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소년기(38) - #씨앗이 이상하다!
동굴의 가장 안쪽에 도착하자 스테인 씨가 내게 주의를 줬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하게. 뜨겁거든.”
지금도 불가마 사우나에 온 것처럼 땀이 뻘뻘 흐르는데, 여기서 더 뜨거워진다니. 이러다가 나 익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별 시답잖은 상념을 하며 스테인 씨를 따라갔다. 또다시 나타난 커다란 구멍을 통과하자 후욱, 한층 뜨거운 바람이 내 뺨을 때렸다.
“어우!”
“후후, 뜨겁지? 그래도 녹진 않을 테니 걱정은 하지 말게.”
스테인 씨의 농담을 뒤로한 나는 시야를 가리는 후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런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닥에 쌓여 있는 철괴 뭉치였다.
크기가 제각각이긴 했으나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주괴와 그 형태가 비슷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금속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손님이 올 줄 알았으면 청소라도 해둘 걸 그랬군.”
“에이, 뭘요. 와, 그나저나 망치가 엄청 많네요.”
나는 벽에 기대어 있는 망치들을 가리켰다.
간단한 작업을 할 때 쓸 수 있는 손 망치는 기본이요.
내 상체만 한 머리가 달린 특대형 해머도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특대형 해머는 진짜 무거워 보이는 게 잡고 휘두를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그 외에도 그 크기나 생김새가 제각각인 망치가 수십 자루가 공방의 벽 한편을 채우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후드를 팔락팔락 흔들었다.
“그나저나 진짜 덥긴 덥네요.”
분명히 더워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치 더웠다.
“그거 말인가? 직접 보는 게 낫겠지. 이쪽으로 와보게나.”
스테인 씨가 공방의 한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내 스테인 씨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지만, 안에는 텅 비어있었다.
“저걸세.”
스테인 씨가 가리킨 곳을 확인했다.
“아!”
나는 바닥에 뚫린 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구멍은 뭐예요?”
“직접 확인해 보게나.”
나는 곧바로 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향했다.
구멍은 내 주먹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로 작았다.
“어우!”
어째선지 구멍에 가까워지자 열기가 한층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자세를 낮춰 구멍을 들여다봤다.
“어? 저, 저거!”
나는 구멍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마그마잖아!”
내가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마그마랑 똑같았다.
그럼 나 지금 마그마 위에 서 있는 건가?
“오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방금 우스갯소리로 불가마 어쩌고 했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하네. 이런 내 긴장과는 별개로 스테인 씨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저걸 마그마라고 부르는가?”
아, 나도 모르게 한국어가 나와버렸네. 내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스테인 씨가 말을 이었다.
“이곳이 왜 하티르인지 자네는 아는가?”
“드라고스의 심장이라는 뜻이죠?”
“맞네. 이곳은 드라고스의 심장이라고 부르네. 그리고 우리 듀로프는 자네가 마그마라고 했던 저것을 드라고스의 피라고 부르지.”
“아하!”
마그마와 드라고스의 피라.
전혀 관련이 없는 단어였음에도 잘 어울리네.
“어우, 여긴 진짜 살 떨리네요. 슬슬 도구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요?”
“좋지! 이야기하기에 좋은 곳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세.”
이내 스테인 씨를 따라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방독마스크부터 벗었다.
“후아!”
바람은 여전히 뜨끈뜨끈했지만, 바깥에 비해서는 깨끗했다.
내부는 아늑했으며 널찍한 테이블과 함께 큼지막한 나무통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냄새를 미루어 짐작했을 때 저 나무통에는 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듀로프가 술을 좋아한다더니, 아예 쌓아두고 마시는구나.
“응접실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그나마 여기가 제일 깨끗하지.”
스테인 씨가 멋쩍게 웃으며 테이블로 안내했다.
“뭘요. 아늑하고 좋은데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잠깐 기다리게 내 마실 거라도 가져오지.”
부랴부랴 벽으로 향한 스테인 씨가 나무통 하나를 통째로 들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렸다.
소리가 제법 묵직한 게 술이 가득 차 있는 모양이다.
“설마 그걸 전부 다 마실 생각은 아니죠?”
“음? 원래 1인 1통이 기본 아닌가?”
1인 1통이라니.
나는 아연실색했다.
살면서 1인 1닭은 들어봤고, 이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1인 1통은 또 처음 들어본다.
무엇보다.
“저는 아직 술을 안 마셔서요.”
“허? 그, 그게 무슨 소린가! 술은 안 마신다니!”
마음 같아서야 나도 마시고 싶긴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으니까.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나는 슬그머니 후드를 걷었다. 조금은 갑갑했던 시야가 트였다.
“저는 인간이거든요.”
스테인 씨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간이라니. 그래서 정체를 숨기고 다닌 거군.”
“네. 사실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요.”
“그랬군. 근데, 굳이 나한테 밝힌 이유는 뭔가?”
“그냥요. 앞으로 같이 작업을 할 텐데, 언제까지고 숨길 순 없잖아요. 그냥 믿음의 증표라고 생각해주세요.”
“믿음의 증표라. 하핫, 그거 마음에 드는군!”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스테인 씨가 술통을 탁탁, 치며 기뻐했다.
“그나저나, 술이 아니면 딱히 마실 게 없는데 말이야.”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이것 좀 보실래요?”
나는 가방을 열어 양피지 뭉치를 꺼냈다.
“음? 그건 뭔가?”
“설계도라는 건데요. 앞으로 스테인 씨랑 제가 만들 도구들을 그린 거예요.”
