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결착 (6)
긴 세월은 누군가에겐 독이었고, 누군가에겐 기회였다.
적어도 ‘왕’에게 있어서는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기회의 순간이 되었다.
폭주한 능력.
왕은 그걸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
애당초 본인의 능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긴 반발력일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나마 한 가지.
죽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완전히 날아가 버렸던 정신이 들기엔 부족한 시간이 아니었고.
그런 시간이 매우 필요했던 그에게는 엄청난 기회로 다가왔다.
반쯤 정신을 차린 그는 본인을 돌아보았다.
정신을 잃은 사이 모든 감각이 세상을 뒤덮었다.
뒤바뀐 대지의 형태나 말라 버린 개울의 모습이 감각으로 느껴졌다.
거리에는 제한이 없었다.
온 세상이 자신의 것이 된 것처럼, 모든 게 느껴졌을 뿐이다.
하지만 한 가지.
그 모든 것 중에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까마득하게 긴 세월이 흐른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모든 게 파괴된 것 같기도 한 느낌에.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이걸 원한 건 아니었으니까.
도주하던 전대 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런 힘을 또다시 만든 건지, 질투심에 몸서리치다가 정신을 잃었다.
놈을 이기고 싶었고, 놈을 발아래 무릎을 꿇린 뒤에 ‘내가 너보다 강하다’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겼을까?
도주한 걸 잡아서 무릎 꿇렸을까?
아니면….
놓쳤을까?
‘기억이…. 나질, 않는군.’
묘한 허탈함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엄청난 허탈함과 상실감으로 돌아왔다.
누구 하나 대답해 줄 사람이 없고, 무엇 하나 온전한 게 없는 세상.
왕은 빠르게 지쳐갔고, ‘부정’이 만든 힘에 삼켜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끝이라 생각한 세상 속에서 한 가지 틈을 발견한 것은.
다른 곳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봉인된 그곳을 발견하자마자, 그는 생기가 돌았다.
저건 뭐지?
그가 도주한 흔적인가?
그럼 저곳을 따라가면 그를 만날 수 있는 걸까?
이기든 지든, 끝을 볼 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넘는다.’
결정은 빨랐다.
저곳을 넘고, 그의 생사를 확인한 후에 결착을 내겠다고.
아주 미약한 틈.
바다에 찌른 바늘과 같은 틈이었지만, 모든 걸 부정하는 힘은 그 틈을 서서히 벌려 나갔다.
봉인의 힘은 대단했지만, 세상을 멸망시킨 자신의 흠은 더욱 대단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계로군.’
그는 자신의 한계를 느꼈다.
부정의 힘은 온전하다.
아니, 완전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절대 파괴의 힘.
하지만 그 힘을 다루는 자신이 문제였다.
이 힘을 다루는 것만 놓고 보면 자신은 전대 왕에게 패배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으며, 결국 승리하는 자가 강한 자라는 사실만이 유일한 안도였다.
협력자가 필요했다.
이 틈을 벌려줄, 저 너머의 존재.
그는 끊임없이 힘을 불어넣었다.
어떻게 된 세상인지 부정의 힘조차 제 힘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씩.
그리고 끊임없이.
힘을 불어넣고, 또 불어넣었다.
그리고.
보답을 받았다.
* * *
[ 너머의 세계…. ]
“그게 궁금했나?”
흩어지는 기억을 붙잡던 지식의 신이 갑자기 들리는 음성에 화들짝 놀랐다.
구체가 회전하며 틈이 벌어져 눈처럼 상대를 주시했다.
[ 너는…. 세계수? ]
“마왕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 것 같군. 세계수라 하기엔…. 이젠 무리일 거 같아서.”
마왕은 지식의 신을 보며 싸늘하게 손을 휘저었다.
콰르릉!
대기가 요동치며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 감히, 날 대적하겠다는 건가? ]
“시작은 네가 먼저 했지. 이계에서 네 계획에 넘어갔던 걸 생각하면, 그 순진함에 자괴감이 들 정도였어.”
[ 이계가 아니다. 그곳은 내가 가져야 할 땅. 모든 지식을 실험하고 확인할 나만의 거대한 실험실이다! ]
“네게는 그렇겠지. 하지만….”
마왕의 손이 허공을 찢는다.
