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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급 던전의 찬탈자-293화 (완결) (293/293)

293화

-종장 (終章)

* * *

“…….”

턱 끝까지 막고 있던 숨을 내뱉은 정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영겁에 가까운 시간.

그 끝에 눈을 뜬 정우의 주변으로는 커다란 나무와 아름다운 자연이 가득했다.

하지만 두 눈을 깜빡이자 나무는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아름다운 풍경뿐.

정우는 정신을 차렸다.

“…모든 마력을 집어삼켰다.”

어둠의 마력.

부정의 능력이라 불리는 그것들을 모조리 갈무리했다.

더불어 강인한 육체의 토대가 되는, 세계수까지도.

세계수의 흡수는 계획한 것이 아니었지만, 어둠의 마력은 기어이 지구에 퍼졌던 모든 마력을 흡수한 세계수까지 삼켜 버렸고.

정우는 세계수를 지키기 위하여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의 심상으로 모든 것을 흡수해 버렸다.

환상을 실체로.

실체를 환상으로.

부정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시작한 정우는 모든 것을 환상과 실체로 탈바꿈시켰다.

세계수는 머금고.

그 모든 능력은 외부로 표출하고.

어둠의 마력은 흡수하며.

어둠의 영역은 거둬들이는 작업.

그 지난한 작업이 끝난 것은.

그 모든 변화를 직접 목도하고 있던 왕의 정신이 반쯤 무너져 내렸을 때였다.

저벅.

정우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토록 간절히 애원하던 정우가 자신에게 다가옴에도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어둠만이 가득하던 종말의 시간 속에서는 끝까지 버텼던 그가.

오히려 정우가 등장한 뒤로 무너져 내렸다.

다시 한번 모든 걸 걸고 싸우는 전투.

그것이 눈앞에서 무한정 연기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

세계로 퍼진 것이 아닌, 정우에게서 빼앗은 본래의 능력은 발악이라도 하듯 정우를 공격했다.

왕좌로 올라가는 계단의 바로 아래.

예전엔 자신이 저 자리에 앉아 지겹다는 듯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능력을 강탈당한 뒤에는 재도전하여 지금의 위치에 섰었다.

같은 구도였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껄끄러운 태도.

혹은 반가운 모습.

그 모든 것들이 아우러져 있던 대전은 휑했으니까.

파괴의 힘은 모든 것을 앗아갔고.

그 파괴의 힘조차 대부분을 정우에게 다시 빼앗겼다.

남은 것이라곤 ‘근원’뿐이었다.

정우의 원래 힘이자.

강탈당한 능력.

“넌…. 존재해서는 안 되는 힘이다.”

정우의 말에 반박하듯 어둠이 넘실거렸다.

그 기세에 왕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 …놈! ]

오랫동안 자신을 무시한 정우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고.

근원은 정우에 대한 경계심으로 그 분노를 도와 다시 한번 폭주했다.

원래라면.

그랬어야 했다.

[ ……! ]

지식의 신이 어둠의 마력을 사용하지 못했던 이유는, 시간의 축을 비튼 정우가 대부분의 어둠을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대전의 주변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생명이 움트고 자라며, 성장하는 장소.

모든 것들이 밝고 환한 장소.

그 안을 가득 채운 것은, 마나와 더불어 천적에 가장 가까운 정령력이었으니까.

그리고 대전을 중심으로 사방엔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나무들이 서 있었다.

세계수 묘목이라 하기엔 작은, 평범한 나무.

하지만 그곳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은 각자의 깨달음을 기록했던, 어둠의 영역 속에 존재하던 묘목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부정하는 힘.

각자의 방식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그것들이 능력의 폭주를 막아냈다.

그 사이를 정우가 가로지른다.

천천히.

저벅.

대전을 오른다.

용좌와 더불어 남아 있는 유일한 건축물인 계단을 걸을 때마다.

[ …내, 내 힘이 사라진다! ]

왕의 힘은 점차 반감되어만 갔다.

강탈과는 전혀 다른 능력.

융화(融和)였다.

파직.

모든 것을 부정하는 힘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근원이 필요했던 그것은, 정우의 융화에 녹아들어 갔다.

파지직!

