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54화 (53/159)

54. 소년기(36) - #답은 농사다!

“대장, 대장! 그건 뭐야?”

록시가 물었다.

“이거?”

나는 손에 들린 씨앗을 보여줬다.

“이건 뮐알이라는 거야.”

내가 장터에 갔을 때 젠트리 씨가 물물교환으로 제시한 물건이었다.

“뮐알? 그거로 뭐 하는 거야?”

재차 던져진 질문에 나는 뮐알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럼, 그럼. 그 뮐알이 크면, 대장이 기뻐?”

나는 록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기쁘지!”

“그럼 록시도 뮐알 키운다! 대장이 기쁘면 록시도 기쁘다!”

록시는 얼마 전 내게 선물을 준 이후로 졸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레비아 선생님께 듣자 하니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나. 실제로도 록시는 늘 날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그 모습이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간 해바라기반 어린이 같았다.

이렇다 할 도움은커녕 록시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바빴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한테 도움이 되고 말고를 떠나서 날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마음이 너무 기특했다.

“록시는 대장이랑 같이하는 게 좋다! 행복하다!”

“행복하다는 말도 배웠어?”

“응! 레비아 선생님이 알려줬다!”

나 말고도 레비아 선생님이랑 데커드 할아버지한테도 이것저것 물어보더라니 어휘력이 제법 늘어났네.

역시 레비아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 유치원 선생님을 잘할 것 같다고 느꼈는데, 내 눈은 정확했다.

“우리, 록시 똑똑하네!”

“헤헤. 록시 열심히 한······해서, 대장 행복하게 해 줄 거다!”

지금도 매우 행복한데, 아주 그냥 행복에 겨워 죽일 속셈이구나.

비단 록시만 이러는 게 아니라 루나도 비슷했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지만, 곧잘 숲을 돌아다니며 꾸준하게 사냥감을 짊어지고 와서 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참 신통방통하단 말이지.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도 마을 사냥꾼들의 실업은 끝나지 않았다. 아빠는 요 근래에 곧잘 사냥꾼 회의에 참석하곤 했는데, 아직 마땅한 대책은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듣자 하니 사냥을 개시하자는 쪽과 조금 더 동태를 지켜보자는 파로 나뉜다던가.

촌장 대리 겸 회의의 참석자인 도리아 아주머니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견해였다.

다만 사냥꾼을 대표하는 사람인 크로든 아저씨는 당장이라도 사냥을 개시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단다.

아빠는 도리아 아주머니와 비슷한 의견인 것 같았다.

이렇듯 양쪽으로 의견이 나눠졌으나 사실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다.

식량이다.

나아가 보다 안정적이면서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비축분도 필요했다.

이에 대한 대책이라면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숲에서 벌어지는 다툼이 진정되고 다시 사냥을 재개하는 것.

비단 사냥만이 아니다.

요즘 엄마가 채집을 나서는 주기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그 말인 즉 사냥만이 아니라 채집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더불어 이 지금 이 상황이 지속될 경우에는 마을의 생계에도 큰 위협이 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숲이 진정되는 건 우리의 소관을 넘어섰다고 해야 할까.

애당초 숲이 어지러워지게 된 건 종족들의 영역 다툼이 주된 원인이다.

안 그래도 화가 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대뜸, “우리가 지금 먹을 게 없어서 그러니 이 싸움을 멈춰주세요.”라고 부탁한들 콧방귀나 뀔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또 다른 표적이 될 우려가 높았다.

뭐, 애당초 꽁꽁 숨어 있는 그들을 찾아내기도 어렵겠지만 말이야.

고로 첫 번째 방법은 패스였다.

다른 하나는 굳이 숲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답은 농사지."

이에 대한 해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해도 무방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진작부터 농사를 염두에 두고 있긴 했다.

내가 지금 뮐알을 살펴보고 있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고.

“농사? 대장, 대장. 농사가 뭐야?”

“농사라는 건 말이야. 우리가 먹을 걸 직접 키우는 거야.”

“먹을 걸 직접 키운다?”

