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꿈으로의 초대 (2)
“드래곤에 던전? 그것도 G급이라고?”
대마법사는 지금의 사태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대신하여 가장 강대한 세력인 미국 플레이어들을 움직이고 있던 뇌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언뜻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 자신을 휩쓸었던 기억.
깨고 나면 잊어버리는 꿈처럼 잔상만이 남아 있던 그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질.”
“공간이동? 아니. 탑 자체가 게이트에 휩쓸린 건가?”
“질!”
“…왜?”
정신없이 탐구하던 대마법사가 뇌신의 부름에 인상을 구기며 시선을 마주쳤다.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기억?”
대마법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무슨 편린 같은 것이 떠오르는 느낌이 있었다.
이 사태에 정신을 집중하다 보니 파악하지 못했지만.
“…기억이라. 맞는 거 같은데?”
떠오르는 기억이 있긴 했다.
“익숙하지 않아?”
“어디가? 여기가?”
그녀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약간?”
그제야 그녀의 표정도 굳었다. 물론 밝았던 적도 없지만.
확실히 이곳은 눈에 익었다.
반쯤 솟구치다 부러진 탑.
그 주변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크고 작은 집들.
방사형으로 퍼진 도로와 중간중간에 만들어진 작은 공원들.
굉장히 계획된 도시였지만, 이 형태는 중세의 그것과 흡사했다.
대마법사는 어딘지 모르게 이곳 어디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것만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도시는 고요했다.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유령도시.
곳곳에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온전한 형태의 기이한 도시에 들어선 것은, 이계인이 아닌 지구인들이었다.
대마법사는 그 사실에 묘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사라졌어.”
“아이? 음…. 그래. 그런 것 같아.”
뇌신 역시 기묘한 감각에 휩싸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느낌.
아니, 무언가를 잊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매우 중요한 무언가를.
“적이다!”
“몬스터다!”
그때였다.
성벽에서 밖을 경계하던 이들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졌다.
“원거리 딜러!”
물론 모든 플레이어들이 능수능란한 건 아니었다.
재능이 없어 길드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제야 막 각성한 자들도 있었으니까.
플레이어들은 그들을 분류했다.
안쪽에 배치하고, 각종 던전으로 단련된 베테랑들을 외곽에 배치했다.
각자의 무기를 틀어쥔 채 몬스터들의 접근에 대처했다.
어느 시점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몬스터의 수는 많았다.
모든 방위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는 기가 질릴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플레이어들 역시 역전의 용사였다.
수많은 던전을 처리했고, 승리하여 지금의 위치를 거머쥔 자들.
지시는 빨랐고, 공격은 더욱 빨랐다.
피잉.
화살이 날아가고.
콰앙!
마법이 작렬한다.
수많은 형태의 스킬들이 몬스터들을 노리고 쏘아졌다.
“…어?”
그리고 깨달았다.
이 사태가 자신들에게 최악의 형태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성장한다! 이놈들 잡으면 성장이 가능해!”
몰려드는 몬스터는 많았다.
플레이어들은 눈에 불을 켜고 스킬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마력을 아껴라! 다들 로테이션을 준비해! 그리고 가장 등급이 낮은 몬스터들이 몰려 있는 방향을 찾아!”
몇 차례 공격 후 내려진 지시는 사뭇 계획적이었다.
“근거리 딜러들과 탱커! 한 문을 잡아!”
커다란 도시인 만큼 정문을 제외하고도 사방으로 문이 나 있었다.
오히려 크기가 작아 문을 열어도 들어올 수 있는 몬스터의 수가 제한이 될 정도였다.
방어에 있어서는 최적의 장소.
입장과 동시에 지형을 파악하고, 지형을 이용하여 몬스터를 공략해야 하는 플레이어답게 노련했다.
“F급이 상대할 만한 몬스터들도 있어!”
“그쪽에 F급들을 몰아! 등급별로 다시 분류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거리 딜러는 신이 나서 스킬을 사용하며 성장의 맛에 빠졌고.
근접 딜러와 탱커들은 문 하나를 열어 놓으며 몬스터들의 접근을 반겼다.
E급과 F급 플레이어들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며, 성장의 맛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울컥.
“…괜찮아?”
유서린이 메아리를 부축했다.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메아리는 힘이 축 빠진 듯 유서린에게 힘없이 기댔다.
“…괜찮, 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아, 유서린은 메아리를 바닥에 눕혔다.
“상황은 나아졌어. 네가 ‘정신’을 집중시킨 덕분에 일사불란해.”
빠른 진행.
빠른 적응.
모든 건 메아리의 능력 덕분이었다.
꿈을 조정하는 능력이 빛을 발한 덕분이었다.
“…다행, 이야.”
메아리는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이 모든 플레이어의 정신을 어루만진 여파는 상당했다.
반발력에 몸을 떨면서도, 메아리는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서진 청탑의 옥상에서.
“…저 기술은, 로이군.”
“제이도 있었어.”
“…아아. 아버지가 솔라인일 줄이야!”
“저건…. 번개검?”
지상을 내려다보는 유서린의 목소리가 여러 감정으로 물들었다.
흐릿하던 기억이 온전해진다.
이곳에 오는 순간, 이전의 자신이 확실하게 덧씌워졌다.
안나.
몇 남지 않은 대마법사였으며, 다니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목숨을 바쳐서 그를 구한 자.
‘그게 바로 나였어.’
유서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친구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그들도 자신처럼 기억을 되찾았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모습으로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었다.
스킬과 능력.
