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유년기(10) - #선물
중천에 뜬 해가 기울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을 준비하던 아일라는 작게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로 그림자가 스치듯 지나간다. 이윽고 닫혀 있던 문이 열리더니 작은 인영이 들어왔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밀린 잿빛 머리칼이 살랑살랑, 휘날렸다.
마치 캐트처럼 살금살금 걸어오는 작은 인영의 모습에 아일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넬 왔구나.’
넬이 갓 태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여 걱정이었다. 근데, 이제는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건강하게 뛰어다니는가 하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하며 마을의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귀여운 아이. 오늘도 나를 놀라게 하려는 거겠지?’
아일라는 마치 못 봤다는 듯 요리에 집중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왕!”
몰래 집으로 들어온 넬이 앙증맞은 소리를 내며, 아일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머! 놀래라!”
짐짓 놀란 척 고개를 내렸다. 그곳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넬의 개구장이 같은 표정을 보자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커졌다.
“넬 왔구나?”
“헤헤, 다녀왔습니다!”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뺨을 부비는 넬이 너무나도 귀여웠던 나머지, 아일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넬도 참. 어서 오렴. 잘 갔다 왔니? 무슨 일은 없었고?”
아일라가 묻자 이때다 싶었다는 듯 넬이 말문을 열었다.
“스승님이여! 엄마가 말한 것처럼 디따 똑똑한 사람이었어여!”
“그랬구나! 스승님이 무섭진 않았고?”
“음······. 네! 착한 할아버지였어여!”
“다행이네. 아, 맞아. 넬이 잠깐 나갔던 사이에 미슐레 언니가 왔었단다.”
“어, 미슐레 아주머니가여?”
“응. 저번에 넬이 미슐레 아주머니한테 트러프를 줬었던 거 기억하지? 그때, 꿀절임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거 갖다 주셨거든, 아직 저녁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먹는 게 어떠니?”
꿀절임이라는 말에 넬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먹을래여! 아, 빨리 가서 손 씻구 올게여!”
“그래.”
넬이 후다닥 뛰어나갔다.
이내 깨끗하게 씻은 넬이 돌아왔고, 아일라와 함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본래 꿀절임은 자주 쓰이지 않는 재료가 주를 이룬다. 아무래도 그냥 먹기에는 조금 밋밋하거나 맛이 없는 재료를 소비하기 위한 요리인 셈이다. 애당초 요리가 특기인 만큼 자주 먹지는 않는 식재료를 활용하는데 초점을 맞춰 탄생한 게 꿀절임이기도 했다.
반면에 오늘 미슐레가 준 꿀절임은 조금 달랐다.
“앗, 레즈페리다! 이건······.”
“그건 마스켓이란다. 언니가 따로 씨는 뺐으니까 그대로 먹으면 돼.”
“우와아!”
트러프를 받은 게 너무 고마웠던지, 요즘에는 쉽게 구하기 어려운 열매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도 어찌나 꾹꾹 눌러 담았던지, 살짝만 흔들려도 꿀이 넘칠 정도였다.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열매들을 보던 넬이 군침을 흘렸다.
“자, 얼른 먹으렴.”
“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으렴.”
“엄마도 드세여!”
넬이 아일라의 손에 꿀절임을 하나 쥐여 줬다.
무얼 하더라도 항상 엄마나 아빠부터 챙기는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넬이 먹음직스러운 꿀절임을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어요!”
“맛있지? 나중에 미슐레 아주머니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 하는 거 잊지 말구.”
“네!”
꿀절임을 입에 문 채 행복해하는 넬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하루동안 쌓인 피로가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더불어 이렇게 둘이 앉아서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건 아일라가 가장 기다리고, 또 소중하게 여기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스승님은 어땠니?”
아일라가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어······되게 키가 컸어여!”
“그렇지. 스승님은 키가 크시지.”
자세가 꾸부정해서 잘 티가 나지 않았으나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었다.
“그리구 막 이것저것 알려주셨어여!”
“후훗.”
아일라가 웃었다.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스승님은 알려주는 방식이 조금 특이했을 뿐. 이것저것 알려주기를 좋아했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스승님이 흘리듯 던진 지식 덕분에 도움을 받은 적이 많았다.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이네.”
몇 년 전 스승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의에 빠졌다.
그때 아일라는 슬퍼하는 스승님이 못내 안타까워 매일 찾아가 챙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아일라가 꾸준하게 이 이상 자신에게 찾아올 경우 마을을 떠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스승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진짜로 마을을 떠날까 싶어, 차마 찾아갈 용기는 나지 않았던 아일라는 자신이 수확했던 작물을 근처에 뒀다. 대다수는 벌레의 밥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따금씩은 스승님이 가져간 티가 났다.
그게 벌써 3년째였고, 아일라는 그저 스승님이 살아계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래서다.
오늘 넬이 스승님을 찾아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몹시도 걱정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디 예전처럼 건강하고 말 많은 스승님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거기다 스승님을 찾아간 건 아일라가 아닌 넬이었으니,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었고.
한창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이었다.
“아, 맞다! 엄마, 잠깐만여!”
“응?”
넬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현관 근처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이거 받으세여!
얼떨결에 넬이 내민 물건을 받았다.
딱 봐도 마수의 뼈와 나무를 이어서 만들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생김새가 무척이나 독특했다.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조금 넓은 부분은 가죽에 덮여있었다.
“이건 뭐니?”
“선물이에여!”
“선물? 엄마한테 주는 선물이야?”