“응.”

“록시도 키운다! 대장이랑 같이 농사한다!”

“록시가 도와주는 거야?”

“응!”

“기쁘네.”

“헤헤. 대장 기쁘면 록시도 기쁘다!”

단지 무엇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가 난제였다.

“뮐알이라면 훌륭하지.”

뿐만 아니다.

저번에 장터를 방문했을 때 나는 또 다른 씨앗과 열매들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단 열매는 나무라서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으니 논외로 두고. 거기다 아직 내가 뭔지 모르는 씨앗들도 제외했다.

그렇게 활용도가 높되 모두가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것만 따로 추려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니까 패스다.

“이제 남은 건 이것들을 어떻게 키우느냐인데······.”

나야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만큼 농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있었다.

혼자 사는 게 적적해서 이것저것 키우기도 했고.

실제로도 나는 가정에서 간단하게 기를 수 있는 화초 내지 비교적 난이도가 쉬운 작물인 토마토나 상추 정도만 키워봤다.

그마저도 우리 집 앞에는 늘 트럭에 꽃을 싣고 다니며 파는 아저씨의 조언이 아니었더라면 다 말라 죽었으리라.

씨앗이 많은 것도 아니거니와.

이곳에서 자라는 작물은 그 형태와 맛이 비슷해도 엄연히 지구의 것과 다르다.

즉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활용하되 이곳에서 맞는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터로 향했다.

“위치는 이쯤이면 되겠지.”

그리 넓진 않았지만 비교적 볕이 잘 들어서 식물이 자라기에는 제법 조건이 괜찮았다.

나는 짊어진 지게를 근처에 세우고 그 위에 얹어놨던 도구를 챙겼다.

“이것도 진짜 오랜만이네.”

나는 손에 들려있는 삽을 보면서 픽 웃었다.

삽질은 군대에 있을 때나 하던 거였는데 말이야.

어느 날은 테니스장을 만들라는 대대장의 지시에 장장 6개월 동안 삽질을 해야만 했지.

아니, 삽질도 삽질이지만 땅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시멘트를 가득 채운 드럼통을 굴릴 땐 진짜 죽는 줄 알았지.

하루가 멀다 하고 작업만 해대던 시절이 떠오르자 감회가 새롭다.

더불어 그때 했던 그 작업을 여기서, 그것도 내가 자처해서 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참 묘했다.

테니스장을 만든 뒤로 라켓 한 번 잡아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자랄 작물들은 내 피와 살이 될 녀석들이니까.

“록시도! 록시도!”

“록시도 할래?”

“응!”

삽질을 하겠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삽질이야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 알려줘도 괜찮겠지.

“대신, 다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돼. 알았지?”

“응! 조심한다!”

“자, 그럼 여기를 이렇게 잡고······.”

나는 록시에게 삽을 잡는 방법부터 시작해 땅을 어떻게 파야 하는지 알려줬다.

“이렇게?”

록시가 삽을 들어 강하게 내리찍었다.

푸욱!

비스테르답게 기본 근력이 강한 덕분인지 삽은 손쉽게 땅을 파고들었다.

“그렇지. 거기서 여기 삽의 머리를 발로 꾹꾹 밟아주는 거야.”

“응응!”

“좋아. 거기서 살짝 무릎을 굽혀주면서 부드럽게 삽을 밀어 올려. 조금 힘들면 한손으로 손잡이 머리를 밀어주면······. 그렇지!”

록시는 내 지시를 착실히 들으며 삽을 움직였다. 이내 땅에는 큼지막한 구덩이가 파였다. 씨앗을 심기에는 다소 깊고 넓었지만 록시의 첫 삽이라는데 의의를 준다면 아주 훌륭했다.

“잘했어.”

“헤헤! 록시 잘했어?”

“응. 아주 타고난······.:

아니, 삽질을 타고난다고 해서 좋을 건 없을라나.

”아무튼, 록시만 있으면 쉽게 끝낼 수 있겠네.”

“록시 열심히 한다! 대장 도와서 농사 할 거다!”

