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소년기(20) - #여기가 장터!?
진짜로 재미는 있었다. 근데, 그것도 처음. 딱 처음 비행 5분까지였지, 그 이상은 도저히 못 버티겠더라.
대체 어떻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는 건지, 로토는 몸집에 비해서 어마무시하게 빨랐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빨랐던 건 KTX였는데, 로토에 비해서는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레비아 선생님의 마법 덕분에 이렇다 할 불편함은 없었지만, 극심한 멀미까지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덕분에 줄곧 로토의 깃털에 얼굴을 처박고 있어야만 했다.
“뭐, 아직 여유야 있으니 조금 쉬다 갈래?”
나는 레비아 선생님이 건넨 물로 목을 축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푸하, 고맙습니다! 이제 괜찮아요! 빨리 가요!”
“아, 그 전에 이것부터 걸쳐라.”
레비아 선생님이 내게 반듯하게 접힌 가죽을 건넸다.
뭔가 싶어 펼쳐 보니, 다름 아닌 옷이었다.
그것도 얼굴을 비롯하여 전신을 가릴 수 있게끔 만들어진 로브였다.
“가능하면 종족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아무래도 인간임을 숨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내심 얼굴이라도 가릴까 싶었는데.
레비아 선생님은 따로 준비를 하셨구나.
“네!”
나는 주섬주섬 로브를 걸쳤다. 길이가 살짝 짧았다.
“내 동생이 쓰던 거라서 조금 짧긴 하네.”
“그래도 이 정도면 제가 인간이라는 걸 들키진 않을 것 같아요.”
“그럼 됐다. 답답하더라도 오늘은 그걸 걸치고 다녀라.”
장터에 갈 수 있다는데 까짓 답답한 게 대수일까.
레비아 선생님 또한 커다란 로브를 걸쳤다.
이로써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고마워, 이따 보자!”
나는 이곳까지 태워준 것도 모자라 손수 짐까지 운반해준 로토의 뺨을 쓰다듬었다.
꾸우꾸우!
로토가 내 손에 뺨을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
“그럼 갔다 올게, 이따 보자!”
꾸우!
나는 로토에게 인사하고 근처에 놓인 짐을 들었다.
“읏차, 이건 내가 들어주마.”
레비아 선생님은 내가 챙겨온 가방 중 가장 큰 걸 골라 드셨다.
“어, 제가 들어도 되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자, 가자.”
“넵! 고맙습니다!”
나는 레비아 선생님과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
“와, 여긴 또 다르구나.”
대략 위치를 봤을 때 이곳은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다. 정확한 거리를 측정하는 건 고사하고 줄곧 로토의 품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으니, 무어라 단정짓긴 어려웠으나.
우리나 날아온 속도를 미루어 짐작했을 때 얼추 서울에서 부산 정도는 떨어져 있지 않을까싶었다.
당장 산맥과의 거리만 보더라도 그렇다.
마을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훨씬 선명하게 보일뿐더러, 그 거리도 몹시도 가까웠다. 이 정도라면 넉넉잡아 이틀을 꼬박 달리면 산맥의 초입까지는 어떻게든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환경이나 기온 또한 마을과는 확연히 달랐고, 이제껏 본 적 없는 나무와 식물들이 곧잘 눈에 들어왔다.
호롱!
반디도 새로운 환경이 기꺼웠는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혹시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너무 멀리 가진 마. 알았지?”
반디에게 작게 속삭이자, 반디가 동그랗게 원을 그리더니 그대로 숲을 돌아다녔다.
안 그래도 요 근래에 이상하리만치 잠을 자기에 어딘가 문제라고 생겼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건강하게 돌아다니는 걸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나저나 장터가 어디에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인적은커녕 누군가가 지나다닌 흔적조차 없었다.
뭐, 레비아 선생님이 어련히 알아서 가겠지.
지금은 길을 찾는 것보다 처음 보는 작물에 더 큰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선생님 이건 뭐예요?”
“그건 피트라는 거야. 래디시랑 맛이 비슷한데, 조금 더 단맛을 내지. 거기다 색깔이 보라색이라서 염료료 쓰기도 한다.”
“오오.”
먹을 수 있는 거라면 일단 챙기고 보자.
