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58화 (57/159)

58. 소년기(40) - #꿈을 꿨어요!

며칠 뒤, 나는 도리아 아주머니의 집을 찾아갔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워낙 바쁘게 돌아다니시는지라 지금이 아니면 만나기가 어려웠다.

이윽고 도리아 아주머니의 집에 도착한 나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당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어떻게 나한테 상의 한마디 없이 그럴 수 있단 말이오!”

걸걸하면서도 맥이 없는 듯한 목소리는 촌장님이었다. 평소보다 말투가 억센 게 엄청나게 화가 나신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확인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촌장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인자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촌장님이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건 처음 본다.

그런 촌장님의 앞에는 도리아 아주머니가 서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잠자코 촌장님의 이야기를 듣던 도리아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나는요, 우리 마을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목숨 따윈 아무래도 좋아요.”

도리아 아주머니 또한 감정이 복받친 듯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목숨이라는 단어까지 나오는 걸로 봐서는 상황이 꽤 심각해 보였다.

진짜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마따나 상황이 이래서는 선뜻 나서기가 곤란했다.

그나저나 본의 아닌 엿듣기가 되어버렸네.

무슨 일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조금 이따가 다시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그 야밤에 결계를 넘어가서야 되겠는가! 자네도 위험하다는 걸 알잖는가!”

나는 촌장님의 말에 걸음을 뚝 멈췄다.

도리아 아주머니가 결계를 넘어가셨다고?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우리가 결계 근처만 가도 호되게 꾸짖으시는 분이 바로 도리아 아주머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당신이 말했죠, 결계 너머는 위험하다고. 그럼 그 위험한 곳에 내가 아니면 누가 간단 말이에요?”

진짜로 넘어가신 게 맞구나.

대체 왜 넘어가신 거지?

별다른 내용이 아니라면야 돌아가겠지만, 결계가 언급되니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잠시 말을 멈춘 촌장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말일세. 마을도 중요하지만, 자네가 더 중요해. 제발 부탁이니 무리는 하지 말게나. 응?”

촌장님이 애원하듯 말했다.

상황은 제법 심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촌장님이 얼마나 도리아 아주머니를 생각하고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도리아 아주머니 또한 촌장님의 말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 제가 중요하듯, 저한테도 당신이 중요해요. 당신도 알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노력해서 이 마을을 일궜는지.”

“알다마다. 자네나 나나 정말로 고생이 많았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네.”

“나도 마찬가지예요. 이 마을은 우리의 모든 것이고,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우리가 나서서 지켜야지 않겠어요?”

도리아 아주머니가 흥분한 촌장님을 다독였다.

“그래도 너무 위험하니까 하는 말이잖소!”

잠시 말을 멈춘 촌장님이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오. 내가 너무 흥분한 것 같구려. 이 얘기는 조금 더 나중에 합시다. 그래서, 만족할 만한 것은 찾았소?”

촌장님의 질문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조금 이상했어요.”

“이상했다고?”

“사실은 당신한테 이야기할지 많이 고민했어요.”

“끄응.”

자신에게 숨기려고 했다는 말에 촌장님이 입맛을 다셨다.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여하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생겨서요.”

“그 얘기도 나중에 다시 합시다. 그건 그렇고 뭐가 이상했다는 거요?”

“소리가 들렸어요.”

“소리?”

“네. 무언가가 저를 향해 다가오는 소리요.”

도리아 아주머니는 당시가 떠올랐는지 어깨를 움츠리셨다.

아무렴.

숲은 대낮에 가도 컴컴하다. 그런 곳을 오밤중에 그것도 혼자 갔으니 겁이 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으리라.

“소리가 났다는 거요? 그럼, 그건 마수가 내는 소리 아니요?”

“저도 마수인 줄 알고 바로 숨었어요.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제 앞에 나타나는 건 없었어요. 대신······.”

“대신?”

“직접 보진 않아서 모르겠는데, 뭔가 싸우는 소리? 마수의 비명? 같은 게 들렸어요.”

싸우는 소리와 비명이라.

우리야 결계 덕분에 못 볼 뿐이지, 실상 숲에서는 늘 마수들의 다툼이 일어날 터이니 크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촌장님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눈을 끔뻑였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저를 지켜주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누군가가 지켜줬다고? 이보시오, 도리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소.”

촌장님의 말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저도 동감해요. 하지만 누군가가 절 지켜줬다는 건 확실해요.”

“허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내 머릿속을 스치는 사람이 있었다.

루나였다.

루나는 꾸준하게 사냥을 하며 내 생활에 큰 도움을 줬다.

며칠 전에도 루나는 사냥감을 잡아 왔다.

여기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평소라면 우리가 먹을 만큼만 잡건만, 그날만큼은 어마어마한 양의 마수를 사냥해왔다는 것이다.

내심 그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는데······.

공교롭게도 도리아 아주머니가 숲으로 향했던 시기와 일치했다.

