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유년기(15) - #우루시오르의 진액
“어, 이건! 우루시오르 진액 아니에요?”
“호오, 용케도 알아 보는구나.”
데커드가 할아버지는 내가 바로 맞출 줄 몰랐다는 듯 살짝 놀랐다.
“우와! 이거 진짜 필요했는데!”
이전에 데커드 할아버지는 우루시오르의 진액에 독이 있다는 걸 넌지시 알려준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저 멀리 던져버렸는데, 알고 보니 우루시오르의 진액에는 놀라운 효과가 있었다.
바로 방수 및 코팅이었다.
즉 우루시오르는 내가 익히 알았던 옻나무와 흡사한 기능이 있던 것이다.
근데,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마따나.
우루시오르의 진액을 구하기란 쉽지가 않았을 뿐더러, 혼자서 모으러 다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서 난감하던 차였다.
아침 일찍부터 나가셨기에 대체 어디를 가셨나 걱정했는데, 우루시오르의 진액을 구하러 가신 거구나.
더군다나 내가 구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습관처럼 “우루시오르의 진액이 있으면 좋겠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뿐인데 말이야.
진짜 안 그런 척 하면서 챙겨줄 건 다 챙겨주는 사람이 바로 데커드 할아버지라니까.
“헤헤, 고맙습니다!”
나는 데커드 할아버지의 허리를 냅다 끌어안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부터 숲을 돌아다니셨는지 새벽이슬 냄새가 났다.
“흥, 오다가 주웠을 뿐이다. 징그러운 녀석, 당장 떨어지지 못할까?”
역시나 데커드 할아버지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내 머리를 살살 밀어냈다.
“아, 배고프시져! 오늘 엄마가 데커드 할아버지 드리려구 막 챙겨줬어여!”
“아일라가? 거참, 괜찮다고 몇 번을 말했거늘. 그 엄마의 그 아들이로구나.”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두막으로 향했다.
“여기, 드세여!”
“오냐. 너도 보지만 말고 하나 먹어라, 옛다.”
데커드 할아버지는 미운 놈 떡 하나 주듯, 내게 구운 카무챠를 건넸다.
“잘 먹겠습니다!”
따끈따끈했던 카무챠는 식었을지언정 그 맛만큼은 여전했다.
“맛있죠!”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하구나.”
“그쵸? 얼마 전에 캔 거라서 싱싱해여! 그러니까, 마니 드시고 살 좀 찌셔야 돼여!”
“허? 살 좀 찌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뼈밖에 없자나여.”
내 직설적인 대답에 데커드 할아버지가 움찔했다.
뭔가 한 마디 해주고 싶은 눈치였으나,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이내 카무챠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이야 옷을 걸치고 있어서 잘 모를 뿐이지, 데커드 할아버지는 키에 비해서 몹시도 말랐다. 언제였던가, 우연히 데커드 할아버지가 옷을 갈아입는 걸 봤는데 진짜 미라처럼 아예 뼈밖에 없더라.
내심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라니까.
“그러니까, 마니마니 드세여!”
“흥, 나 혼자 이걸 다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냐?”
에이, 또 저러신다.
무슨 데커드어語도 아니고. 그냥 혼자 먹기는 적적하니 나랑 같이 먹고싶다고 하면 될 것을, 꼭 저렇게 돌려서 말한다니까.
“제가 같이 먹을게여!”
나는 힘차게 대답하며, 또 다른 카무챠 하나를 입으로 가져갔다.
“흥, 괴상한 녀석,”
원래 유유상종이라고 했다. 엄마는 데커드 할아버지를 괴짜라고 부르듯, 데커드 할아버지는 날 괴짜라고 부른다. 그래서인지 은근히 죽이 잘 맞는다는 느낌도 든단 말이야.
“켁!”
잠깐 생각이 삼천포로 빠진 탓인지, 큼지막한 카무챠 덩어리도 덩달아 삼천포로 빠졌다.
“우우.”
가까스로 넘겼으나 속이 갑갑했다.
“옛다.”
나는 데커드 할아버지가 건넨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휴우. 사라따!”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데커드 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그러게 뭘 그리 고민하는 게냐?”
“헤헤, 그냥요! 아! 그러고 보니까요!”
고민하니까 마침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 요즘에요 도리아 아주머니한테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더라구여. 촌장님두 그렇구여!”
“도리아라면, 그 꼬마를 말하는 게냐?”
“네? 꼬마요?”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잠깐만.
데커드 할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는 거지?
보기에는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데······. 솔직히 외모만 보자면 도리아 아주머니와 동년배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정도다.
내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후라서 그랬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그냥 별생각 없이 아저씨라고 불렀으리라.
근데, 도리아 아주머니에게 꼬마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건······혹시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으신건가?
이런 내 궁금증과는 별개로 데커드 할아버지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흥, 어찌나 시끄럽던지. 예전에 개인적인 일로 본 적이 있다만,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지.”
데커드 할아버지는 예전 일이 떠올랐다는 듯 거칠게 수염을 쓸었다.
“진짜여?”
이상하네. 내가 본 도리아 아주머니라면 평상시에 차분한 성격으로 알고 있는데.
도리아 아주머니도 젊었을 땐 한 성격 하셨구나.