길에 대한 생각을 접어둔 나는 반디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환경을 만끽하며 걸음을 옮겼다.
부지런히 길을 걷던 중이었다.
툭.
내 발등에 뭔가 묵직한 게 채였다.
“어, 이건 뭐지?”
돌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살펴봤다.
언뜻 야자수 열매처럼 생겼는데, 크기는 내 머리보다 약간 컸다.
“음? 아, 그건 코코나트다. 껍질이 엄청 단단한데, 그 안에는 단맛이 나는 과즙이 꽉 차 있어.”
“어, 진짜요? 이건 먹어도 되는 거예요?”
“응. 나도 가끔 갈증이 나면 마시곤 해.”
“그럼 저도 먹어볼래요!”
“근데, 껍질이 엄청 단단해서 쉽게······.”
코코나트에 대해 설명하면 레비아 선생님이 뒷말을 흐리셨다.
그도 그럴게, 이미 코코나트의 껍질에 나이프를 박아 넣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마수의 뼈로 만든 나이프가 휘는 걸 보니 확실히 단단하긴 단단했다.
게다가 껍질은 섬유질로 이루어져 있는 탓에 힘을 더 줬다가는 나이프가 부러질 것 같았다.
나는 전략을 바꿔 코코나트에 찔러 넣은 나이프를 회전시켰다.
투투투툭, 섬유질이 끊어지며 금세 작은 구멍이 뚫렸다.
이 정도면 됐네.
나는 코코나트에 생긴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걸 그냥 뜯으려고?”
나는 대답 대신 손아귀에 힘을 주고 힘껏 잡아당겼다.
“흡!”
끝까지 버티던 코코나트가 쩌저적,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반쪽으로 갈라진 코코나트의 안에는 새하얀 과육이 있었다.
“내참. 넌 정말로 인간이 맞는 거냐?”
레비아 선생님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헤헤.
뭐, 내가 생각해도 내 근력은 보통 근력이 아니긴 하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말랑말랑한 과육에 나이프를 찔러 놓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냈다.
“오오.”
레비아 선생님의 설명대로 코코나트 안에는 반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킁킁.”
솜사탕에서나 맡아봤음직한 향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단맛이 나리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자고로 백문이 불여일미라고 했다.
기껏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쯤은 맛을 보는 게 좋겠지.
나는 조심스레 코코나트의 과즙을 마셨다.
“오옷!”
가장 먼저 내 혀를 자극한 것은 진한 단맛이었다. 마치 설탕을 입에 들이부운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오죽했으면 혀가 아리다 못해 따가울 정도였다.
내 표정을 본 레비아 선생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엄청 달지?”
“네. 진짜, 엄청엄청 달아요.”
“누구나 다 처음 먹을 땐 그런 표정을 짓지. 너무 달아서 못 먹겠다 싶을 땐 과육을 좀 떼서 먹어 봐.”
“아, 여기 하얀 부분이요?”
“응.”
나는 과육을 살짝 만져봤다. 아까 나이프로 쉽게 잘라낼 때부터 알았지만, 과육은 손으로도 찢을 수 있을 만큼 말랑말랑했다.
나는 과육을 조금 떼서 입에 넣었다.
“오?”
과육은 씁쓸하면서도 어딘가 독특한 향을 품고 있었다.
이걸 어디서 맡아봤더라.
아, 맞다. 이거 헤이즐넛이랑 맛이 되게 비슷하구나.
전생에 초콜렛을 자주 먹었는데, 그중에서도 헤이즐넛이 들어있는 걸 자주 먹었다.
더불어 이 씁쓸함과 특유의 향이 코코나트의 과즙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부담스러운 단맛을 상쇄시켰다. 진하게 뽑아낸 에스프레소에 헤이즐넛 시럽을 살짝 뿌린 듯한 맛이라고 하면 적절하려나.
거기다 씹는 맛도 제법 괜찮은 게 과육이랑 함께라면 부담 없이 마실 수 있겠네.
뿐만 아니다.
이 코코나트의 껍질은 DIY의 재료로 쓰기에 좋아 보였다.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으며, 근처에 떨어진 코코나트를 주섬주섬 챙겨 가방에 넣었다. 그 밖에도 레비아 선생님의 검증을 마치되 내가 직접 맛을 보고 괜찮다 싶은 것만 추려 소량씩 캤다.
