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결착 (1)
* * *
“…사서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식의 신이 기세가 돌변했다.
적개심과 함께 경계의 태도를 취하고 있던 놈의 기세가 요란하게 퍼졌다.
어둠의 마력을 손에 넣었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 정도로, 어둠의 마력은 놈의 감정에 동조하여 요동을 쳤다.
[ 악의(惡意)가 넘실거립니다. ]
문득 그런 메시지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니, 깨어졌다.
플레이어의 시스템조차 이곳을 온전히 뚫고 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놈에게 남은 건 악의(惡意)뿐.
헤치고 헤쳐서 상대를 멸살하고자 하는 단 한 가지의 감정만이 정우의 전신을 저릿하게 자극했다.
[ 네가…. ]
파르르 떠는 구체 사이로 어둠이 몰려들었다.
요동치는 기파와는 다르게.
조금 더 짙은… 어떠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육체?’
그 형체는 마치 육체의 그것과 비슷했다.
팔과 다리, 몸통까지.
구체를 머리로 형성한 육체는 거인과 같았다.
하지만 정우는 그 거인화에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머리에서 이어지는 목은 급속도로 두꺼워져, 크고 넓은 몸통과 이어져 있었고.
두 개의 팔은 두꺼운 몸통에서부터 점차 얇아지며 길고 낭창거렸다.
두 개의 다리는 두꺼우면서도 넓적해 대지를 딛고 이기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으나.
전체적으로는 기묘한 모양새였다.
거기까지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터.
하지만 정우는 그 기묘한 모양새가 주는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놈이.
“…세계수를 흉내 낸 거냐?”
무엇을 탐하였는지.
신이라 불린 여러 존재들 중에서도 세계수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실제로 대륙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며, 정령이라는 존재들의 모태가 되었고.
대륙 곳곳에 퍼트린 묘목을 통해 생명체에 안정적인 공간을 생성시켰고.
엘프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왔다.
긴 세월과 방대한 마력.
그로 인해 정령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변화하기까지 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세계수야말로 가장 신이라는 단어에 적합한 존재였다.
지식의 신이 탐한 건 지식뿐이 아니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 그깟 오래 산 나무보다야 내가 더 아는 게 많다! ]
놈의 가지와 같은 팔이 크게 휘어졌다.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느려 보이던 팔은.
“……!”
어느새 정우의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빨라!’
정우가 이를 앙다물며 팔을 교차했다.
어둠을 두른다.
굳이 ‘부정의 검’을 공격의 형태로만 사용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부정함을 자르는 그 검의 능력을 자신의 팔에 두른 정우는.
콰아앙!
“…커헉!”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베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거센 통증이 자신을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왜?’
계산이 달랐다.
격통 가운데에서도 생각을 정리한 정우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충격의 여파로 한 차례 비틀거린 정우의 손아귀에서 검이 형성된다.
검고 짙은 어둠의 검은 마력을 머금고 거대해졌다.
그 크기는 지식의 신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세를 잡자마자 정우가 검을 내리쳤다.
‘벤다!’
단번에 놈을 무력화시킬 요량으로 전력을 다했다.
‘……!’
하지만 휘두른 검은 그 어떤 것도 베지 못한 채 애꿎은 바닥만을 내리칠 뿐이었다.
‘관통했어?’
바닥의 어둠이 밀려났다.
정우는 상체를 비틀며 검을 위로 올려쳤다.
베고, 또 베고.
‘어떻게….’
[ ‘지식’이 없는 자의 결말은 변하지 않는 법이지. ]
지식의 신이 툭하니 말했다.
조롱기가 다분한 음성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정우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패배했던 상황이 바로 이것이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황.
검을 치우고, 마법을 사용해도.
염동은 물론, 어둠의 마력을 이용한 그 어떠한 공격을 가해도 놈은 모든 걸 ‘부정’한 것처럼 어떠한 공격에도 면역이었다.
마치 유령처럼.
‘생각해…!’
놈의 움직임은 거칠었다.
분명히 전투에 익숙한 형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플레이어란 시스템의 권한을 일부분 지녔던 존재.
더불어 모든 걸 관찰하여 지식으로 쌓았기에. 플레이어의 능력을 고스란히 사용하고 있었다.
여러 스킬이 조합되고.
그 능력은 지식의 신의 움직임을 아득한 경지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전생의 자신은 저것을 넘지 못했다.
하물며 플레이어란 시스템조차 없어, 지금보다 더 조악한 형태의 공격을 일삼았던 놈을 제압하지 못했다.
결국 놈이 가진 비밀을 파헤치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면역.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의 비밀 말이다.
자신이라면 여기까지 알아내는 건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부딪치면 알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저 비밀이 어둠의 마력과 연결되어 있을 텐데….’
부정(否定)의 능력.
놈 역시 어둠의 영역에서 무언가의 성과를 얻어낸 건 분명했다.
자신이 얻은 것과는 다른 부정(否定).
그게 저 면역이라는, 유령과 같은 형태의 원인일 터였다.
‘그러고 보면….’
정우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짓쳐드는 검은 안개의 공격을, 정우는 바닥을 구르며 다급히 피했다.
그나마 지면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이 너무도 다행인 순간이었다.
격랑에 휘말려 이리저리 흔들리던 정우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얻은 부정(否定)은 뭐지?’
신위(神威)를 지니고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어둠의 영역에서 스스로의 부정(否定)을 얻었다.
