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결착 (7)
[ 다니엘…이로구나! ]
“네게는 불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다.”
정우가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답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너진 대전.
무너진 건물, 잔해.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 버린 그곳에서도 유일하게 온전한 장소.
오래 전 자신이 앉았던 곳이자.
힘을 강탈당하는 것으로 찬탈되어 버린 곳.
용좌.
그곳만이 유일하게 온전했기에, 그는 놈의 집착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가 있었다.
밀려들던 힘과 마지막 기억.
시간의 축을 돌리고, 메아리나 세계수를 마음대로 움직였던 능력.
모든 건.
“이곳에서부터 시작이었지.”
저 자리부터가 시작이었다.
부정의 힘.
그것을 소유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왜 부정의 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건지.
왜 다른 타인이 깨달은 부정을 부정하는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건지.
오래된 기억이 상기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세계수와 메아리가 자신과 뒤엉킨 건 우연이 아니었다.
나뉘었던 힘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었으니까.
마력의 사랑을 받은 자.
마법의 신이라고까지 불렸던 자신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넌 모르겠지.”
정우는 분명히 시간의 축을 얻었다.
어디선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시점에, 필연적으로 그것을 얻었다.
[ 다니엘…! ]
용좌에 앉아 있던 이가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그 주변으로 어둠의 마력이 일렁거린다. 거센 풍랑처럼 그 기묘한 흐름이 정우를 뒤덮었다.
순식간에 모든 힘이 사라진다.
하지만 정우가 정신을 집중하자, 사라졌던 모든 힘이 다시 복구되었다.
[ …부정의 힘. ]
“맞아. 부정의 힘. 네 덕분에 다시 얻은, 나만의 새로운 부정이지.”
부정과 부정을 부정하는 힘.
그 복잡하고 긴 이름들이 뒤섞인 그것이, 정우의 새로운 힘이었다.
정우는 패배했다.
부정하는 힘을 깨닫고 다시 도전한 전투에서, 폭주를 억누르지 못하고 도주해야 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거기서부터였다.
도주를 위해 차원을 열었다.
정확히는 부정의 힘을 부정하는 것으로 차원을 연결했다.
그곳으로 도주하여.
부정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결계를 치고, 모든 부정하는 힘을 쏟아 봉인을 완성했다.
종말의 때를 연상시키던 자신의 세계와는 달리, 이곳엔 빛이 있었고 웃음이 있었으며.
생명이 있었다.
자신은 그 생명이 주는 찬란함에 빠져들었다.
힘으로 군림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졌을 당시.
그때에 깨닫게 된 것이 바로 부정하는 힘이었고.
부정하는 힘은 ‘자연스러운’ 것과 가장 가까웠으니 말이다.
자연스러운 걸 부정하는 힘.
그걸 다시 부정하는 힘.
원상복귀.
당시의 자신이 깨달은 건 바로 그것이었다.
때문에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다.
부정한 힘을 가장 잘 다스릴 줄 아는 건 자신이었기에, 그것을 끊어내고 자신이 다시 품어보려고 했었다.
강탈의 권능 따위는 없었지만.
애당초 자신의 것이었던 그것이 갈 곳을 잃으면 자신에게 돌아올 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결과는 꽝이었지만.’
그가 몰랐던 건 하나다.
자신이 품었던 능력은, 그 어떤 능력보다 파괴적이라는 것.
부정이라는 것 자체가 파괴와 닮은 구석이 많은 단어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게 패착이었다.
능력은 폭주했고.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저 단순한 파괴였으면 나았을 것을….
능력의 폭주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실 물이 썩고.
대지가 흐물거리고.
공기가 사라지고.
건물이 한낱 흙으로 돌아가고.
웃고 있던 얼굴에 울음이 맺히고.
울음이 말라비틀어져 버리고.
결국 남는 건 생명이 아닌, 죽음뿐인.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능력은.
