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결착 (4)
‘늦었다!’
원하던 것을 얻자마자 본 저편의 상황에 정우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반으로 갈라져 쓰러지는 유서린.
그 모습에 안나가 겹쳐 보였다.
피를 토하는 메아리와 함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지식의 신이 보였다.
더불어 크기를 줄이며 천천히 메아리에게 접근하는 그것의 모습에서, 정우는 놈이 승리를 확신했음을 깨달았다.
정우는 싸늘한 조소를 머금었다.
검은 공간.
그곳에 손을 뻗어.
주우욱!
허공을 찢었다.
이윽고 드러나는 통로를 통해 정우는 천천히 걸으며.
딱.
손을 튕겼다.
웅웅-!
정우는 기묘한 박동을 느꼈다.
자신의 심장 박동도 아니었고.
마력이 만들어내는 파장도 아니었다.
어둠의 마력.
그것 자체가 정우의 손짓에 맞춰 두근대고 있었다.
[ 말도… 안 된다! ]
그리고 그것은 지식의 신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 왜 이 능력이 반응하는 거냐! ]
단 하나의 능력이 정우의 손짓에 맞춰 반응하고 있었다. 지식의 신의 제어력을 뛰어넘어서.
그것은 그가 유일하게 정우에게서 빼앗은 것이었으며.
유일하게 사용 가능한 지식 너머의 ‘능력’이었다.
자신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규명할 수 없는. 하지만 분명히 사용할 수는 있는 능력.
‘회귀(回歸).’
지식의 신은 저항했다.
그는 회귀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시간의 부정.
그로 인해 얻어진 시간 흐름의 역행.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건지 파악하지도 못했고.
어떤 이유에서 ‘범위’가 지정된 것인지도 파악하지 못했으나.
사용은 가능했던 그 능력.
지식의 한계를 넘은 능력이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권능이기에 그 진리조차 파악하지 못한 그것은.
[ 어떻게…. 네가, 내가 빼앗은 능력을 사용하는 거냐! ]
본래 정우의 것이었다.
모든 걸 강탈한 줄 알았다.
수많은 능력 중에서도 가장 진귀하고 대단한 능력을 손에 거머쥐었으니까.
시간의 역행을 통해 마르지 않는 샘물을 손에 쥔 셈이었고.
그 샘을 통해 끊이지 않는 마력의 대부분을 지구에 집어넣지 않았던가.
플레이어란 결국 자신의 능력을 완성시켜 줄 패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래야 옳았다.
다니엘을 사로잡고, 그의 찢어진 능력의 일부를 손에 넣으면서.
그와 영혼의 계약을 맺은 마야의 능력까지 얻게 되어,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 시스템의 권능을 강탈한 것도.
그 플레이어를 사용하여 또다시 ‘어둠의 영역’을 공략할 속셈이었던 것도.
봉인이 된 그 너머로 보낼 첨병을 삼을 계획이었던 것도.
[ 다, 내 뜻대로 이뤄지고 있었는데…. ]
G급 던전이 유지되고 있음에 그의 부활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설마하니 자신이 버린 종족의 비기를 손에 넣을 줄은 몰랐지만.
언제고 스스로가 조종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플레이어란 범주 내에 존재하니까.
[ 왜 벗어난 거냐! 어떻게 벗어난 거야? ]
지식의 신의 음성이 뭉개지기 시작했다.
노이즈가 끼고.
작아졌던 몸체가 다시 부풀기 시작한다.
저항은 강렬했지만.
본래의 능력은 더욱 강렬했다.
정우의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가 요사스럽게 빛났다.
“예상보다, 준비를 많이 했더라고.”
[ 누가! ]
“내가.”
[ …뭐? ]
“시끄럽다. 지식. 네가 가져야 할 건 내 권능이 아니야.”
정우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푸악, 내뱉었던 피의 마력이 다시금 메아리에게로 되돌아간다.
스르르, 쓰러졌던 유서린의 몸이 다시금 붙었다.
역행(逆行).
어리둥절해하는 유서린이 뒤를 돌아보다가 정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무언가 외치기엔, 그녀의 능력은 너무도 부족했다.
천천히 되돌아가던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역행하기 시작한다.