이걸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단 말이지.

“당신도 아이넬 알죠?”

느닷없이 언급된 내 이름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음? 아이넬이라면 넬슨의 아들을 말하는 거요?”

“네. 아주 착하고 바른 아이예요. 그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마을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어요.”

“음, 나도 들어서는 알고 있소. 참으로 영특한 아이라지.”

이어지는 칭찬에 나는 괜스레 민망해졌다.

“그래서 그 아이가 뭘 했소?”

촌장님의 질문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말문을 열었다.

“채집을 하던 중에 아이넬이 다른 아이들이랑 놀아주는 걸 봤어요. 듣자 하니 줄 놀이라고 하더라고요. 기다란 끈을 나무에 엮어서 하는 놀이였는데, 어떻게 그런 걸 생각했는지, 참 똑똑하다니까요.”

기억난다.

나는 공기놀이를 알려준 후로도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놀이를 알려주곤 했다.

그중에서도 큰 재료가 필요 없되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는 고무줄놀이를 알려줬었다.

뭐, 고무줄이 아닌 가죽끈을 사용했지만 말이야.

더불어 고무줄놀이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노래다.

나는 모두가 쉽게 익힐 수 있는 멜로디에 개사한 가사를 붙여서 알려줬고,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금세 고무줄놀이에 푹 빠졌다.

요즘에도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곧잘 볼 수 있었다.

“호오, 그래서?”

“호호, 줄 놀이가 어려웠는지 르네가 계속 실수를 하더라고요. 르네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로 소질이 없긴 했어요. 르네도 자신이 없었는지 결국 포기하려고 했고요.”

당시가 생각났는지 도리아 아주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함께 놀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했어요. 르네는 절대로 못 하니까, 빨리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자고.”

“음.”

“그때 아이넬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했소?”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대요.”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으니까, 노력하면 반드시 가능하다고요. 당신은 어때요? 세상에 절대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참으로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질문이죠? 근데, 저는요. 아이넬의 말을 듣자마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답니다. 맞아요.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어요. 우리가 이렇게 마을을 가꾸고 살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그렇구려.”

“저한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어요.”

“소망?”

“네. 이 산맥에는 다른 종족들도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렇지.”

“우리에게는 멀고도 가까운 존재지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산맥에 터를 잡고 살아가요. 그러니까, 부디 모두가 화목하게 지냈으며 하는 바람이에요.”

“그, 그건······.”

무언가 말을 하려던 촌장님이 후후, 웃었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하였으니, 그것도 가능하겠구려.”

“그럼요! 가능하고말고요.”

도리아 아주머니의 확신 어린 말에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도리아 아주머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인간도 다른 종족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

그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었으며, 도리아 아주머니의 소망을 이루는 건 머나먼 일이 아니다.

확신한다.

도리아 아주머니와 촌장님이야말로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 안에 남아있던 일말의 불안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실례합니다!”

“아이넬?”

내 등장에 두 분이 깜짝 놀랐다. 하기야,

방금까지 내 얘기를 하고 계셨으니 놀랄 만도 하겠지.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밝게 인사했다.

“도리아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촌장님도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당황하던 도리아 아주머니가 신색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응, 그래. 그나저나 이곳에는 무슨 일이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나한테?”

“네.”

“그래, 무슨 일인지 얘기해줄래?”

“저번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저한테 물어보신 거 있잖아요.”

“내가 물어본 거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걸까?”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 이상한 꿈을 꿨어요.”

내 말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경악하더니 다급하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그게 무슨 뜻이니?”

도리아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미리 준비했던 대사를 떠올렸다.

사실 나는 도리아 아주머니께 농사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다만 내가 아무리 똑똑한 아이로 불린다고 한들 아직은 어린아이다.

물론 엄마나 아빠, 도리아 아주머니가 내 말을 무시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내심 걱정이 있었다.

거기서 떠올린 게 있었다.

바로 도리아 아주머니가 내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예전에 내가 엄마를 따라 채집하러 갔던 적이 있다.

당시 도리아 아주머니는 내게 이상한 게 보이지 않느냐, 혹시 누군가가 나오는 꿈을 꾸진 않았느냐, 등등.

다소 뜬금없는 것들을 물어보셨다.

그리고 도리아 아주머니가 말한 꿈이라는 건 일종의 계시 혹은 예언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도리아 아주머니야말로 마을에서 가장 신실한 사람이었으니까.

비록 꿈은 아닐지언정 실제로 노인을 만난 경험이 있었으니까, 거짓말도 아니거니와 소위 약빨이 가장 강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 그래서? 무슨 꿈을 꾼 거니?”

도리아 아주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 막 어떤 할아버지가 나타났는데요.”

“응. 그래서?”

“막 자세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데요. 그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어요.”

“뭐라고 하셨니?”

“답은 농사다!”

“답은······ 농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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