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유년기(4) - #채집
“아일라, 여기야 여기!”
일찍부터 도착한 미슐레 아주머니가 이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주변에는 10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머리색이 알록달록한 게 꼭 놀이동산 좌판대에 걸린 풍선을 보는 것 같다니까.
미슐레 아주머니의 우렁찬 인사에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도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일라 언니다.”
“옆에 아이넬도 있네.”
몇몇을 제외하고는 낯이 익은 얼굴들이었다.
이렇듯 한적한 숲에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단순했다.
오늘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채집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저마다 바구니와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
한편 살짝 떨어진 곳에는 제법 체격이 좋은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두 사람은 아빠와 마찬가지로 사냥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사냥꾼이 이곳에 있는 이유라면 역시나 채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리라. 애당초 마수를 전문적으로 사냥했으니 전투에 능한 사람들이기도 했고.
이를 증명하듯 두 사람이 무장을 갖춘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밝은 표정으로 잡담을 나누는 아주머니들과는 달리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빨리 오셨네요.”
“호호, 우리도 다 금방 왔는걸? 오늘은 넬도 왔구나. 엄마 도와주려고 같이 나온 거야?”
“네! 안녕하세요!”
미슐레 아주머니께 꾸벅 인사하자, 누군가가 내 정수리를 꾸욱 눌렀다.
“요 쪼꼬만 게. 누나는 보이지도 않지?”
이런 말투는 쓰는 사람이라면 한 명밖에 없는데.
예상대로 내 머리를 누른 건 세라 누나였다.
“으으으, 안녕하세요!”
내가 끙끙거리며 힘든 시늉을 하자, 세라 누나가 픽 웃었다.
“엄살은! 르네, 이리 와서 인사해야지?”
이제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그녀가 세라 누나의 딸인 르네였다.
기억난다. 엄마가 소식은 있느냐고 묻자 노력은 하고 있다며 얼굴을 붉혔었지. 빈말은 아니었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앙증맞은 딸을 낳았다.
순식간에 이목이 집중되자 르네가 몸을 움츠렸다.
“여기 아이넬 오빠도 있는데, 계속 숨어 있을 거야?”
나는 르네에게 팔락팔락 손을 흔들었다.
“안녕?”
내 인사에 르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따금씩 우리 집에 르네를 데리고 올 때면 놀아주곤 했는데, 아직까지도 내가 낯선 모양이다.
“자꾸 그렇게 숨으면 오빠가 안 놀아 줄걸?”
세라 누나의 엄포가 잘 먹혔는지, 르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안녕······.”
귀여워라!
작고 앙증맞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꼭 도토리를 문 아기 다람쥐 같았다.
귀여움에도 공격력이 있었더라면 내 HP는 0을 넘어 마이너스가 되었으리라.
르네가 애써 용기를 짜내어 인사를 건넸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도저히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었는지 슬그머니 고개가 내려갔다.
푼수 끼가 다분한 누구와는 달리 상당한 부끄럼쟁이였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자 세라 누나가 내 정수리를 쿡 찔렀다.
내 정수리가 무슨 초인종도 아닐진대, 왜 이렇게 찔러대는 거야.
“하여간. 넬, 너너너 우리 딸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무슨 짓이라니?
듣는 이에 따라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말투였다. 설마하니 진짜 그런 의도로 물어봤을 리는 없을 터.
정수리에 가해지는 압력에 반항하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뭘여?”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세라 누나가 입술을 삐죽였다.
“르네 말이야. 아주 그냥 맨날 아이넬 오빠만 찾는다니까?”
응?
“르네가여?”
“그 얌전한 애가 아주 그냥, 네 얘기만 들리면 무슨 크래거 보어처럼 달려온다구.”
세라 누나의 호들갑에 내심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귀여운 아이한테 크래거 보어라니.
그래도 내 얘기에 반응을 해준다니 내심 기분은 좋네.
사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옛날이야기를 해준 것밖엔 없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때 이후로 자꾸만 라빗트만 보면 우는데, 대체 왜 그런 걸까?”
세라 누나의 말에 뜨끔했지만, 짐짓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아직두여?”
“응.”
사실 르네가 라빗트를 보면 울 게 된 데에는 내 영향력이 지대했다.
정정한다.
그냥 나 때문이다.
어느 날이었다. 르네가 날 너무 어색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름 아닌 옛날이야기였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인 전래동화를 들려줬는데······.
그게 별주부전이었다.
아니, 토트리와 라빗트전이라고 해야 하나.
이곳에는 토끼와 거북이라는 명칭이 따로 없는지라, 그나마 비슷하게 생긴 토트리와 라빗트로 대체했다. 그 외에 용왕이나 기타 주/조연들도 나름 명칭을 바꾸거나 각색했다.
어찌나 집중을 해서 듣던지.
이야기해 주는 내가 다 뿌듯해지더라.
더불어 동물이 주인공인 이야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는 걸 발견한 날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날 저녁 식탁에 올라온 음식이 라빗트 통구이였던 것이다.
당시 세라 누나가 능숙한 손길로 라빗트의 배를 가르며 이런 말을 했었다.
“역시 라빗트는 간이 제일 맛있다니까요?”
이 한마디가 결정타였다.
안 그래도 충격을 받은 르네는 울먹거리더니 딸꾹질까지 하더라.
당최 그 원인을 모르는 세라 누나는 엉엉 우는 르네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렸다.