강탈한 자와 본래 주인이었던 자도 몰랐던 능력의 폭주는 세계를 멸망시켰다.
멸망한 세계.
그곳은 진정한 어둠의 영역이었다.
두 세계의 연결점인, 이동 통로를 통해 어둠의 마력이 저 세상으로 넘어갔고.
자신은 그것을 지키며 지내왔다.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수호자(tutelary).
수호신이라고까지 쓰이는 단어가 세계에 붙은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넘어간 세상에서 자신은 신이었다.
부정을 부정하는 힘은, 온갖 긍정만을 담고 있었고.
그건 본래의 만연한 세상을 더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역할만을 담당했으니까.
하지만 정우는 알고 있었다.
온 세상을 뒤엎은 부정의 힘이, 언제고 봉인을 부정하며 이 세계로 넘어올 것이란 걸.
하나의 차원의 문을 열었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다는 의미였기에.
정우는 자신의 실수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해야만 했고.
수호자라는 이름을 세계에 붙이며, 봉인의 강화와 약화를 반복하여 조절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네가 택한 자의 손에 찢겨진 건.”
[ 너의 패배를 감싸지 마라. ]
“언제까지고 너와 실랑이를 할 수는 없었거든. 부정하는 힘이 있다고 해도, 이 세계를 밟는 건 무리였어.”
온 세상을 뒤덮은 부정은 단순히 몇 가지 종류로 지워진다고 지워지는 흔적이 아니었다.
부정을 정화하는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파괴에 익숙해졌던 자신의 능력은, 부정을 또 다른 파괴의 형태로 부정하는 것에만 익숙했을 뿐.
되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무한한 연습 끝에 생명을 피워내고.
생명의 찬란함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부정이란 단어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시들어 버렸고, 부정하는 힘조차 파괴를 동반했으니.
자신이 만든 틈은 물론, 세계가 부서지면서 생길 틈이 여러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게 뻔히 보였다.
그래서 몸을 찢었다.
정신을 분리하고.
육체를 분리하고.
능력을 나누면서.
언젠가 중심이 될 하나의 존재만을 숨긴 채.
나누어진 능력을 받아들인 이들은 하나같이 거물로 성장했다.
때론 인간.
혹은 몬스터.
때로는 지성을 가진 이종족에게 깃들면서 능력은 여러 경험을 습득했고.
분리된 육체는 나무가 되어 대지에 뿌리를 내렸다.
그 막대한 힘을 견딜 수 있었던 육체였다.
세상을 지탱할 정도의 막대한 생명력을 지녔던 육체였기에, 죽은 이후로도 뿌리를 내린 나무는 세계를 홀로 지탱하며 견뎠다.
지성이 생기고.
강인한 육체에 몰려든 마력이 새로운 힘을 발휘하게 되었고.
한 종족의 신으로 군림하게 되며 신성이 생겼다.
파괴의 권능이 사라진 이후, 나무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생명의 기운만을 머금게 되었다.
정령이란 존재들이 탄생한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부정할 수 있었던 힘. 그리고 그것을 내게 전달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
정우는 자신을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둠으로 일렁이는 손아귀의 힘은, 여전히 파괴의 힘이었다.
자신의 것이었지만 폭주한 그것과는 또 다른 부정한 힘.
그러면서도 한없이 닮아 경계면이 흐릿해, 반발조차 하지 않는 그 힘이 손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모든 부정하는 힘을…. 네게 보이마.”
* * *
세계수가 세계수로 불린 이유는, 세계를 지탱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드드득!
그 모든 뿌리는 대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콰득, 쿠르르릉!
온 세계에 뻗어 나간 뿌리는 생명을 움틔우고.
쿠르릉! 쾅!
죽어 버린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파스스!
그렇기에 세계수는 세계수라 불리며, 모든 생명체의 존중을 받는 것이다.
까득!
