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유년기(3) - #결심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언 5살이 되었다. 막 태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언제 사람답게 생활할 수 있을지 막연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이라 집 안은 컴컴했다. 은은한 달빛에 의지해 옆을 확인했다. 아빠는 밤늦게 사냥을 나섰는지, 자리에 없었다.
엄마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이불 속에서 자그마한 빛이 새어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곧잘 날 찾아왔던 발광체였다. 하도 자주 보니 정이 들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나한테 해를 끼치지 않거니와, 졸졸졸 따라다니는 게 제법 귀엽더라. 은은한 녹색 빛이 반딧불이를 떠올리게 해서 반디라는 이름까지 붙여줬다.
특이한 건 반디는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나만 녀석을 볼 수 있었고, 만질 수도 있었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애당초 남들에게 보이질 않으니 물어볼 방법도 없었고. 따라서 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반디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일단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건 확실해서 미확인비행물체에서 미확인생명체로 호칭만 바뀌었다.
반디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굳이 깊게 파고들진 않기로 했다.
뭐, 귀신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나도 특이한 체질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게다가 반디는 내가 환생한 후로 처음 사귄 친구다. 그야말로 종족을 초월한 우정이었으니 사소한 비밀 정도는 눈감아주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안농.”
속삭이듯 인사를 건네자 반디가 내 콧잔등에 앉았다.
얼떨결에 녹색 코를 가진 루돌프가 된 나는 조심스레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에서야 바깥으로 나갔다.
“헛둘, 헛둘.”
어깨를 시작으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밤새 굳었던 근육을 쭉쭉 늘리자 금세 몸이 달궈졌다.
전생이었더라면 아침 체조는 고사하고, 아슬아슬할 때까지 뭉그적거리고 있었을 터. 버티고 또 버티다가 힐끗 시계를 보고 부랴부랴 뛰쳐나가기 일쑤였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했으니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마따나. 보람찬 삶을 살겠노라 결심한 후로는 꾸준하게 아침 운동을 했다. 땀을 빼고 나면 몸도 마음도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끝내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깊은 산중인 만큼 새벽녘에는 제법 쌀쌀했다.
나무 대야에 가득 담긴 물을 퍼다가 얼굴을 닦으려던 나는 냉큼 반디에게 뿌렸다.
호롱!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잽싸게 피한 반디가 내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아프긴커녕 간지럽기만 했다. 귀여운 녀석.
“어허, 좋다.”
노곤한 아저씨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몸 구석구석 씻었다.
“휴우, 개운하네.”
어느덧 시커멓던 하늘에 옅은 파란 빛이 감돌았다.
습관처럼 고개를 돌렸다.
“오오오.”
산맥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안개가 주홍빛으로 물들고, 형형색색 옷을 입은 나무들이 길게 그림자를 늘어트린다. 곤히 자던 산새들도 새로운 하루를 환영하듯 하늘을 수놓는다.
“히야!”
환생한 뒤로 수백 번은 본 광경이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른단 말이지. 이렇듯 서서히 떠오르는 해를 응시하고 있으면 없던 힘도 막 솟아났다.
“아자아자!”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내겠노라고 다짐했다.
대충 젖은 몸을 말린 나는 곧장 화로 앞으로 향했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화로 위에는 바위를 깎고 파내서 만든 단지가 놓여있었다. 살짝 뚜껑을 밀었다.
“킁킁.”
고소하면서도 달큰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은근한 불로 밤새 끓인 탓에 끝까지 차 있던 물은 대부분 졸아있었다. 물 한 바가지를 붓고 살살 저었다.
자세를 낮춰 화로 안쪽을 확인했다.
엄마가 주무시기 전에 넣어둔 장작은 까맣게 타 있었다. 근처에 놓인 막대기를 집어 화로를 뒤적였다.
톡톡, 막대기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살살 잿더미를 치웠다.
“크.”
안에는 카무챠가 들어있었다. 막대기로 끝을 찔렀다. 검게 그을린 껍질이 벗겨지며 포슬포슬한 속살이 드러났다. 살짝 배어 물었다.
“아뜨뜨.”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호호, 불며 카무챠 한 알을 뚝딱 해치웠다.
든든해진 배를 문지르며 남은 카무챠는 그릇에 옮겨 담았다.
잿가루도 일일이 긁어내 모았다. 잿가루는 세탁을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 유용하게 쓰였다.
불씨만 덩그러니 남은 화로에 땔깜을 넣었다.
“후욱, 후욱.”
입김을 불었다. 야무지게 마른 땔감에 불이 옮겨붙으며 은근했던 열기가 한층 강해졌다.
타닥타닥.
“이걸로 아침 준비는 끝. 야야!”
반디는 화로에서 튀는 불똥이 마냥 신기했는지 연신 주변을 알짱거렸다.
“그러다 불붙는다?”
“넬, 거기 있니?”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엄마! 저 여기 있어요!”
부엌과 연결된 문이 열리며 엄마가 고개를 내밀었다.
“응? 거기서 뭐 하니?”
“장작이랑 물 넣었어요!”
엄마가 눈을 크게 떴다.
“엄마 대신 해 준 거야?”
“네!”
“어쩜. 부지런하기도 하지.”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
예전에는 엄마의 스킨쉽에 민망했는데, 이제는 나름 즐기는 경지에 다다랐다.
“아, 배고프지? 가서 앉아 있으렴.”
“네!”
나는 부엌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가 아침준비를 시작했다. 식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정겹다.
“자, 많이 기다렸지?”
금세 아침 식사가 차려졌다. 오늘의 메뉴는 스튜와 야베츠 샐러드, 찐 카무챠였다.