찢겨진 허공 사이로 만들어지는 게이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지석, 뇌신, 대마법사, 대주술사, 리를 비롯한 S급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리고.
“그 멋없는 머리는 여전하군. 오랜만이야.”
유서린.
그녀는 도끼를 내려놓은 채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 ……. ]
지식의 신은 그런 그들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이들이 갑자기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생각을 거듭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 놈은 일본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
“세이렌의 영토라면 진작 공략했어. 아, 여기선 아닌가? ‘회귀’ 중이니까.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겠지.”
[ 회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
“못 믿겠어? 그거 미안하군. 하지만 우리 대단하신 퀸께서는, 우리 정신을 더 먼 곳으로 돌려보냈단 말이야.”
[ 퀸? ]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지식의 신을 향해 유서린이 지팡이를 뻗었다.
순식간에 맺히는 건, 적의가 가득 담긴 발광체였다.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오는 거. 다니엘조차 불가능했던 게, 가능해졌어. ‘플레이어’ 시스템 덕분에.”
회귀의 순간.
모든 걸 기억하는 세계수가 메아리를 붙잡았고.
메아리는 회귀의 순간, 정우와 연결되어 있는 모두의 정신을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의 축을 비틀어.
전생이나 다름없는 그때의 시간을 불러냈다.
다니엘의 곁에 남아 있던 친구들을.
“그는 이걸 원하지 않았었겠지만…. 넌 우리가 잡아.”
“끝까지 기억 못 한 대가로는 충분하지.”
“…널 찢어 죽이고, 불태워 버릴 거다.”
유서린의 말에 친구들이 으르렁대며 각자의 무기를 틀어쥐었다.
“위험해 보이는 보스로군.”
“…저것만 잡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가?”
“후우, 그 많은 몬스터들을 없앴더니, 저만한 괴물이 나타나기는….”
더불어 S급의 다른 플레이어들까지 가담했다.
기억이 다르고 과정이 다르지만, 플레이어들은 지식의 신을 보스로 여기고 공략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그것도.
G급 던전 ‘꿈’의 연장선으로.
“널 죽일 거다.”
유서린의 싸늘한 선언에 지식의 신의 눈이 분노했다.
[ 감히…. 네깟 것들이? ]
“그래. 우리들이.”
유서린의 말을 마왕이 받았다.
“애당초 시스템을 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 …왜? ]
“그 죽어 버린 지식으로는 답이 안 나오겠지. 이용할 생각에 침만 줄줄 흘려댔으니까.”
유서린의 조소에 지식의 신의 기세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네가 목표가 아니었어. 너란 놈은 그저 최종장으로 가기 전의….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던전의 보스나 다름없는 놈이었다.”
유서린은 그렇게 말하며.
완성이 끝난 마법을 발사했다.
레이저 포와 비슷한 형태의,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분노의 일격이 일직선으로 뻗어 지식의 신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버서커와 성기사.
둘의 능력이 고스란히 담긴.
대마법사의 일격이었다.
“모두, 공격해.”
싸늘한 선언에 모든 S급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불과 얼음, 그림자나 피의 일격 등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엄청난 공격력으로 쇄도했다.
지식의 신의 눈이 처음으로 당혹으로 물들었다.
[ 왜…. 부정의 힘이…. ]
어둠의 마력.
부정의 힘.
그게 먹통이 되어 버렸다.
검은 안개처럼 힘이 뿜어져 나오기는 했지만, 막상 그 실체는 어둠의 마력이 아닌 일반적인 마력에 불과했다.
아주 미약하게 어둠의 마력이 깃든, 평범한 마력.
왜 유서린이 자신을 보스라고 칭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지만.
그의 판단은 늦어 버렸다.
쩌엉!
뒤늦게 방어막을 전개했지만 공격이 너무 강력했다.
휘청거리는 지식의 신을 향해 무자비한 공격이 퍼부어졌다.
유서린은 마왕과 눈을 마주치고선, 가만히 한 곳을 들여다보았다.
“내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를 들어줘서 고마워. 퀸. 아니… 메아리.”
* * *
이곳을 관찰하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왕은 그 순간, 그 눈동자의 주인을 사로잡았다.
강탈의 능력이 눈동자의 주인의 지식을 일부 강탈했고.