[ 안…돼. ]
이제는 뭉개질 대로 뭉개진 음성으로, 지식의 신이 허우적댔다.
파앗!
하지만 그조차 ‘권능’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꺼지는 모니터의 화면처럼, 검은 공간에 휩쓸려 사라질 뿐이었다.
쿠웅.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
유서린도 사라지고, 지식의 신도 사라진 그 공간에 서 있는 건.
“…주인님?”
정우와 메아리뿐이었다.
메아리는 그나마도 정우와 영혼의 뒤엉켜 있었기 때문에 버티는 것일 뿐.
회귀의 권능은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무자비할 뿐이었다.
“원하는 건 찾았나요?”
“글쎄. 이게 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나를 구한 것만으로도 성과는 충분하겠지.”
“어떻게 찾으셨어요?”
“영혼의 계약.”
“…네?”
“뒤엉킨 건 우리의 마력만이 아니더라고. 영혼의 계약도 엉켜, 세계수에게도 약간을 손을 뻗고 있었어.”
“세계수…에게도요?”
“네 속에 있는 세계수가 근근이 형태를 유지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영혼의 계약이라….”
“그리고 그걸 이용한 게….”
정우가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나더라.”
“…주인님이요?”
“정확한 건, 돌아가서 이야기하지. 어차피 ‘잊을’ 테니까.”
“…잊다니요?”
“돌아가 있어. 금방, 따라갈 테니까.”
“잠시만…!”
메아리의 모습이 사라진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정우의 눈앞에 나타나는 건.
“세계수.”
“…다니엘.”
“성녀라. 왜 그 모습을 마지막에 유지하고 있는가 했더니, ‘희생 주문’을 사용하고 있었군.”
“원래 이런 용도는 아니었어요. 당신이 패배하면…. 치유하려는 용도였는데….”
“왜 버틴 거지? 대화가 하고 싶어서?”
“…당신. 이걸 알았던 건가요? 마지막 기억은…. 어떻게 된 거죠?”
“안 읽히나?”
“…우리는 서로 뒤엉켰죠. 하지만 우습게도.”
세계수가 묘한 표정으로 눈가를 좁혔다.
“모든 걸 얻어간 건 당신이 유일해요.”
세계수의 능력.
퀸 마야의 능력.
모든 걸 ‘근원’에 가깝도록 가져간 건 정우가 유일했다.
꿈을 타고 넘는 능력.
그건 게이트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정우는 마녀 일족에게서 그 능력을 배웠다.
생각의 한계로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하진 못했지만, 본인의 심상을 자유롭게 연 것을 보면.
“퀸의 능력을 사용하고….”
본인의 능력을 되찾은 것을 보면.
“제 능력도 사용할 줄 아는 거죠….”
세계수는 침음을 삼켰다.
그는 매우 중요했다.
자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든 일의 시작점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지식의 신.
그가 이런 일을 꾸미게 된 것 역시 ‘회귀’를 손에 넣고서부터였으니까.
반복되는 시간.
누적될 지식.
봉인 너머의 세계로 보낼 패를 완성시킬 능력은 그가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것이었으니까.
“이 시스템이란 건 묘하더군.”
정우가 눈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흐릿해지는 성녀의 존재감을 보면서 시스템을 읽었다.
이전까지는 읽히지 않았던 그것이 읽히기 시작한다.
왜 메아리가.
“아니. 마야가 내 힘을 조각냈는지…. 이해가 갔어.”
자신의 힘을 산산조각내서 분산시켰는지, 정우는 이해가 되어 버렸다.
자신의 심상 속.
마지막 나무를 찾으면서.
* * *
‘세계수와 메아리. 그리고 나까지. 이 흐름을 찾는 거야!’
생각의 전환은 곧장 감각으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잊어버렸던 물건 하나의 존재감을 새롭게 일깨웠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것.
바로.
‘아라크네?’
아라크네의 다리로 만든 반지였다.
마력을 실처럼 뻗어내 마녀들의 분신을 조종했던 것처럼.
반지에서 느껴지는 마력이 어디론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지표였고.
커다란 의미의 이정표였다.
정우는 허겁지겁 아라크네의 마력을 따라 움직였다.
이 어둠의 세계는 너무도 신기했다.