“네!”
“어쩜, 이렇게 착할까.”
아일라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안 그래도 최근 들어 무언가 만드는 데 취미가 들린 것 같았는데, 설마하니 자신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애써 감정을 추스른 아일라가 조심스레 가죽을 벗겼다.
“응?”
아일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렴 아이넬은 아직 5살이다. 엄마를 위한 선물이라기에 그저 가족이나 마수를 본 따 조각상이라고 만들었나 싶었는데, 막상 손에 들린 물건은 예상과 딴판이었던 것이다.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은 넓으면서도 그 끝이 날카롭게 갈려있었고, 밑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이건······뭘 만든 거니?”
“어······호미라는 거예여.”
“호미?”
“네! 제가 알려드릴게여, 같이 가여!”
“어머.”
아이넬이 엄마의 손을 잡아 끌었다.
“여기를 이렇게 잡구여, 여기는 이렇게 파면 돼여!”
“그래?”
얼떨결에 마당으로 나온 아일라는 아이넬이 알려준 대로 호미로 바닥을 찔렀다.
호미의 날이 부드럽게 흙을 파고들었다. 살짝 손목을 움직이자 한 움큼의 흙이 딸려나왔다.
“어머?”
아일라도 나름 채집을 오랫동안 해왔다. 마냥 맨손으로 파자니 자꾸만 상처가 생겨서 나름 고심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써봐도 효율이 떨어지고, 영 손에 익지를 않았다. 그랬기에 상처가 생기는 걸 감수하며 맨손으로 채집할 수밖엔 없었다.
이는 채집꾼이라면 모두 똑같은 경험을 했고, 이제는 채집을 끝내고 상처가 생기는 게 당연한 일처럼 여겼다.
반면에 아이넬이 준 호미는 달랐다.
별로 힘을 들이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손쉽게 땅이 파이거니와. 그 깊이나 넓이도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했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일라는 호미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통방통한 물건에 금세 적응했는지 자유자재로 땅을 파고 메우기를 반복했다.
“어쩜 이렇게 땅이 잘 파일까? 이걸 혼자서 만든 거니?”
아일라가 묻자 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여! 데커드 할아버지가 도와주셨어여!”
“스승님이?”
확실히 아일라가 아는 스승님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남들이 모르는 것도 많이 알았고, 신기한 기술들도 곧잘 선보였다.
아마도 넬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주고 싶었고, 스승님의 도움을 받아 이 호미라는 것을 만들었으리라.
“정말······.”
엄마를 위해 저 조막만 한 손으로 열심히 만들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게 물든 아일라가 무릎을 굽혀 넬을 품에 안았다.
아직 채 성장하지 않아 품에 쏙 들어왔다.
‘신이시여, 부디 갸륵하고 마음씨가 고운 아이에게 무한한 축복과 가호를······.’
진심이 담긴 기도와 함께 넬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리라고, 아일라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우리 넬, 엄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헤헤.”
* * *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 있었다.
다름 아닌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태양보다 빛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뜬금없이 이런 상황이 됐느냐면······.
“세상에, 그걸 넬이 만들어 준 거라고?”
“네! 엄마 선물이라고 저한테 주더라니까요, 글쎄?”
“어쩜, 기특하기도 하지!”
그렇다.
내가 만들어 준 호미가 원인이었다.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에 엄마가 슬쩍 호미를 들었다.
날렵하게 빠진 쉐입과 날카로움을 자랑하는 호미날이 햇살에 반사되어 특유의 광택을 뿜어낸다.
엄마의 손에 맞춰 완벽한 그립감을 자랑하는 손잡이에는 작게 ‘엄마꺼♡’라는 각인까지 새겨 핸드메이드 특유의 고급스러움을 한층 더했다.
나도 모르게 한글로 적어버린 탓에 정작 엄마는 읽지 못한다는 게 함정이었다.
엄마가 시연할 겸 호미를 휘둘렀다.
호미날이 거칠게 자라난 잡초들을 베어 넘기며, 부드럽게 지면을 파고든다.
푸확!
마치 고래가 물을 뿜어내듯, 흙이 공중으로 휘날린다. 그와 더불어 땅 속에 꼭꼭 숨어있던 카무챠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카무챠 한 알을 캔 엄마가 우아하게 허리를 들었다. 엄마의 찰랑이는 머릿결이 바람에 흩날렸다.
“오오오.”
“너무 편해보인다.”
“나도, 나도 한 번만 써보면 안 될까? 응?”
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과 환호는 덤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엄마는 마치 고가의 명품백을 쥔 채 포토라인에 선 셀러브리티처럼 제자리를 빙글 돌며, 연신 아이넬표 호미 마크 원을 뽐냈다.
“······.”
왜일까.
자꾸만 호미를 자랑하는 엄마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고개가 내려간다고 해야 할까.
분명히 호미를 자랑하는 건 엄만데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그렇다고 가서 뜯어 말리자니 그럴 수도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호호호, 글쎄 넬이 엄마 손 다칠까봐 만들었다는 거 있죠?”
이렇듯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선뜻 발길이 떨어질 않는 것이다. 엄마가 저렇게 팔불출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머, 기특하기도 하지! 어쩜 저렇게 생각이 깊을까?”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런 거 하나 있으면 원이 없겠는데.”
“그치? 나도 그래. 흐음, 어디 굴러다니는 호미 하나 없나?”
처음 내가 채집계의 슈퍼루키 겸 엄마 친구 아들이 된 날처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 내 쪽으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