자신이 찾던 인물이 저곳에서 ‘신’처럼 군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이토록 초라한 세상에서 홀로 남아 있는데….
네가?
막대한 분노가 세상을 뒤덮었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저 세상에서 발견한 눈동자를 파괴하지 않았다.
[ 이곳엔 네가 원하는 진리가 있다. ]
그 말로 족했다.
눈동자는 그 말에 정신이 회까닥 돌아갔다.
자신의 모든 지식을, 이 기이한 마력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에 쏟았고.
이 틈을 넘어 저곳에 다다르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이따금씩 부정의 기운을 억누르고, 자신의 ‘눈’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으로.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것은 물론, 한 신을 발견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가뜩이나 자신을 짓밟을 정도로 강대한 자였다.
도주했다고는 하나 그 세계를 오롯이 지탱하고 있을 정도의 역량이 되는 존재였다.
부정의 능력이 없어진 이후, 오히려 창조와 생기의 힘이 더 강해진 그것은.
[ 그야말로 창조신이 아닌가…! ]
왕이 그토록 경멸하는 창조의 권능과 맞닿아 있었다.
개벽하듯 창조하는 것이 아닌.
순리대로 흐르게 하는 탄생.
힘을 갈망하고 파괴를 일삼던 그는 그게 못마땅했고.
결국 눈에게 헛된 바람을 불어넣었다.
저것을 찢어야지만, 진리를 탐구할 수 있노라고.
지혜는 없었지만 지식이 많았던 눈을 조종하여 모든 걸 장악해 나갔다.
곳곳에 부정한 힘을 퍼트려 놈의 사각지대를 만들었고.
가장 중요한 자신의 힘을, ‘눈’에게 일부 건네었다.
그 대가로 육체를 잃었지만, 눈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바칠 만한 일이라 판단하고,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눈의 탐욕.
쓸모없고 의미 없는 지식에 대한 탐욕은, 왕에게 있어선 너무도 큰 조력자나 마찬가지였다.
신성을 쪼개는 건 힘겨운 일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시간의 부정.
긴 세월 동안 정신을 잃고 난 뒤에 깨닫게 된 힘이며.
[ 이런 힘을 지녔음에도 패배하다니…. 역시 넌 버러지다! ]
전대 왕이 이미 지니고 있던 힘이었다.
전대 왕은 부정의 힘을 잃었으니, 시간을 되돌리는 건 자신만의 전유물이었다.
그는 시간을 되돌렸고.
그때마다 눈은 자신의 뜻대로.
그리고 본인의 결정이라 믿는 사고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반복 속에서.
눈은 기어이 모든 힘을 찢어내는 데 성공한다.
고고한 정신은 타인의 정신에 기생해야만 하는 서큐버스에게로.
강대한 육체는 한 나무에 봉인하였다.
하지만 눈은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자신의 지식에 존재하지 않는, ‘영혼’이라는 걸 망각했던 것이다.
정신과 육체가 찢기며 나뉘어진 영혼을, 그는 세상 여러 곳에 퍼트렸다.
그 사실을 잊은 눈은 스스로를 진리를 탐구하는 자라고 칭하며.
봉인의 해제에 열중하였으나, 차원을 넘어 완성된 봉인을 해제하기엔 그의 힘이 너무 미력하였다.
때문에 그는 몇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자신을 협조해 줄 여러 인물을 찾았고.
그땐 이미, 나뉘어진 영혼이 각자 신성을 띄기 시작했을 때였다.
절대 신이라 불리기엔 어렵지만,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넘은 절대자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눈여겨본 조력자는 다름 아닌 육체가 봉인된 나무였다.
본능만이 남아 있던 나무가 가지게 된 신성.
강대한 육체.
그것이라면 봉인을 해제할 수 있을 거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틀어졌고.
정신은 또 다른 신성으로 각성하여 새로운 법칙을 탄생시켰다.
플레이어 시스템.
그가 그것에 손을 뻗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덫인 줄도 모르고….”
문득 떠오른 과거를 회상하던 그가, 돌연 들리는 음성에 용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인간이 그곳에 서 있었다.
온갖 부정한 기운을 한 몸에 받으며.
[ 너는…. ]
“내 걸 돌려받으러 왔어. 강탈의 능력 따위는 없어도, 나는 다시금 그 힘을 손에 넣었거든.”
정우가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