“자, 나도 시작해볼까.”

오랜만에 하는 삽질에 팔까지 걷어붙인 나는 록시와 함께 땅 다지기 작업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금방 끝났네.”

본격적이라고는 했지만 막상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대대적으로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록시가 열심히 도와준 덕분이었다.

“록시, 고생했어. 덕분에 훨씬 빨리 끝났네.”

“헤헤, 대장도 고생했다!”

“자, 그럼 심어볼까. 일단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이걸 심고······.”

행여나 같이 뿌렸다가는 성장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는지라, 나는 여유롭게 구역을 나눴다.

“자, 이제는 씨앗을 심을 차례야. 자, 잘 봐. 손가락으로 땅에 구멍을 만들 거야.”

내 설명을 들은 록시가 허리를 숙이더니 땅에 구멍을 냈다.

“으응······.”

록시가 자신이 판 구멍과 내가 판 구멍을 비교하더니 이내 슬쩍 나를 올려다봤다.

마치 시험지 채점을 지켜보는 듯한 얼굴이 귀여워서 무심코 웃어버렸다.

“그 정도면 괜찮아. 자, 이제는 이 씨앗을 이렇게 넣고, 그 위에 흙으로 살살 덮어주면 돼.”

“이렇게?”

록시가 서툴게나마 씨앗을 심었다.

“그렇지! 이제 마지막으로 물만 주면 되겠네.”

나는 미리 만들어둔 물뿌리개에 물을 가득 채웠다.

아직은 시험 단계라서 이렇게 직접 물을 뿌리지만, 나중에는 자동으로 물을 줄 수 있는 장치라도 만들어야겠네.

“대장, 대장! 그건 뭐야?”

“아, 이건 물뿌리개라는 거야. 음······. 그렇지, 우리가 방금 여기에 씨앗을 심었지?”

“응!”

“씨앗은 물을 먹고 살아. 그러니까, 우리는 이 씨앗한테 물을 줄 거야.”

사실 물만 준다고 씨앗이 자라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넘어가도 되겠지.

나는 우리가 심은 씨앗에 듬뿍 물을 부었다.

“헤헤, 록시 농사했다! 대장이랑 같이 했다!”

록시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기뻐했다.

“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봐.”

“응!”

나는 록시를 두고 호수에 있는 작업대에서 나무판자를 챙겨왔다.

“그건 뭐야?”

“이거? 이름표.”

“이름표?”

록시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붓과 염료를 꺼냈다.

나는 곧잘 주변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다듬어주곤 했다.

예전에는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붓을 만들었다는 게 떠올라서 이참에 만들어봤는데, 그 모양새는 투박했지만 제법 쓸만했다.

나는 붓에 염료를 묻혀 나무판자에 글씨를 새겼다. 후후, 불어 염료를 말린 나는 땅 위에 나무판자를 고정시켰다.

“록시 글씨 모른다! 대장, 대장, 뭐야?”

“록시.”

“록시?”

“응. 이게 록시의 이름이야.”

“내 이름!”

록시가 나무판자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역시나 꼬리가 팔락팔락 흔들리는 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이제 록시가 심은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랄 일만 남았네.”

“무럭무럭?”

“응.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이제 이 씨앗이 다 크면 맛있는 걸 해먹을 수 있어.”

다른 건 몰라도 뮐 하나만으로도 만들 수 있는 요리의 가짓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물론 이제 막 씨앗을 심었거니와 이것들이 제대로 자란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 씨앗들이 자라서 우리의 먹거리가 되리라는 기대감이야말로 내일 뜨는 해를 더더욱 찬란하게 만들어주는 법이니까.

“맛있는 거! 록시 대장이 만드는 거 좋아한다! 제일 맛있다!”

“그래? 안 그래도 새로운 요리를 하나 만들려고 했는데.”

“새로운 요리!”

“응. 록시가 좋아하는 간식.”

“록시 배고프다!”

“자, 그럼 얼른 가서 루나랑 같이 먹자.”

나는 록시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데커드 할아버지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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