그럴수록 시간의 법칙을 거스른 채 존재하던 왕의 전신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파스스-!

계단이 모래로 변해 흘러내리고.

용좌가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 이건, 이건…. 내가 바라던 게 아니다! ]

왕이 비명처럼 애원했지만 정우는 무시했다.

그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힘.

그것이 빼앗았던 것들을, 진정한 의미로 찬탈하는 게 필요했을 뿐.

근원의 저항은 강력했지만.

두 세계를 가득 채웠던 힘을 거머쥔 덕분에 정우의 힘은 그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거센 탐욕이 독이 되어 돌아온 순간.

울컥!

피를 살짝 흘린 정우가 손짓하자, 경악과 두려움의 표정으로 굳어 버리던 왕의 육체가 무너져 내렸다.

허무한 결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등장하는 건.

검다 못해 밝다는 느낌이 역설적으로 드는 작은 고리였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정우의 조용한 말에 그것이 떨 듯이 부르르 기파를 털어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대부분의 기운을 빼앗겨 버린 그것은 더 이상 정우에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가한 피해라고는 욱신거리는 장기와 한 줄기의 피가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정우는 모든 걸 정해 놓았다.

“본래부터 너는 나의 것이다. 내게….”

정우가 검은 고리를 움켜쥐었다.

“네 존재를 바쳐라!”

콰직!

고리를 부서트림과 동시에 정우는 손 안에서 날뛰는 마력을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융화시켰다.

느껴지던 반발력은 힘을 잃고 사그라졌고.

정우는 결국 자신의 것이었던 그 모든 힘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길었네.”

과거를 회상하는 정우의 눈에 담긴 감정은 짙은 피로감이었다.

부서져 버린 용좌.

사라져 버린 대전.

어둠의 마력이 힘을 잃자 정우가 회복시킨 세상의 마력이 천천히 그곳을 태워 나갔다.

정우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둠의 마력이 만들었던 모든 잔해가 생명의 기운으로 뒤덮이자.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조용히 노크했다.

자신의 심상을.

“…끝냈군요.”

“어. 늦었지.”

“뭐라고 부를까요?”

메아리의 물음에 정우가 잠시 고민하더니.

“한정우.”

가만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메아리가 서글프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애매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윽고 고개를 숙인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 * *

환상을 실체화하는 것.

그것으로 만든 것 중에 가장 훌륭한 건, 다름 아닌 시스템이었다.

지식의 신에게 던전과 메시지 기능을 넘겼음에도, G급 던전의 시스템만큼은 손볼 구석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으니까.

메아리는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사라져 버렸지만 이미 한 번 만들어 본 체계였다.

다시 만드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정우의 능력이 그때와는 차원이 달라져 있었으니까.

정우는 흐릿한 연기를 내뿜는 게이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부정의 힘.

어둠의 마력.

이 이질적인 힘을 다룰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집념으로 능력을 습득한 ‘그’가 나의 능력을 강탈했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어.”

마력은 그만큼 신비하니까.

그 어떤 천재가 등장하여 또다시 탐욕을 부릴지 모를 일이었다.

때문에 정우는 지구를 택했다.

메아리는 그에 맞는 태도를 취했을 뿐이다.

친우가 아닌, 주인으로.

정우가 지구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구엔 마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수호자(tutelary) 세계에선 볼 수 없었던 ‘치열함’과 ‘성장’을 이미 목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G급 던전.

정우는 새롭게 시작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마력을 ‘소모’시킬 방법으로.

“친구들을, 보지 않아도 괜찮나요?”

“괜찮아. 네가 망각시킬 테니까.”

정우가 할 일은 한 가지였다.

‘모든’ 것을 초기화시키는 것.

어둠의 마력이란 걸 아는 이가 없는 시기까지.

자신이 그 힘을 가지고 세계를 장악하기 전으로.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질시하고 경계하며 탐내던 이가 없던 시절로.

그래서.

“진정한 의미로 ‘부정’한 것을 정화시킬 수 있는 이가 등장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거야.”

“가능…할까요?”

“가능해. 인간의 가능성이라면. 얼마든지.”

정우의 확신에 메아리는 긴 한숨을 천천히 내쉬더니 꾸벅 인사를 건넸다.

