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소년기(33) - #장인은 장인을 알아보는 법!
“네, 그거 제가 만든 거 맞는데요?”
“진짜로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내가 순순히 긍정하자 듀로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사실 인정하고 말 것도 없이 이세계에서 가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롯이 나 하나다. 듀로프 입장에서는 이를 모르니까, 깔끔하게 확인시켜주는 게 편하겠지.
“거기 손잡이 안쪽에 보면 이렇게 생긴 그림이 그려져 있을 걸요.”
아이넬표 핸드메이드라는 걸 증명하는 일종의 낙관을 보여주자 듀로프가 서둘러 가위를 살펴봤다.
“지, 진짜로군.”
마침내 내 낙관을 확인한 듀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나저나 듀로프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으니 잘된 일이긴 했는데, 막상 듀로프의 표정을 보아하니 꽤나 심각한 일인 것 같아 순수하게 기뻐할 순 없었다.
심각한 얼굴로 가위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듀로프가 대뜸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어어?”
난데없는 사태에 당황한 나는 서둘러 듀로프를 말렸다.
하지만 이런 내 만류에도 듀로프는 꿋꿋하게 무릎을 꿇으려 했다.
우람한 근육에 툭툭, 힘줄이 불거져 나온다.
그것도 잠시였다.
“무, 무슨 힘이 이렇게······.”
듀로프가 당황하며 퍼뜩 내 얼굴을 쳐다봤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무슨 일인지 얘기부터 좀 하자고요.”
“······미, 미안하게 됐군.”
결국 힘으로는 날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듀로프가 몸을 일으켰다.
그를 붙잡았던 팔을 거두려는 찰나, 듀로프가 재차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아예 작정을 했는지 아예 양쪽 무릎이 공중에 떴다.
아니, 이 사람이 무릎 못 꿇어서 죽은 귀신한테 홀렸나. 왜 이렇게 무릎을 꿇으려고 그래?
“자꾸 그러시면 저 그냥 갑니다.”
엉겁결에 차력 쇼에 동참하게 된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듀로프가 허둥지둥 몸을 바로 세웠다.
“아, 알았네! 미안하네, 진짜로 그만두겠네! 이상하군, 젠트리가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젠트리 씨라면 나와 물물교환했던 오르크였다. 이제 보니 젠트리 씨와 아는 사이였구나.
유유상종이라는 말마따나, 두 사람의 신체구조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젠트리 씨가 이렇게 하라고 시켰다고요?”
비록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지만 굉장히 정중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했지, 이렇듯 남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말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원하는 게 있으면 먼저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을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던데.”
듀로프의 말에 난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나, 듀로프는 젠트리 씨의 말을 오해한 것 같았다.
“그게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닐 걸요.”
“어, 엉? 그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듀로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레비아 선생님이 이르길, 듀로프는 머리 쓰는 걸 싫어하는 종족이라고 표현하셨지.
나는 그냥 농담으로 던진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듀로프를 보고 있자니 진짜로 단순한 종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자존심도 굽혀야 한다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걸 돌려서 말씀하신 거죠.”
“마, 마음가짐?”
듀로프가 내 말을 곱씹었다.
나름 쉽게 설명했음에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뭐, 당장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저는 아이넬이라고 합니다.”
“아! 실례했군! 나는 스테인이다. 보다시피 듀로프지. 헌데 그쪽은······.”
종족을 묻는 스테인 씨를 보며 후드를 톡톡 건드렸다.
장터에서 얼굴을 가린다는 건 곧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다.
방금 전 내 몸짓은 종족을 밝힐 수 없다는, 무언의 제스처이자 장터에서 통용되는 암묵적 약속이었다.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부탁이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테인 씨가 울상을 지었다.
“시, 실은 말이야······.”
* * *
드라고스의 산맥의 중심부에는 하티르라 일컫는 지역이 있다. 드라고스의 심장에 위치했으며, 회색빛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이런 하티르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종족이 살아가고 있었다.
듀로프였다.
듀로프의 터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 어느 광산 깊숙한 곳이었다.
바지만 입은 채 우락부락한 근육을 과시하는 듀로프가 열심히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스테인으로 올해 성년식을 마친 청년 듀로프였다.
까앙! 까앙!