부정한 기운이라 불리는 어둠의 마력을 이기기 위한 깨달음.
묘목을 중심으로 최후의 심득을 남긴 신들의 것은, 이미 자신이 취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 봐도.
‘…내 것이 없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놈의 공격을 빗겨냈다.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욱신거렸다.
‘…익숙해지는 건가?’
놈은 저 거대한 몸체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더불어 플레이어들의 스킬까지도.
화염이 보이진 않지만, 넘실거리는 어둠의 마력이 마치 불길처럼 보였고.
날카로운 화살처럼 변하기도 했으며, 사방을 누비다가 안개처럼 떨어져 내리기도 했으니까.
‘지속시간이란 게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패배하는 건 나다.’
그렇기에 중요해졌다.
이 순간.
자신이 떠올린, 자신만의 부정(否定)이.
‘찾아.’
그건 마지막 기억과도 연결이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기억을 되찾은 자신이,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는 기억.
그때와 비교하여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실력을 가졌음에도 끝내 얻지 못한 기억.
그것이 필요했다.
‘…누군가가 시간을 벌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기에 아쉽기만 했다.
왜 이전엔 생각하지 못했는지.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그것들이 실제로는 자신이 얻은 게 아닌, 타인의 것을 계승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속이 답답했다.
‘여유가… 없다.’
문제는 여유였다.
자신의 것을 되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지금은 불가능했으니까.
‘…아차!’
생각이 너무 길어졌다.
정우는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온 공격에 당황했다.
그사이 놈은 자신의 능력에 조금 더 익숙해졌다.
그 간극이 정우의 예상보다 더 좁혀져 있었다.
‘…이건, 못 피해!’
자신을 공격하는 순간.
그때만이라도 공격하기 위해 마력을 움직이던 정우는.
까앙!
“……!”
지금까지 들린 적이 없던 소음이 자신의 귀를 자극하는 것에 눈을 부릅떴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온힘을 다해 놈의 거대한 팔을 막아내고 있었다.
“…유, 서린?”
그녀의 등장은 단 한 번도 예상해 본 적이 없는, 기적 같은 것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뒤편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건 메아리였으니까.
“이곳에는 어떻게…!”
질문을 던지던 정우가 멈칫했다.
기를 쓰며 이를 앙다물고 있는 유서린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며 자신을 향했을 때.
어딘지 모르게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전해지는 것만 같아서.
그렇기에 정우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안나?”
메아리가 주먹을 쥐며 작게 환호했다.
정우가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으로 존재를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신이 지녀야 하는 부담은 반감되었다.
그런 메아리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우의 시선은 유서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왜 그녀의 모습에서 안나가 보이는 건지.
왜 그 눈빛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지.
“…집중해!”
그런 정우를 향해 유서린이 소리쳤다.
“…‘마야’가 막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놈의 능력은 그녀를 뛰어넘으니까.”
“……!”
마야라는 단어에 정우는 다시 놀랐다.
‘진짜로…. 유서린이 안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런 의문에 확답을 주듯, 안간힘을 짜낸 음성으로 유서린이 외쳤다.
“다니엘!”
이름.
그것으로 족했다.
어떻게 이중던전과는 연관이 없는 그녀가 안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대화하기로 하자.’
뒤로 미뤄둔 채.
정우는 유서린을 향해 작게 끄덕였다.
희미한 미소.
유서린이 할 수 있었던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다시금 안간힘을 쓰며 집중하기 시작한 그녀의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둠의 마력.
하지만 그 마력의 느낌은 메아리의 것과 비슷했다.
[ 메아리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
[ ★o(・д´・+)9” ]
간만에 보는 이모티콘.
정우는 그녀가 대부분의 여력을 유서린에게 쏟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유가 없다.
그게 이모티콘을 타고 전해졌다.
정우는 곧장 뒤로 물러났다.
[ ••••••! ]
지식의 신의 음성이 뭉개지면서 들렸다.
그와 동시에 정우는 자신의 정신이 한 단계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메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힘이었다.
‘정신세계!’
그녀는 또 다른 정신세계로 자신을 던지고 있었다.
이모티콘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음에도, 그녀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정우의 선택을 지지하고 나섰다.
다른 누군가도 아닌.
자신의 심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기꺼이!’
정우는 파르르 떨리는 구체를 노려본 후, 눈을 감았다.
서서히 정신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은 짧았지만, 모순적이게도 영겁 같았다.
그렇기에 문득 감각이 변하여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의 감각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
‘…왜 그대로 있는 거지?’
거대한 덩치의 지식의 신.
그 앞을 가로막은 유서린.
그리고 그녀의 뒤편에 선 메아리까지.
모든 것이 자신이 눈을 감기 전과 거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정을 찾는 방법 이전에, 유서린에게 물리력을 전해준 메아리의 방법을 습득하고자 그녀를 불렀지만.
“메아리, 내게 그 능력을 알려줘.”
놀랍게도 메아리는 그의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의 정우가 다급히 다가가 메아리를 짚었지만.
후웅.
“……!”
자신의 손은 빈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마치 유령이라도 잡는 것처럼.
그제야 정우는 깨달았다.
그녀의 심상과 자신의 심상이 연결되어 있음을.
자신이 보는 건, 거울 너머의 세상이라는 것을.
정우는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의 심상에서 보았던 것.
그리고 자신의 심상에도 있어야 하는 것.
정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것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