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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급 던전의 찬탈자-289화 (289/293)

289화

-결착 (5)

기억이 몰려든다.

일방적인 그 기억의 강물 속에서 정우는 천천히 자신의 과거를 되짚었다.

하나씩 얻어가는 권능.

부정(否定)이라는 이름의 그것들은 분명히 대단했지만, 각자의 아집이 응축된 반편이에 불과했다.

기억을 대가로 힘을 얻고.

육체를 바침으로써 더 강한 능력을 손에 쥐고.

모든 걸 끊어 버릴 각오로 휘두른 검은 스스로의 영혼에도 상처를 입혔으니까.

당시의 자신은 본인의 육체와 영혼. 그리고 마력에 이르기까지 조각나고 있음을 인지했다.

그렇기에 고민했고.

결론을 내렸다.

‘돌아가자’고.

부정(否定)한 것은 한 가지였다.

자신이 가진, 시간의 축.

시간의 흐름을 비틀어 타인과 조금 다른 시간대를 살게 만드는, 그 기이하고 특별한 능력을.

일방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여 반대로 흐르게 만들었다.

그렇게 완성되었다.

회귀(回歸)는.

정우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만 년은 갓난아이의 일생처럼 보일 정도의 긴 시간을 엿보았다.

추억을 되짚는 것처럼 찰나의 순간과 짧은 흐름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몰려드는 기억의 양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그저 어둠의 영역을 공략하는 것에만 능력을 사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의 자신이 머금은 건,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이 ‘남기고’ 간 것이었다.

지식.

회귀를 하면서 지식을 남겨야 했다.

기억이라는 이름의.

경험이라는 이름의 지식을.

서로가 그토록 갈망하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원치 않은 것들을 하나씩 얻은 것이야말로 어둠의 영역과 마력이 가진 진정한 힘이고 대가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수만이 유일하게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억눌리고 힘을 잃고, 하나라는 개념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그럼에도 본래의 자신을 유지하며 타인의 것을 탐하지 않은 건 세계수가 유일했다.

기억과 경험에 집착할수록 자신은 회귀를 반복해서 사용했고.

그럴수록 자신이 받아야 하는 반발력은 정우를 조각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제한적인 능력을 사용하는 자신이었기에 그 반발력은 점차 깊어졌다.

가뭄에 난 골이 아예 절벽이 되어 버릴 만큼.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자신은 처음으로 ‘어둠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았을 당시를 떠올렸다.

무리한 선택이라며 메아리가 반복해서 말리고 또 말렸음에도.

너무나 길게 흐른 시간의 흐름 때문에 외부가 걱정되었던 자신은 기어이 시간을 돌렸다.

반발력에 상처받고, 찢어지고.

그럼에도 되돌아가 다시 한번 계획을 세우고 진입했다.

문제는.

자신이 시간을 돌렸다는 것을 기억했을 때가, 메아리가 깨어난 시점부터라는 것이다.

어둠의 영역을 벗어나면서 기억을 잃고, 잃은 기억 때문에 시간을 돌린 의미가 없어졌다.

천천히 깨어난 기억을 완전히 되찾았을 땐, 다시금 봉인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반복의 실패.

그럼에도 떠올려 보면 무언가가 분명히 달라졌음을, 자신은 깨닫고 있었다.

기억이 없음에도 과거는 달라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을 거듭하며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자신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변하지 않는 존재.

이곳에 와서 뒤엉켜 버린 존재.

가장 크게 변한 건 다름이 아닌 ‘세계수’였다는 것을.

변화가 없다고 생각했던 그가 다른 계획을 세우고 다르게 움직여 변화를 만들어냈음을.

그렇기에 자신은.

‘죽을’ 각오를 다질 수가 있었다.

한 가지 조각만을 남기면.

‘어떤 육체로든 다시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 * *

“…날, 믿고?”

세계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용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세계수를 믿은 건 사실이었다.