하기야, 화를 낼 땐 무슨 화력발전소처럼 열기를 뿜어내는 게 다혈질적인 면도 없잖아 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 꼬맹이가 뭐 어쨌다는 게냐?”
“어, 그러니까 요즘에 부쩍 고민이 많으신 것 같더라구요.”
“고민이 많다?”
“네. 아빠도 막 오랫동안 나가있는 일이 많아여.”
“네 아빠라면 사냥꾼이었던가. 사냥꾼이 나가는 게 무어 이상하다고.”
“음······. 그, 달라여! 막, 사냥꾼 아저씨들이랑 얘기하는 걸 봤는데 되게 걱정이 많은 것 같던데여? 막, 사냥감이 숨어서 골치가 아프다구여!”
“흐음······.”
데커드가 할아버지가 침음을 흘리더니 슬쩍 산맥 쪽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요즘 숲이 조금 시끄럽긴 하더구나.”
“숲이 시끄러워여?”
거기다 나는 아직 숲의 초입만 가본 게 전부라서 그런가, 아직 이렇다 할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 보나마나 숲에 사는 녀석들이 다투는 걸 게야.”
숲에 사는 녀석들이라······. 이거 다른 종족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산맥에는 여러 종족이 살아가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만 딱 거기까지였다. 보아하니 마을 사람들도 자세한 건 모르는 것 같아서, 나 또한 궁금증으로만 남겨두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다른 종족은 뭐예여?”
데커드 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저 숲이 아니, 저 널따란 산맥이 저들 세상이라고 떠드는 놈들이 있다. 참으로 광오한······, 그래 멍청이들이지.”
원래부터 어투가 조금 강하긴 했지만, 지금의 어조에는 유난히도 많은 짜증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오오!”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듯 고개를 쭉 내밀자 데커드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평소에는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녀석이 이럴 땐 애 같구나. 뭐, 에프렐이라는 놈들이다.”
“에프렐?”
에프렐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풀면 숲의 아이 혹은 숲을 지키며 살아가는 아이라는 의미였다. 있는 그대로가 아닌 내포하고 있는 의미까지 포함한다면 숲의 요정이라고도 쓸 수 있었다.
“생긴 건 멀쩡하다만, 영 시원찮은 놈들이지. 보나마나 고브랑 마찰이 있는 걸 게야.”
“고브······.”
이는 악동 혹은 자그마한 말썽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딱 봐도 좋은 의미로 붙인 호칭은 아닌 것 같았다.
“늘 있던 일이야. 조만간 잠잠해질 테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데커드 할아버지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는지, 설명을 끝냈다. 말에 가시가 돋힌 게 에프렐이라는 종족을 싫어하는 느낌이 드는데, 내 착각일까?
그래도 에프렐과 고브라는 종족에 대해서 들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만족해야지.
“우아, 배부르다!”
어느새 카무챠 3알이나 먹어 치운 나는 뽈록 튀어나온 배를 두들겼다.
“휴우, 나는 낮잠이나 좀 자야겠구나.”
데커드 할아버지도 배가 부르셨는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향한 곳은 오두막이 아닌 근처에 있는 거목이었다. 어지간한 성인 3명을 합친 것보다 두꺼운 나무에는 가죽으로 만든 해먹이 걸려있었다. 그 옆에는 간단한 간식이나 잔을 올릴 수 있는 테이블도 있었다.
“만들길 잘했네.”
자고로 휴식하면 피서지고, 피서지 하면 해먹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데커드 할아버지의 전용 휴게실로 자리매김했다.
이내 여유롭게 해먹에 드러누운 할아버지가 단잠에 빠졌다.
“자, 나도 얼른 마무리나 지어야지.”
나는 염료가 완전히 마른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우루시오르 진액을 한움큼 떠 발랐다. 약간 뻑뻑한 질감의 진액을 펴바르자 금세 나무에 광택이 돌았다.
“이야, 진짜 이걸 가져다 주실 줄이야.”
물론 그냥 쓰자면 쓸 수는 있다. 하지만 제대로 코팅이 되지 않은 상태라서 금방 닳아버리거니와 그 내구도도 기대하기 어렵다. 거기다 방수도 안되니 자칫 나무가 썩거나 변색이 될 우려도 높았다.
기껏 정성들여 만들었는데, 금방 망가지면 그것 만큼 씁쓸한 것도 없지. 내심 걱정이 많았는데, 이 우루시오르의 진액으로 코팅만 한다면 만사오케이였다.
“흥흥.”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우루시오르의 진액을 발랐다. 콧구멍을 찌르는 냄새가 조금 고약하긴 했으나 선선한 바람 덕분에 크게 신경 쓰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이윽고 코팅 작업이 끝났다.
“이야,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잘 만들었네.”
거기다 우루시오르의 코팅으로 인해 겉면에 윤기가 돌며 고급스러움을 한층 더하고 있었다. 햇살이 닿을 때마다 반짝이는 게 거울 대용으로 써도 될 것 같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마수의 이빨을 갈아서 만든 흰돌과 검은돌을 각각의 통에 모았다.
“끝!”
자, 완성시켰으니 이제는 가지고 놀 일만 남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