.”

반면에 도리아 아주머니는 이미 결계를 넘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내디뎠다.

“자, 자네!”

아무렇지도 않게 결계를 넘어가는 도리아 아주머니를 보던 촌장님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무서우면 돌아가도 좋아요.”

그러면서 작은 목소리로 “자네가 제일 중요하긴 개뿔.”이라고 중얼거렸다.

“누, 누가 무섭다고 그러오! 거기 딱 기다리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촌장님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이윽고 촌장님 또한 결계 너머에 발을 디뎠다.

“너, 넘어왔군. 내가 진짜로 결계를 넘었어.”

아직 반밖에 넘어가질 않았지만, 그마저도 촌장님에겐 굉장히 큰일인 듯했다.

“그렇게 뭉그적거릴 거면 그냥 돌아가세요!”

결국 참다못한 도리아 아주머니가 호통을 쳤다.

촌장님이 찔끔하더니 잽싸게 결계를 넘어갔다. 그마저도 겁이 났는지 재빨리 도리아 아주머니의 옆에 찰싹 붙었다.

“왜 이렇게 질척거려요? 아이넬도 있으니까, 어른답게 행동하세요!”

“끄응. 아, 알겠소이다!”

대답을 그럴싸했지만 정작 촌장님은 도리아 아주머니 옆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여간 당신도······.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거니?”

촌장님의 소위 쫄보 같은 모습에 고개를 흔든 도리아 아주머니가 내게 물었다.

“이쪽으로 가면 돼요!”

나는 당당하게 앞장섰다.

나 혼자서 갈 때는 길어봐야 20분 짧으면 10분 안에 도착할 거리였으나 촌장님 내외분을 안내하다 보니 얼추 1시간을 걸어서야 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밭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서 멈춰섰다.

“지금부터 조용하게 이동할게요.”

“응? 조용하게 이동한다고?”

“네. 놀랄 수도 있거든요.”

내 말에 두 분이 눈을 끔뻑거렸다.

“자, 그럼 저 먼저 갈게요. 조심조심 오세요.”

“그래, 알았다.”

나는 생선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살글살금 걸었다. 이에 두 분도 숨을 죽인 채 날 따라왔다.

이윽고 시야가 트이며 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물들은 무럭무럭을 넘어 소위 폭풍 성장을 한 덕분에 내 가슴께에 닿을 정도로 자랐다.

“아!”

도리아 아주머니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작물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도리아 아주머니를 보며 웃었다.

역시나 그녀 또한 저 작물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단박에 눈치챈 듯했다.

“저,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저게 정말······. 정말로 그 노인이······.”

나는 은근슬쩍 다음 밑밥을 깔았다.

“저기, 사실은요. 제가 꾼 꿈이 한 가지가 아니거든요.”

“응? 그럼······.”

“네. 그 노인이 답은 농사라고 했는데요. 그거 말고도 이것저것 알려주셨어요.”

“이것저것? 또 뭘 알려주셨니?”

도리아 아주머니가 퍼뜩 내게 물었다.

작전 1단계는 대성공이었다.

아무렴.

도리아 아주머니가 아무리 신실하다고 한들 내 꿈 이야기를 온전히 믿는다는 건 어려웠을 터.

하지만 눈앞에 떡 하니 증거가 있었으니 내 말이 진짜라는 걸 확신하는 것 같았다.

“실은요······. 저기 보세요.”

나는 밭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에도 풍성하게 작물들이 가득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작물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뭘 보라는······ 응?”

돌연 높게 자란 작물들이 크게 요동쳤다. 단순히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는 거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역동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나더니 밭에서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후아! 오늘도 삐쭉삐쭉 많이 했다! 록시보다 더 크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록시였다.

록시의 손에는 큼지막한 물뿌리개가 들려있었다.

이렇듯 록시는 매일 아침부터 밭을 찾아와 작물들을 돌보곤 했다.

“오늘도 밥 많이 줬다! 무럭무럭 자라야 된다!”

꼬리는 살랑살랑, 어깨는 들썩들썩.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던 록시가 기지개를 켰다.

“으응, 대장은 언제 온다?”

록시의 혼잣말에 냉큼 뛰쳐나갔다.

“지금!”

“우앗!”

록시가 화들짝 놀라더니, 금세 내가 우다다다, 달려왔다.

“대장이다!”

나는 그대로 내 가슴에 뺨을 부비는 록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도 밥 준 거야?”

“응! 록시가 밥 줬다! 무럭무럭 자란다!”

“착하네. 아, 오늘 록시한테 소개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소개?”

고개를 갸우뚱하는 록시를 뒤로하고 나는 숲에 숨어계신 두 분을 불렀다.