정우는 이를 갈았다.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부정의 힘은 확실히 엄청났다.
축적이 된 부정의 힘은 세상을 갉아먹고, 부수고, 파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황을 ‘유지’했다.
힘이란 건 이성이 없고, 그저 존재할 뿐이었기에 ‘존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모순에 얽매여 있었으니까.
되찾은 기억.
그렇기에 사용하는 본래의 능력.
분리되고 갈가리 찢겼지만, 하나도 잊지 않은 그 능력을 모조리 쏟아붓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유지.
아니, 소성(蘇醒).
자신의 영역을 넓혀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죽어 버리고 파괴되어 버린 대지를 소성시켜야 했다.
그 작업은 매우 힘겨운 것이었다.
부정의 마력을 유지시키면서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일궈가고.
그 벌어진 영역을 부정하는 힘으로 채워 별개의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
검은 물로 채워진 수영장에 흰 물을 떨어트려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파직, 우웅!
몸속의 고리가 요동을 쳤다.
수많은 고리가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방법이었다.
스스로를 갉아내며.
그 안에 담긴 막대한 마력을 풀어낸다.
그리고 담기는 것은.
자신의 몸속에 남아 있는, 어둠의 마력에 녹아 흩어져 버린 세계수의 잔해.
그것을 꺼내는 건 퀸의 능력이었다.
환상을 실재로 만드는 힘.
그것을 완성시키는 건, 그녀가 각성한 부정하는 힘인 ‘정신’에 있었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제는 정우도 안다.
다니엘의 육체가 처참했던 이유는, 육체가 가진 모든 능력을 세계수에게 넘겼기 때문이었고.
마력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순간을 맞이할 중심이 바로 이 육체이기 때문이었으며.
마법이란 건 마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즉, 다니엘의 존재는 철저히 계획되어진 존재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은 한 가지 사실을 망각했다.
‘기억’이 없는 한, 인간은 얼마든지 자신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천천히 나아가던 발길이 멈추고.
마지막 순간을 넘지 못하고 그저 봉인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했을 때.
그때의 자신은 ‘남은’ 것들이 매우 많았다.
친우들의 도주.
남은 생명들의 안전.
세계수와 쌓던 계획의 모든 줄기는, 안전과 도주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그것에 정신이 팔려 모든 걸 뒤로했다.
바퀴벌레가 나오는 입구를 막는다고, 그 바퀴벌레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 했지만.
그때의 자신은 현명한 척하면서도 친우라는 제약에 스스로가 발목이 잡혀 있었다.
메아리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든 것도.
굳이 처음부터 각성하지 않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만들어 절박함을 만든 것도.
그 실패를 경험한 뒤에 벌인 일이었다.
메아리가 자신의 힘을 다시 찢어 버릴 수 있었던 것도.
세계수와 지식의 신이 시스템의 일부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중 던전에서 다른 존재가 아닌 메아리가 등장한 것도.
“내가 원흉이었단 말이지. 알고 보니.”
모든 게 정우의 계획대로였다.
“이 순간을 위해서….”
[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
“네가 제약을 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 ……. ]
“그것은 본래 나의 힘. 그것을 강탈하는 데 조건이 없을 수가 없지. 너의 영역은 그 대전의 주변이다.”
그래서 그 밖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홀로 대전에 앉아, 모든 것들이 죽어 버린 세계에서 유일하게 숨을 쉬고 있는 게 놈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유였다.
강탈이란 건, 제약이 필요한 강대한 능력이었다.
일정 반경 안에서만 능력이 유지되는 조건이라면, 놈이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된다.
정신을 잃고 폭주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의 본능을 유지하는 것이 그나 자신의 수준이었으니까.
정우는 뿌리를 내리며 말했다.
“그렇기에 기다려라. 네 모든 힘이 사라질 때까지. 무력하게. 무의미하게.”
[ ……! ]
“너와의 결말은, 그 뒤에 짓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