“고생했어. …그리고 부탁해.”

정우의 미안한 표정에 슬며시 미소 지은 메아리가 G급 던전으로 입장했다.

정우는 홀로 남아 모두를 떠올렸다.

수호자(tutelary) 세계의 친구들은 자신을 잊을 것이다.

고민을 했지만 그 끝의 결론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곳의 자신은 위험했다.

마력의 사랑을 받고, 마력을 통해 세월을 무시한 채, 남들과는 전혀 다른 체계의 법칙을 완성해 나가는 자.

대마도사.

그런 자신이라면 언제고 다른 차원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정우는 그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그 세계의 자신을.

부정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메아리를 통해 망각시킬 생각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자.

정우가 만들 본인은, 그런 종류였다.

그럼에도 지구의 자신을 택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만약을 대비해야 했으니까.

“…….”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본 정우가 천천히 G급 던전으로 입장했다.

허무한 공간.

그곳에서 메아리는 환상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거대한 환상.

그것의 실체.

메아리가 다룰 시스템은, 타인의 침범이 불가능한 그런 것이었다.

바로 메아리 본인 말이다.

더불어 환상의 기반은 거대한 나무가 도맡았다.

세계수.

본래 자신이 가졌어야 했던, 자신의 육체.

그 거대한 육체를 틀로 삼고.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메아리가 채워 나간다.

드드드, 제단이 생겨나자 정우는 제단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권능을 천천히 뽑아냈다.

융화의 권능은, 반대로도 자연스럽게 적용되었다.

모든 어둠의 마력을 뽑아낸 정우가 최후의 권능, 시간의 부정만을 남긴 채 몸을 돌렸다.

융화로 묶어둔 제단은, 이제 메아리의 영역에 속했다.

하지만 시간의 부정만큼은 정우의 것이었다.

모든 걸 되돌려야 하기에.

본래 자신이 태어난 최초의 세계.

‘마계’를 떠올리며 시간의 축을 비틀었다.

부정(否定)이 없던 시간.

자신이 능력을 제대로 각성하기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간 정우는, 자연스럽게 통로를 열어 G급 던전으로 이동했다.

이로써 자신은 마계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다시 한번 만난 제단의 앞에서.

정우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G급 던전에 융화된 부정의 힘으로.

“내 권능을 부정한다. 근원을…. 부정하마.”

부정이라는 힘의 근원을 부정했다.

그것의 여파는 강렬했다.

정우는 정신을 잃고 기절했고, 그 모습을 메아리가 서글프게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만나요.

* * *

“어…. 저게 뭐지?”

어느 날 갑자기 탑이 등장했다.

거대한 나무의 형태를 닮은, 하늘 끝까지 오르는 탑의 등장은 예고도 없었다.

그것의 등장에 사람들은 경악과 두려움에 떨었고, 여러 국가들이 나서서 연구에 매진했지만.

밝혀낸 건 하나도 없었다.

탑 내부를 탐색해야 한다는 주장과 무엇이 있을지 모를 정체불명의 공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펼쳐졌지만.

결국 탑에 입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를 이루었다.

“어떻게 생각해?”

“…탑?”

“응.”

고등학생인 한정우는 유서린의 물음에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입장해야지.”

“…왜?”

“모르겠어. 그냥. 꼭 저 안에 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한정우는 앞서 걸었다.

그러면서 가만히 탑을 바라보았다.

나무를 닮은 탑.

그곳을 오르면 무엇이 있을까.

-다시, 만나요.

“…응? 나한테 말 걸었어?”

“아니.”

“그래?”

한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진짜로 탑에 오를 거야?”

“기회가 된다면.”

수더분한 대답에 유서린은 한정우의 뒤를 따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이번엔 내가 지켜줄게.”

“응?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 말도….”

“그래? 그나저나 우리 영어 이름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는 어떤 걸….”

“다니엘.”

“다니엘?”

“어. 네 이름은, 다니엘로 해.”

“나쁘지 않네.”

“나쁜 게 아니라 괜찮은 거야.”

“그래. 그럼 그렇다고 치고. 너는?”

유서린이 싱긋 웃었다.

“내 이름은, 안나야. 다니엘.”

-완(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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