뜨겁게 달궈진 쇳덩이가 불꽃을 튀기며 그 모습이 변해간다.
한 차례의 휴식도 없이, 오롯이 쇳덩이만 두드리기를 3시간여. 마침내 스테인의 망치질이 멈췄다.
“······후.”
무감정한 눈으로 완성품을 보던 스테인이 쇳덩이를 집더니 휙, 광산의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웅덩이에 던져넣었다.
무려 3시간에 걸쳐 만들었음에도 흡사 팔에 들러붙은 벌레를 털어내는 듯했다.
치이이이이이이!
뜨거운 수증기와 함께 한껏 달궈졌던 쇳덩이의 열이 식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테인은 멀거니 용광로를 쳐다봤다.
“······.”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이 그의 눈에 아른거렸다. 용광로를 노려보던 스테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이건 아니라고!”
고성을 토해낸 스테인이 손에 낀 장갑을 벗어던져지더니, 그대로 광산을 뛰쳐나갔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하티르에서도 조금 떨어진 숲이었다.
“이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고.”
스테인은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걸으면서도 연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윽고 스테인이 걸음을 멈춘 곳은 널따란 공터였다.
‘오늘도 있군.’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터에 앉아있는 자신의 친구를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젠트리였다. 종족은 오르크였다.
스테인과 젠트리.
듀로프와 오르크.
그 어느 하나 공통된 분모도, 접점도 없을 것 같은 종족이지만 스테인과 젠트리는 서로를 친구로 여겼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반갑게 인사하려던 스테인이 뚝, 걸음을 멈췄다.
젠트리의 앞에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듀로프에게 있어서 제작이란 곧 숙명이자 삶이다.
스테인 또한 듀로프인지라, 생전 처음 보는 물건에 흥미가 동했다. 마치 선녀의 옷을 훔치려는 나무꾼처럼 냉큼 나무로 몸을 숨긴 스테인이 물건을 주시했다.
‘밑에는 불을 피울 수 있는 도구고, 그 위에는······ 돌을 깎아서 만든 판인가?’
역시나 평생을 제작에 힘써온 듀로프 답게 그 용도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젠트리가 불판에 손을 가져다댔다.
“췩, 온도는 이 정도면 적당하겠군.”
흡족하게 웃은 젠트리가 옆에 있는 고기를 집더니 조심스레 불판 위에 올렸다.
치이이이익!
맛깔스러운 소리와 함께 스테인의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꿀꺽!
언뜻 쇳덩이를 식힐 때와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식욕을 자극시키는 소리에 자꾸만 침이 넘어갔다.
‘음!’
들썩들썩.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젠트리를 주시했다.
이런 스테인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젠트리가 촉촉한 눈으로 불판 위를 응시했다.
그 모습은 고독함을 즐기는 미식가와도 같았다. 더불어 그 눈빛이 어찌나 진지했는지, 지켜보는 스테인이 다 긴장할 정도였다.
“췩, 지금이로군!”
젠트리가 재빨리 고기를 집었다.
고기의 육즙과 기름이 비산하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정작 스테인을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저, 저건?’
젠트리의 손에 들려 있는 도구였다.
‘대, 대체 저게 뭐지?’
고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화로와 불판이야 지금의 스테인도 충분히 만들 자신이 있었다.
애당초 평소 쓰는 화로를 작게 축소시킨 모양이거니와 구조가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젠트리의 손에 들린 물건은 아니었다. 마치 얇은 나이프 두 자루를 겹쳐놓은 것 같은 생김새였다.
나아가 그 사이로 고기를 넣어 싹둑싹둑 자르는 게 몹시도 편리해보였다.
‘젠장! 궁금해서 못 참겠군!”
결국 스테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젠트리에게로 향했다.
“자네!”
“음? 췩, 이게 누구야! 스테인 아닌가! 췩, 한동안 안 보이기에 용광로에 빠졌나, 했지. 췩.”
젠트리가 반갑게 맞이했다.
“흥, 재수없는 소리는 그만 두라고! 아니, 그보다 대체 그게 뭐야?”
“아, 췩, 이거 말인가?”
젠트리가 여 보란 듯 도구를 들더니 숭텅숭텅 고기를 잘랐다.