그중에서도 메인은 큼지막한 대접에 담긴 스튜였다. 방금 전 내가 물을 부었던 솥에 들어있던 스튜였는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영원의 스튜라고도 불렸다.
집에 있는 재료를 추가해서 계속 끓이기에 붙은 이름이라나. 쉽게 말해서 재탕에 재탕. 무한의 인피티니 같은 요리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식탁에 올라오는 메뉴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숱하게 먹었지만, 먹을 때마다 맛이 달라지는 게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
딱 하나 요리사의 기분이나 취향에 온전히 맡긴다는 맹점이 있었다. 행여나 요리사의 빈정을 상하게 했다가는 싫어하는 재료만 잔뜩 들어갈 터. 그날은 하루종일 물배만 채워야 하리라.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많이 먹으렴.”
나는 긴장된 눈으로 스튜를 노려봤다. 예나 지금이나 편식과 거리가 먼 나였으나 환생한 후로는 몇 가지 꺼리는 식재료가 생겼다. 대표적으로는 그루버라고 불리는 벌레였다.
생김새는 굼벵이랑 비슷했다. 문제는 크기가 내 손바닥만 하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번데기도 곧잘 먹어서 벌레에 큰 거부감은 없다고는 한들, 스튜에 둥둥 뜬 그루버와 눈이 마주치니 온몸에 닭살이 돋더라.
“예스.”
좋아.
일단 내가 기피하는 재료는 보이지 않았다.
후루룩, 한 숟갈 떠먹었다. 콘포 특유의 달짝지근하면서도 짭쪼롬한 맛이 혀끝을 자극한다. 내가 즐겨 먹었던 옥수수 스프를 떠올리는 맛이었다. 실제로 콘포는 옥수수와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고.
내가 열심히 먹자 엄마가 흐뭇하게 웃었다.
“맛있니?”
“네! 더 주세요!”
금세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추가로 한 그릇을 더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제가 할게요!”
“고마워.”
주섬주섬 식기를 챙겨 한 곳에 쌓았다. 위에 잿가루를 섞은 물을 뿌렸다.
엄마가 부엌에 놓긴 바구니를 챙기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옷자락을 꾹꾹 당겼다.
“엄마, 엄마.”
“응? 무슨 일이니?”
“나도, 나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엄마랑 같이 가고 싶은 거야?”
“응!”
엄마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엄마랑 아주머니들이 하는 말씀 잘 들어야 돼. 알았지?”
아자!
“네!”
“그래, 가자.”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마을의 아침은 빨랐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자신의 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쉬이 마주칠 수 있었다. 나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이넬이구나? 착하기도 하지.”
“헤헤, 안녕하세요!”
“안녕! 오늘은 엄마랑 같이 가는 거야?”
“네!”
“착하기도 하지. 급하게 뛰어가지 말고 조심하고!”
“네! 고맙습니다!”
전생의 나는 아파트에 살았다.
단단한 콘크리트벽 너머.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이웃이 산다.
하물며 나는 10년을 같은 곳에 살았다. 출근과 퇴근은 물론, 잠깐 슈퍼를 갈 때에도 낯익은 얼굴들을 마주친다.
어떻게 보면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음에도 데면데면 하다고 해야 하나.
일에 치여 피곤하고 짜증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선뜻 인사를 건넬 수 없었다.
비단 이웃만이 아니다.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도 바깥에서 만나면 모른 척 지나치기 일쑤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표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반면에 이곳은 달랐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야 되나, 싶으면 상대방이 먼저 알은체를 해온다.
심지어 초면이라도 선뜻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거나 서로의 안부를 묻는 아주 사소한 행동이 이렇게나 큰 기쁨이 될 줄은 몰랐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나는 사람만 보면 쪼르르 달려가 인사를 건넸고, 덕분에 내 이름 세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알코른 아저씨, 민디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아이넬이구나? 안녕!”
“안녕 못 하다!”
“당신은 왜 아이넬한테 그래요? 하여간 성질 머리 하고는!”
옆에서 함께 걷던 아주머니가 핀잔을 줬다.
“어? 그, 그게 아니라 그냥 장난······.”
“시끄러워욧! 아이넬을 봐요, 아직 어린데도 엄마를 도와주는 게 얼마나 착실하고 예뻐요? 근데, 뭐? 안녕 못 하다?”
폭풍 잔소리의 서막이 오르자, 알코른 아저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실 알코른 아저씨가 툴툴거리는 건 그냥 말투가 저런 거지, 별다른 의미는 없다. 거기다 친한 사람들에게만 사용하는 말투라는 걸 알기에 밉긴커녕 정겹게 느껴졌다.
설마하니 평생을 함께 산 민디 아주머니가 그걸 모를 리는 없을 터. 어쩐지 민디 아주머니의 표정이 썩 좋진 않더라니, 알코른 아저씨가 뭔가 잘못을 저지른 모양이다.
“거, 장난이래두 그러네. 자, 이거나 하나 가져가라!”
알코른 아저씨가 작은 나무통을 건넸다.
“이 사람이 미쳐가지고! 애한테 술을 줘?”
“아, 아니 줄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하기야. 알코른 아저씨의 취미는 술빚기다. 근처에 가면 달달한 과실주 냄새가 풍겼으며, 코는 딸기처럼 빨갰다.
그나저나 아저씨 울겠네.
“고맙습니다! 이거, 아빠 드릴게요!”
알코른 아저씨가 기꺼운 표정을 짓더니, 냉큼 구명줄을 잡았다.
“그, 그래! 넬슨 주면 되겠네. 하하하. 똑똑하기도 하지. 아무튼, 조심히 가라.”
소소한 해프닝을 뒤로하고 부지런히 걸었다. 이윽고 마을과 숲의 경계지점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