메아리와 유서린의 전투는 평범하게 보이면서도, 바닥을 디딜 수가 없었으며 오감이 무너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라크네의 마력 실은 그런 정우에게 미약하게나마 오감을 돌려주었고.
더불어 걷는다는 개념이 아닌 ‘이동’의 개념으로 장소를 한순간에 바꾸어 버렸다.
그런 와중에도 둘의 전투 장면은 스크린처럼 정우를 따라왔다.
초조함과 함께 이동한다는 느낌에 박차를 가했을 때.
“……!”
정우는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다.
메아리의 것보다 더 흐려진 색채.
검은 바탕에 회색 펜으로 그림을 그린 것 같은 테두리.
그럼에도 확실히 존재하는 그것은 분명히 커다란 나무였으니까.
아라크네의 마력은 나무에 연결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나무는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부서지기 직전.
마치 폭탄에 터진 조각들을 이리저리 긁어모아 테이프로 붙인 느낌이었다.
‘…마력실이다!’
그리고 그 테이프의 정체는 바로 마력실이었다.
아라크네.
마녀를 집어삼켰던 그 존재가.
세계수를 따라 올라간 시선 끝에 존재했다.
“……!”
거대한 거미.
그것은 이전에 본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크기로, 세계수의 정상에서 수백 개의 눈알을 번들거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움찔거릴 만도 한데, 정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전과는 다르게 기묘한 감각이 스멀스멀 가슴 속을 채웠다.
‘…아!’
그리고 어렵지 않게.
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부서진 것을 묶는 형태.
그래서 조각나야 할 것을 유지시키는 그것.
각성과 동시에 가지고 있던 능력 하나.
“잔존 마력….”
목소리가 나왔다.
정우는 자신의 음성이 아라크네에게 닿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천천히.
31만 톤의 배만큼 큰 아라크네가 세계수를 타고 내려왔다.
자신을 주시하는 모습으로.
정우는 가만히 놈의 접근을 바라만 보았다.
두려움이 일거나.
반격해야 한다는 반감이 들지 않았다.
그저 잊었던 무언가를 되찾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아라크네의 머리와 정우의 이마가 닿았다.
그 순간 밀려드는 기억과 마력은 정우로서도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방대하지 않은 기억.
방대한 마력.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흩어질 게 분명하지만, 일순간 밀려드는 마력은 분명히 대단하고 위대했다.
그것은 어둠의 마력과도 닮아 있었으며, 세계수의 정령력과도 비슷했다.
하지만 가장 간단히 그 마력을 정의하자면, 정우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었다.
‘마나!’
자신이 정의한 그것.
그것이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듯 정우에게 밀려들었다.
마나를 완성시킨 건.
그리고 그것을 위해 서클이라는 형태를 취한 건 분명히 최고의 선택이었다.
수많은 고리가 반응하며,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넌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젠 우리가 친구라 불러도 될 정도겠지.”
“내가 가진 여섯 개의 부정(否定)은 분명히 뛰어나지만, 난 파괴될 거다.”
“불가능하다. 그 누가 막는 것도…. 나는 내 능력으로 서로 다른 부정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우습지 않나. 메아리.”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결국 나는 천천히 죽어갈 것이라는 게.”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이 있더군.”
“이 나무의 능력. 이걸 이용하면,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서로 다른 나무가 가진 기질이 같아. 꼭 거미줄처럼.”
“이 거미줄을 이용하면, 단 한 번은 날 그대로 붙잡아 줄 거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봉인은 약해질 거고, 저것을 탐하는 존재는 모습을 드러낼 거다. 잊어. 그래도 돼. 결국 여기까지 이끌어줄 건, 그놈일 테니까.”
“내 능력을 나눠주지. 조각난 모든 능력이 한곳으로 모이는 것을 본다면, 눈이 돌아갈 거다.”
“약해지지 마. 네가 해야 할 건…. 날 조각낸 뒤, 단 한 조각만을 품은 채 도망치는 거니까.”
“그때엔 네 뜻대로 해도 괜찮겠지. 나도 다시 성장해야 할 테니까. 성장 시스템. 그 권한의 일부도 넘겨줘. 날 찬탈할, 그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