그 모습에 스테인이 재차 놀랐다. 스테인도 육식을 즐기는 편이다.
게다가 친구인 젠트리 덕분에 다양한 진미들을 맛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따로 나이프와 포크를 챙겨다닐 정도였다.
듀로프 중에서는 미식가에 속하는 스테인조차 저런 획기적인 도구를 본 적은 없었다.
“췩, 가위와 집게라는 걸세.”
“가위, 집게?”
스테인이 멍한 얼굴로 가위와 집게를 쳐다봤다.
“후후후. 췩, 그러고 보니 자네가 말했던 게 이런 거였지. 췩.”
스테인은 듀로프로 태어나 평생을 망치와 함께 살았다. 그는 자신의 일에 자긍심이 있었다.
비록 일은 힘들고 고되지만,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볼 때면 늘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 스테인의 의지를 꺾는 것이 있었다.
타성이라고 해야 할까.
듀로프는 대대로 병장기를 만들었다. 검이면 검, 창이면 창, 도끼면 도끼.
듀로프에게 있어서 못 만드는 무구는 없었으며, 다루지 못하는 광석이 없었다.
이렇듯 한 분야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시대가 바뀌었다.’
과거. 그러니까, 스테인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는 이러한 무구가 중요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 지금은 듀로프가 만든 무구를 찾는 이는 드물었다.
그마저도 대륙에 암운이 덮쳤던 날 이후로 많은 기술들이 소실되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비록 기술이 소실되었다고 한들, 듀로프의 손이 닿으면 금세 명품으로 변했다.
‘그래봐야 쓰이질 않는데, 무슨 소용인가!’
과거는 과거다.
영광은 영원하지 않으며, 작금에는 듀로프의 과거를 기억하는 이조차 없다.
하물며 듀로프라면 모두 갖고 있는 소위 장인정신 때문에 아무에게나 무구를 제공하지 않는다.
명검이라 불릴 역작을 제작한들, 정작 사용하질 않으니 창고에 처박힌 채 먼지만 쌓여갈 뿐이다.
‘쓰이지 않는 도구는 죽은 도구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다른 듀로프들이 들었으면 대번에 경을 칠 발언이었지만, 이마저도 순화한 표현이었다.
반면에 젠트리가 사용하는 도구는 어떠한가.
‘대단하다.’
이 말밖엔 나오지 않는다.
물론 재료가 마수의 뼈였고, 그 만듦새가 완벽하진 않았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이프를 교차시킨 듯, 그 구조 또한 단순해 보인다.
집게도 마찬가지다. 탄력이 좋은 나무에 마수의 뼈를 끼워 넣었을 뿐, 복잡한 건 없었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시각에서의 이야기지. 스테인은 두 도구가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췩, 맛이 좋군!”
이런 스테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젠트리는 고기를 음미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자네, 그걸 만든 자를 아는가?”
“췩, 아이넬일세.”
“아이넬! 나, 나도 그자를 만나보고 싶네만. 어디로 가면 되는 건가?”
“췩,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네. 단, 조건이 있어.”
“조건? 무, 뭔가? 술을 원한다면 주겠네. 나이프를 원하나? 저번에 네가 갖고 싶다고 했던······.”
스테인의 다급함에 젠트리가 손을 들었다.
“췩, 그런 게 아니네. 아이넬. 그 친구는 내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네.”
“새로운······세계?”
“그렇다네. 췩, 나는 적어도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물론 췩, 스테인 자네도 내 오랜 친구야. 그래서네. 췩, 원하는 게 있으면 먼저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을 용기가 필요한 법일세. 내 말을 이해하겠나.”
이에 스테인이 잠시 고민하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내 그렇게 하지.”
“췩, 이해해줘서 고맙군. 아이넬을 만나고 싶다면 췩, 장터로 가보게.”
“장터!”
“아, 그리고 췩, 이건 내가 아이넬한테 받은 여분의 가위네. 혹시 모르니 췩, 이걸 들고 가게나.”
“고, 고맙네!”
“췩, 고맙긴. 모쪼록 자네의 고민이 해결됐으면 좋겠군.”
* * *
“이렇게 된 거야.”
스테인 씨가 길고 길었던 이야기에 방점을 찍었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스테인 씨는 이른바 매너리즘에 빠진 모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