덕분에 라빗트의 간은 내 차지가 되었지. 보들보들한 게 맛있긴 하더라.
안 그래도 르네한테 들려줄 이야기를 추려놓긴 했는데, 시간이 나면 들려줘야겠다.
“너어, 우리 르네 울렸다가는 이 누나가 가만두지 않겠어.”
세라 누나가 주먹을 쥔 채 으르렁댔다. 무섭긴커녕 겁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라빗트조차 콧방귀를 낄 연기력이었다.
확 그냥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해줄까 보다.
“주목!”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촌장 부인인 도리아 아주머니였다.
“지금부터 숲으로 들어갈 테니, 이쪽으로 모여.”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떨어져 있던 사냥꾼들이 다가와 인원을 체크했다.
“하나, 둘, 셋······ 열넷.”
“열넷. 이상 없습니다.
인원 파악을 끝낸 사냥꾼이 보고했다. 도리아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뭘 하는 거지?
이런 내 시선을 의식했던 걸까. 엄마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채집을 하기 전에 신께 기도를 올리는 거란다. 넬은 아직 잘 모르니까, 도리아 씨가 묵념이라고 하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렴.”
아아, 기도를 하려는 거구나.
작게 들려온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묵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신께 고하옵건대, 오늘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자뭇 엄숙함마저 감도는 기도문이 조용한 숲에 울려퍼진다.
슬그머니 실눈을 떠 사람들을 곁눈질했다. 저마다 작은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르네가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르네가 화들짝 놀라더니 팩 고개를 돌렸다. 탐스러운 레몬빛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가 유난히도 붉었다.
괜스레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나저나 신이라······.
솔직히 전생의 나는 어딘가에 신 혹은 초월적인 존재가 있으리라고 믿었다. 단지 속으로 생각하는데 그쳤을 뿐, 이렇다 할 종교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면에 마을 사람들은 진심으로 신을 믿었고, 무언가를 할 때면 늘 기도를 올렸다.
문득 아직까지도 저승사자인지 뭔지 모를 노인이 떠올랐다.
기도라. 뭐, 크게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듣고 계실진 모르겠지만, 환생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라기엔 지나치게 짧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진심만 전하면 되겠지.
“아, 그리고 되도록 조용하게 살 테니까, 굳이 오실 필요는 없거든요? 똥 밟았다 생각하시고, 없었던 셈 쳐주세요.”
마무리로 부탁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이내 주변이 조용해졌다. 기도 시간이 끝났나 싶어 눈을 떴다.
“응?”
어째선지 도리아 아주머니의 시선이 내게 꽂혀있었다. 게다가 어깨마저 떨리는 게 크게 당황했음을 방증하고 있었다.
또 저러시네.
사실 도리아 아주머니의 저런 반응은 처음이 아니었다.
딱 봐도 무언가 감추는 게 확실한 것 같은데, 내가 물어볼라치면 도망치듯 자리를 떠버리니······.
애당초 뭘 숨기려는 건지, 또 왜 비밀로 하려는지 당최 영문을 모르겠단 말이지.
도리아 아주머니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
아쉽게도 목소리가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내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자, 도리아 아주머니가 퍼뜩 고개를 흔들더니 손뼉을 쳤다.
“자, 자! 지금부터 이동!”
엄마가 내 손을 감싸쥐었다.
“자, 우리도 갈까?”
에이,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네!”
애써 의문을 접어둔 나는 엄마와 함께 숲으로 진입했다.
약 10분쯤 걸었을까.
정찰을 떠났던 사냥꾼들이 돌아왔다. 보고를 받은 도리아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었다.
“자, 모두 멈춰. 여기서 채집을 시작할 거야.”
“응? 오늘은 별로 깊게 안 들어가네?”
“그러게. 여기보다는 그때 갔던 곳이 더 좋은데.”
몇몇 사람들이 의문스럽게 쳐다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각자의 짐을 한곳에 내려놓고 본격적인 채집을 시작했다.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카무챠나 래디시였다. 알뿌리 식물 중에서도 비교적 얕은 땅에서 자라기에 채집난이도가 낮은 편이었다.
거기다 손질이나 보관이 편하고 맛이 담백해서 늘 식탁에 올라오는 식재료였다.
어디 보자.
나는 엄마에게 배운 지식을 토대로 땅을 살펴봤다.
능숙하게 채집하는 엄마와는 달리 어딜 보더라도 다 비슷비슷 해 보인다.
호롱!
“응?”
이제껏 어디 있다가 나타났는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반디가 내 앞을 알짱거렸다.
“워이, 이따가 놀아 줄······응?”
말을 멈춘 나는 반디를 유심히 살폈다. 이제 보니 녀석은 땅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혹시, 거기 있는 거야?”
호롱!
반디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긍정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엄마가 하는 것처럼 막대기로 땅을 헤집었다.
“오옷.”
딱딱한 무언가가 걸렸다. 조심조심 흙을 밀어냈다. 울퉁불퉁한 무언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혹여 상처가 날까 조심스레 잡아당기자 쑤욱, 빠졌다.
“어. 이건 뭐지?”
땅속에 있기에 카무챠나 래디시인 줄 알았는데, 여태껏 엄마가 캤던 것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어우.”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뭔 놈의 냄새가 이리도 강렬한지, 잠깐 맡았는데도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흙을 툭툭, 털어내고는 엄마한테 내밀었다.
“엄마, 이건 머에여?”
“아! 그건······.”
내 손에 들린 알뿌리를 본 엄마가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