말이 소량이지 그 종류가 워낙 다양한지라 여분으로 가져온 가방이 금세 꽉 차버렸다.
“음.”
여기까지만 할까나.
과유불급이라는 말마따나.
마음 같아서는 눈에 보이는 작물들을 모조리 따고 싶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이 땄다가는 도리어 짐만 될 수도 있기에 애써 근질거리는 손을 갈무리했다.
그렇게 새로운 열매를 맛보며 걷기를 10분여.
저 멀리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장터가 부쩍 가까워졌다는 방증이었다.
“후후. 빨리 안 가면 장터가 도망가기라도 할까봐? 그렇게 급할 거 없으니 천천히 가도 돼.”
“아! 헤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서요!”
어느새 거리가 벌어진 선생님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걸음이 빨라졌던 모양이다. 더불어 레비아 선생님이 내 옷매무새를 다듬어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끔 했다.
“뭐, 나도 처음 장터에 왔을 땐 너랑 비슷했지.”
“그래요?”
“그럼. 이곳에 올 수 있는 데바는 정해져 있었거든.”
“그렇구나!”
레비아 선생님과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며 걷고 있자, 내 시야 끝자락에 커다란 기둥 같은 게 걸쳤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자 갑갑했던 시야가 탁 트이더니, 드디어 내가 애타게 찾았던 장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아아!”
나는 걸음을 내딛던 자세 그대로 멈춰선 채 감탄사를 터뜨렸다.
가장 먼저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드넓은 공간을 꽉 채운 상점이었다.
내가 아는 일반적인 건물 내지 포장마차 형식의 상점은 아니었고, 대충 천막으로 햇빛만 가린 좌판이 대다수였다.
와.
무엇보다.
장터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저마다 복장도 외형도 달랐으며, 각 종족마다 특색이 있었다.
“케륵, 싱싱한 늪에서 잡은 프로기다. 케륵, 맛있다.”
일례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종족은 전신이 에메랄드 색 비늘로 덮여있었고, 얼굴은 길었다. 게다가 입을 벌릴 때마다 드러나는 촘촘한 이빨들은 마치 악어를 연상케 했다.
악어 인간은 내게 손짓하며 자꾸만 자기 앞에 놓인 바구니를 가리켰다.
혹시 저 바구니 안에 프로기라는 게 들어있는 건가?
맛있다고 하는 걸 보면 먹는 것 같은데.
문득 호기심이 생긴 나는 까치발을 들어 좌판에 들어있는 걸 훔쳐봤다.
“윽!”
이윽고 프로기를 나는 식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도 그럴게, 프로기의 생김새가 무척이나 징그러웠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계곡에 가면 곧잘 볼 수 있는,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닭살부터 돋는 무당개구리와 무척이나 흡사하게 생겼다. 게다가 그 크기도 황소개구리 뺨치게 큰 게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어우, 딱히 개구리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저건 좀.
“맛있다! 케륵, 싱싱하다!”
아니 살아있으니까 싱싱한 건 당연하잖아. 그리고 싱싱한 걸 떠나서 그걸 먹고 싶은 생각은 요만큼도 들지 않는다고.
나는 행여나 레자드에게 강매라도 당할까, 재빨리 레비아 선생님의 곁에 바짝 붙었다.
“후훗. 레자드라는 종족이다.”
“레자드요?”
“그래. 산맥 안쪽에 있는 늪지대에서 사는 녀석들이지. 보기에는 저래도 꽤나 순한 녀석들이야.”
“그렇구······ 우왓!”
부지불식간이었다.
내 눈앞에 두꺼운 기둥이 나타났다. 정확하게는 하늘에서 후욱, 하고 내려오더니 내 앞을 가로막았다.
쿵!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잠시나마 내 다리가 지상에서 떠올랐다. 이에 옆에 있던 레비아 선생님이 재빨리 내 뒷덜미를 잡아 당겼다.
“괜찮아?”
“네? 아, 네!”
얼떨결에 공중에 대롱대롱 메달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자얀트 놈들은 예의라는 게 없다니까.”
“자얀트요?”
“앞에 봐라.”
레비아 선생님의 말에 나는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제야 나는 방금 전 내 앞을 가로막은 게 기둥이 아니라 사람의 다리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