정확하게는 세계수의 능력을 믿었지만, 그의 목표가 자신의 목표와 일맥상통하다는 것에 배팅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훌륭했다.

“그렇게 완전하게 부활한 셈이지. 지금은.”

부서지던 신체나 마력은 전성기 때보다 견고했다.

터무니없이 허약한 신체는 강인해졌고, 실수한 마법체계는 새롭게 완성되었다.

자신에게만큼은 전화위복이란 단어가 어울렸다.

“…내 예상을 더 뛰어넘는군요.”

“그래야 하거든.”

“…왜죠?”

“내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하게 생각한 게 없었나?”

“이상한 것?”

“너와 같은 격을 지닌 신들조차 하나의 ‘부정’을 깨닫는 게 전부였어.”

“…음?”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세계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격이 비슷하다는 소리는 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가 비슷하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능력의 총량이야 세계수가 압도적이겠지만, 유지나 관리를 등한시할 수 없었던 세계수로서는 할 수 있는 능력에 제한이 있었다.

그런 자신조차.

‘모두는 하나’라는 개념을 부정한, ‘하나는 모두’를 통해.

오버레이를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그 외의 능력은 영혼의 계약이 뒤엉켜 정우나 메아리의 것을 조금 얻은 것뿐이었다.

단절의 검이나.

정신의 부정이나.

그런 것들은 자신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정우는 아니다.

모든 것들을 담을 수 있으며, 모든 것들을 포용했다.

자신은 왜, 한정우의 전신인 다니엘이 그 모든 것들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계획을 세웠을까.

시간을 되돌렸기 때문에?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것이기 때문에?

아니다.

그저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말이 돼?’

세계수는 자신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책임한 그것이 이해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봐도, 그 시작점만큼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공기가 공기이고, 물이 물인 것처럼.

원소 기호와 조합 따위는 몰라도 공기가 있어야 숨을 쉬고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다는 것처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왜?

그 단어가 생각을 어지럽혔다.

그러다 문득 세계수는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면….’

“왜 그게 가능한 거였지?”

이 사람은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세계수는 물었고.

아주 여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 능력이었거든. ‘모든 것’들이.

“뭐?”

정우가 고개를 돌리며 손을 휘저었다.

“이제 가. 여긴 네가 있을 곳이 못 되거든.”

“…자, 잠깐!”

손을 뻗던 세계수의 모습도 사라졌다.

어둡기만 한 공간.

그곳에 선 정우가 한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곳은 ‘봉인’이 새겨진 장소였으며.

반쯤 열려 이 사태를 초래한 곳이기도 했다.

세계수가 알고 있는 정보는 틀렸다.

지식의 신이 이것을 처음 발견한 건 사실일지 모르지만.

이 봉인을 만든 사람은 자신이었다.

찬탈당한 왕.

“수호자(tutelary)라니. 내가 가지기엔 과분한 역할이었군.”

정우는 줄곧 의아했던 이계의 명칭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아주 쓰게.

* * *

한 세계엔 왕이 존재했다.

그 힘은 세계를 진동시킬 정도였고, 왕은 세상에서 가장 강했다.

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강했지만 왕보다 강하진 못했고, 항상 왕에 대한 질시와 증오가 가득한 인물이었다.

그 인물은 언제고 왕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왕의 힘은 강했다.

왕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왕의 앞에 서면, 어떠한 능력이든 모든 게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부정(否定)의 능력.

그 빌어먹을 능력만 빼앗는다면 왕을 끌어내릴 수 있음을, 그는 확신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끊임없이 계획하며.

왕의 능력을 이길 방법을 모색하던 가운데.

그는 기어이 강탈의 능력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남은 것은 기회뿐.

그리고 그 기회는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왕은 강했고, 왕 앞에 선 모든 이들은 무력했다.

능력을 부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단순히 육체적인 능력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게 바로 왕 앞에 선 자의 몫이었다.

왕은 방만했고.

그는 집요했다.