호미나 화로 같은 경우야 구조가 워낙 단순해서 그냥 즉석에서 만드는 게 가능하거니와 오차가 생기더라도 기능상에 문제가 발생하진 않는다.
반면에 이제부터 내가 만들어야 할 것들은 아니다.
아주 사소한 오차에도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지라 정교한 작업이 필요했다.
“설계도라. 그런 건 처음······ 아니, 이, 이건!”
테이블에 펼친 설계도를 본 스테인 씨가 눈을 부릅떴다. 하물며 술잔마저 내팽개치고는 허겁지겁 설계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이, 이건 자네가 직접 그런 건가?”
“네. 말로 설명하는 건 조금 복잡할 것 같아서요. 이렇게 보여주는 편이 스테인 씨한테도 편할 것 같은데, 어때요?”
내 말에 스테인 씨가 황망한 시선으로 나와 설계도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허어, 듀로프도 도구를 만들 때 그림을 그리곤 하네만 이렇게 정교한 그림은 처음 보는군! 호오, 그나저나 설계도만 봐서는 상자 같은데······ 대체 뭘 만들려는 건가?”
나는 씨익 웃었다.
“냉장고요!”
“냉장고라. 이름만 들어서는 모르겠군.”
냉장고야 지구의 문물이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사실 스테인 씨가 말했던 상자랑 비슷해요. 대신 다른 점이라면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 상자예요.”
“음식을 보관한다?”
“네. 상자 안을 시원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거든요. 지금 스테인 씨가 마시는 술도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거죠!”
“시, 시원한 술이라고?”
스테인 씨가 침을 꼴깍 삼켰다.
“자네가 하는 말은 이해했네만. 이 상자에 넣는다고 술이 시원해진다는 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마법진을 새길 예정이거든요. 아직 초심자지만, 냉장고에 새길 마법진 정도라면 어려운 건 아니에요.”
예전에 레비아 선생님은 내가 아티펙트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게 좋다고 하셨다.
나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진 않았기에 그동안 철저하게 숨겨왔다.
하지만 이런 내 심경이 크게 바뀐 계기가 있었다.
루나와의 대화였다.
내가 정체성을 두고 고민하고 있을 무렵, 나는 루나와의 대화를 통해서 나는 나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알게 모르게 나를 옥죄고 있던 사슬을 벗어던진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더불어 내가 환생했을 당시 만났던 노인은 내게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노인은 내게 물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나는 이에 이렇게 대답했다.
-복잡하고 남의 눈치를 보는 삶이 아닌, 넘치면 나눌 줄도 알고, 부족하면 채워줄 줄도 아는 삶을 살고 싶다고.
그 마음은 아직도 내 심장에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레비아 선생님은 엄연한 나의 스승이다. 모든 결정은 내가 할지언정 스승이자 선배의 의견을 한 번쯤은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런 내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레비아 선생님은 이런 내 생각과 의견을 존중한다며 흔쾌하게 동의하셨다.
“컥!”
마법이라는 말에 스테인 씨가 헛숨을 들이켰다.
“마마, 마법? 자, 자네 마법도 할 줄 아는 건가? 그, 그것도 마법진이라고? 그럼 지금 우리가 만드는 건······.”
오늘만 몇 번을 놀라는지, 저러다가 심장마비라도 오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아티펙트. 맞죠?”
“아티펙트라니. 으하하하핫! 아티펙트라니! 모든 듀로프의 꿈이 아닌가!”
스테인 씨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아티펙트라니! 으하하하핫! 아, 이거 미안하네. 아티펙트라는 말에 너무 흥분했어.”
“뭘요. 그리고 냉장고를 만드는 데 중요한 게 몇 가지 있거든요. 잠깐 설명할게요.”
“좋네!”
“네. 먼저 냉장고를 만들려면 여기 문을 만들어야 해요.”
“음. 뚜껑이 아니라 문을 만든다는 거군?”
“네. 그래서 여기 보시면 이걸 경첩이라고 하거든요. 이걸 이용해서 문을 만들면 돼요.”
“호오, 경첩이라. 이렇게 생긴 경첩은 처음 보는군. 음, 그나저나 이걸 고정할 방법은 있는가?”
“그게 제일 중요해요.”
사실 냉장고의 전체적인 형태를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특히 예전부터 철을 다뤄왔던 스테인 씨라면 금세 만들 수 있으리라.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고정하는 방법이다.
아무래도 재질이 금속인 만큼 못을 박아넣다가 찌그러질 우려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생각한 게 나사였다.
크기가 작은 데다가 꼼꼼함이 필요해서 어떻게 보면 이게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다.
“이건 나사못이라는 건데요. 이 위에 파인 홈에 드라이버라는 걸 끼워서 돌리면 안으로 파고들어요. 그렇게 고정이 되는 거거든요?”
“호오.”
그 후로도 스테인 씨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줬다.
* *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내가 스테인 씨의 공방에서 나왔을 땐 어느덧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원래는 더 일찍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스테인 씨의 열정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의욕이 없는 것보다는 적극적인 쪽이 훨씬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겠지.
“오늘도 고생했어.”
꾸룩!
나는 로토에게 간식을 물려주고는 곧바로 데커드 할아버지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내가 막 오두막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대장, 대장!”
저 멀리서 록시가 달려왔다.
“아, 록시! 오늘도 착하게 있었······ 응?”
어쩐지 록시의 표정이 엄청나게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금세 내 앞에 도착한 록시가 헥헥,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대장! 큰일 났다! 큰일 났다!”
“큰일?”
“씨앗이 이상하다!”
“응? 씨앗이 이상하다고?”
씨앗이 이상하다는 건 또 무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