“나오셔도 돼요!”

“그, 그래.”

“커흠.”

이내 두 분이 쭈뼛쭈뼛 나와 록시에게로 다가왔다.

“인사해. 여기는 도리아 아주머니, 이쪽은······ 촌장님이셔.”

그러고 보니 나나, 마을 사람들은 항상 촌장님이라고만 불러서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촌장님도 자신의 호칭이 이름처럼 쓰이는 걸 아시는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도리아 아주머니. 촌장님?”

“응. 내가 사는 마을의 대장님이야.”

“아! 그럼 대장이 둘······.”

“셋.”

“응! 셋이다! 근데, 록시 대장은 대장이다!”

록시에게 있어서 대장은 나 하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상관없겠지.

어차피 록시야 비스테르였으니 마을의 관습에 따를 필요는 없거니와, 애당초 그런 것들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으니까.

멀뚱멀뚱 록시를 지켜보던 도리아 아주머니가 한 걸음 나섰다.

“아, 안녕?”

도리아 아주머니가 상기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아까의 대장부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은근한 열기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에 도리아 아주머니를 올려다보던 록시가 손을 내밀었다.

“으, 응?”

도리아 아주머니가 내민 록시의 손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건 악수라는 건데요. 음······. 일종의 인사법이에요. 서로의 손을 맞잡고 흔들면 돼요. 쉽게 말해서 앞으로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에요.”

“그, 그렇구나!”

내 말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록시의 손을 맞잡았다.

“나는 록시다!”

“나는 도리아라고 한단다. 응, 도리아 아주머니라고 부르면 돼.”

“도리아 아주머니! 반갑다!”

록시가 해맑게 웃더니 맞잡은 손을 휙휙 흔들었다.

역시 록시의 친화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커험, 나는 촌장이라고 한다네.”

“촌장이 이름? 이름 이상하다!”

“허헛!”

촌장님은 록시의 말에 사심이 없다는 걸 알고 계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보여주고 싶다는 게 이거였구나. 이것도 그 꿈에서 만난 분이 말씀하신 거니?”

“네. 노인이 모두 다 함께 잘 지내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라고요! 다 같이 잘 지내지 않으면 혼내신다고 하셨어요.”

나는 어린아이 특유의 풀죽은 표정을 지었다.

“그랬구나.”

도리아 아주머니가 미소를 짓고는 록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쩜 이렇게 얌전하고 귀여울까.”

늘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걸 지켜보는 입장인지라 얌전하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귀엽다는 것에는 백번 공감한다.

“정말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구려.”

촌장님이 멀거니 밭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정말 꿈같아요. 어떻게 이런······.”

끝끝내 감정이 복받치신 도리아 아주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확실한 것은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라는 것이다.

“아, 이럴 게 아니라 더 가까이서 보시는 건 어때요?”

“그래도 될까?”

“그럼요!”

내 대답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밭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베테랑 채집꾼답게 작물들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생기가 넘치는구나. 록시가 매일 관리를 한 거니?”

“응! 록시가 매일 밥 줬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건강하게 자랐나 보네.”

“응!”

도리아 아주머니의 칭찬에 록시가 헤실헤실 웃었다.

역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살짝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노라면 내가 아는 그 도리아 아주머니가 맞는지 모를 정도로 밝게 웃으셨다.

“아,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네!”

“다름이 아니라······. 혹시 아이넬의 꿈속에 나타났던 분 있잖니? 혹시 성함을 알고 있니?”

“이름이요?”

“응. 혹시 알고 있다면 꼭 듣고 싶구나.”

도리아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이름을 꼭 알고 싶으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워낙 경황이 없어서 이름은커녕 뭘 하는 분인지도 물어보질 못했었지.

이름이라.

나는 당시 만났던 노인을 떠올렸다.

음, 나를 환생시켜줬으니 저승사자라고 해야 할까. 근데, 막상 인상만 보면 도를 닦는 신선 같은 느낌이 들었단 말이지.

문득 노인과 마주했던 광활한 대지가 떠올랐다.

그때 보았던 황금빛 바다는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있다.

에이, 모르겠다.

“파메르.”

이곳에서는 풍요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파메르?”

“네. 파메르라고 하셨어요.”

“그렇구나. 파메르, 파메르······.”

도리아 아주머니는 결단코 잊지 않겠다는 듯 몇 번이고 이름을 반복해서 입에 담으셨다.

그런 도리아 아주머니를 뒤로한 나는 밭을 쳐다봤다.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고 해야 할까.

앞으로는 촌장님과 도리아 아주머니가 나의 조력자가 되어주실 테니,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며칠 후 나는 오랜만에 작업대에 앉았다.

“후우······.”

긴장감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에 손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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