부정의 힘을 부정하고, 그 힘을 강탈할 단 한 번의 기회.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왕은 모든 힘을 빼앗겼다.

부정의 힘.

그를 최강자로 군림하게 만들었던, 최강의 힘을.

그는 왕이었던 자를 조롱하며, 그의 자리를 찬탈하여 왕의 자리에 앉았다.

그는 왕이었던 자를 죽이지 않았다.

자신이 느꼈던 절망.

자신이 경험한 질투.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하라는 듯, 능력을 잃은 그를 내버려 둔 채 조롱했다.

왕은 여전히 최강이었다.

단지 그 왕이 바뀌었을 뿐.

왕이었던 그는 처참하리만큼 초라해졌다.

능력만이 인정받는 세계에서, 모든 능력을 빼앗긴 그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는 좌절했다.

하지만 나약하진 않았다.

절대적인 능력을 손에 쥐고 있었기에 발전하지 않았지만, 그 절대적인 능력은 그의 재능이었다.

타고난 재능.

그것만으로도 모든 이들을 압도했던 것이 바로 그였고.

그는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재능이 있었다.

압도적인 한 가지의 재능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재능들이 하나씩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깔보던 자 위에 다시 올라섰고.

자신의 자리를 찬탈한 자의 경험을 살려 ‘부정’을 ‘부정’하는 힘을 깨닫기 시작했다.

‘강탈’의 능력을 깨닫기 위해서.

하지만 그는 실패했다.

그에겐 강탈의 재능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힘이었던 부정의 능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본인이었고, 자신의 힘을 강탈했다고는 하나 그의 운용은 자신의 것과는 차이를 보였으니까.

그 틈을 노리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부정의 능력을 상실한 이후, 강해지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기도 했고.

그렇게 강해진 그는 이젠 반대의 입장에서 왕의 앞에 섰다.

조롱하는 왕은 압도적인 승리를 자신하며 능력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부정하는 힘으로, 왕의 능력을 하나씩 이겨내기 시작했다.

한 발을 내디딜 때 호기심의 눈초리가.

또 한 발을 내디딜 때 노력에 대한 조소의 미소가.

그렇게.

두 발, 세 발.

하나씩 내디딜 때마다 왕의 얼굴엔 핏기가 사라졌다.

왕 역시 이전의 그처럼, 절대적인 능력을 손에 넣고 방만해졌기 때문이었다.

왕을 이기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던 그는, 왕이 된 이후엔 그토록 경멸하던 왕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집요했고.

힘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때문에 부정의 능력에 ‘강탈’을 섞었고.

본래 가지고 있던 모든 능력을 뒤섞었다.

그건….

폭주였다.

강탈의 능력이 점점 생명을 착취했고, 부정의 능력이 죽음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의 땅.

두 절대자의 전투는 오히려 세계를 멸망시키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강탈의 능력으로 빼앗았다고는 하나, 부정의 능력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폭주를 다스릴 만큼의 재능도.

그것을 다스릴 이유도 찾지 못한 왕의 폭주에, 그는 발악하며 그것과 싸워 나갔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폭주한 왕만이 오롯이 앉아 있는 멸망한 세계가 되어 버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세계를 잡아먹고 그 외엔 잡아먹을 게 없었던 능력이, 세계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본인들의 세계 외의 다른 차원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서진 차원의 벽을 넘은 건, 그였다.

자신의 모든 힘을 쏟고.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쏟아 틈을 메우고, 봉인해 두었다.

그리고.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뿌리’를 내렸다.

이곳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정신’을 분리시켰다.

“…세계수와 퀸. 나는 육체와 정신, 마력이 분리된…. 한 존재였다.”

정우는 피곤한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봉인을 노려보았다.

지식의 신은 알까.

자신이 그토록 진리를 탐구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지식에 목마르게 된 이유에 대해서.

그 역시 누군가의 눈이었음을.

“이젠…. 끝내자.”

정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반쯤 열린 봉인 속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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