전혀 다른 체계였지만 어쩜 이렇게 비슷하게 닮았는지.
유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야.”
“메아리, 라고 불러.”
호흡을 가다듬은 메아리가 정정했다.
“전장을 옮긴 것까지는 좋아. 근데…. 승산이 있어?”
이곳으로 오기 전에 그녀는 메아리의 설명을 들었다.
다니엘.
아니, 한정우가 빼앗긴 권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부정의 능력을 얻은 그였지만, 그만의 부정의 능력은 검, 정신 따위와는 궤를 달리했다.
시간의 축.
자유자재로 시간을 비틀고 조종하는 능력이 바로 한정우가 빼앗긴 능력이었다.
때문에 몬스터의 수는 무한하다.
지속적으로 시간을 돌리기에.
죽어 버린 몬스터가 부활하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무한한 몬스터들을 상대하기엔, 플레이어는 한계가 명확했다.
제아무리 교대로 전투를 벌인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쉬어야 했으며.
먹어야 했으니까.
“…조금만 더 쉬면, 나도 이곳을 진정한 G급 던전으로 만들 수 있어.”
“진정한 G급 던전?”
메아리가 파르르 떨리는 눈가로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성장. 오로지 성장만을 위한 공간! 내가 만든, 군대의 양성소.”
유서린이 멈칫했다.
G급 던전은 그 목표가 명확했다.
일반인을 플레이어로 각성하는 것.
도중에 재능을 선별하고, 그에 맞는 시련을 던져주며.
그것을 이겨내는 것으로 각성이라는 것을 보상으로 던져주었다.
그 목적이 다시금 되새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주인을 죽인 자의 영광을 찬탈하고 싶어 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법칙을 만들 거야. …그렇게 되면 놈도 내 의도를 알아차리겠지.”
“지킬게.”
유서린이 도끼를 틀어쥐었다.
그 어떠한 몬스터가 오더라도 지킨다.
그런 의지로 굳건하게 메아리의 옆에 섰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메아리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주인을 도우러 가자.”
한정우의 얼굴을 떠올린 유서린이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든 걸 끝내기 위해서….”
“모든 걸 끝내기 위해서.”
단단하게 말하는 유서린의 음성을 들으며, 메아리는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그 생각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 …안나.’
그녀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기로.
* * *
오색찬란한 빛들이 이리저리 깨져 있었다.
완벽했어야 할 그것들은 충격을 받고 뒤틀리고 비틀려, 본래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게 변해 있었다.
‘…시스템이다!’
정우는 저 빛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시스템.
조각모음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시스템의 조각들이 깨어져 부유하고 있었다.
정우는 그것들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조각들을 맞추는 건 수만 피스의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았다.
심지어 이건 뒤틀리고 비틀려 도무지 그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었으니, 원형대로 조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낙담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던 보상의 흐름을 따라 이곳에 도착했다.
즉, 이곳이 플레이어에게 보상을 주던 시스템의 중심지라는 소리였다.
깨지고 비틀렸어도.
역할만큼은 분명히 해내고 있다는 소리.
그렇다면 일은 간단했다.
‘보상의 흐름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 돼. 다행히 아직도 보상이 끝나지 않았어. 미약하지만… 이어진다.’
친구였던 이를 죽인 대가가 얼마나 많은지, 아직도 소소한 보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흐름을 따라, 연어가 강물을 가르듯 거꾸로 되짚어 올라간다.
염동으로 파편을 모으고.
중력마법으로 그것들을 고정시켰다.
하나씩.
구슬을 꿰듯.
정우는 차분히 흐름을 꿰뚫고 조각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도무지 원형을 알아볼 수 없던 그것에도 어느 정도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조각 자체가 뒤틀린 것도 많아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정우는 계속해서 모든 조각들을 맞춰나갔다.
어느새 보상의 흐름이 끊겼지만.
한 번 각인된 흐름을, 정우는 놓치지 않았다.
마력 컨트롤.
마력 감응력.
마력의 사랑을 받는 자인 정우의 감각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이미 사라진 흔적조차 읽는 경지에 다다랐다.
그 결과.
‘…부족해.’
모든 조각을 하나로 잇는 데 성공했다.
그렇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조각의 수가 부족하다는 것을.
누군가가 한 입 베문 사과처럼, 조각이 비어 있었다.
정우는 어렵지 않게 조각의 위치를 파악했다.
‘지식의 신.’
놈이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것만 가지고 온다면.
시스템을 원상태로 완성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비틀린 것이야 모양을 맞추며 다시 거꾸로 비틀면 그만이니까.
정우는 기감을 펼쳤다.
의외로 이곳에선 마력의 감각이 유지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마력을 사용하고 있었군.’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어느 반경을 넘어서자 마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어둠의 영역이다!’
정우는 그곳으로 이동했다.
과연 검은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어둠의 마력이 보였다.
얇고 투명한 막에 가로막힌 것처럼 이곳으로 접근하지 못하곤 있었지만, 마치 들끓는 용암이나 태양의 표면처럼.
검은 물결이 넘실거리며 이곳의 영역을 일순간 침범했다가 후퇴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우는 그게 지식의 신의 마력임을 직감했다.
시스템의 온전한 강탈.
그게 바로 놈이 노리던 것이었으니까.
이 시스템을 만든 메아리나, 이 시스템을 변형시켜 이용한 지식의 신이나.
둘의 목적은 공통적이었다.
바로 군대의 양성.
마력이란 것을 모르고 있는 지구인을 변화시켜 마력을 깨닫게 만들겠다는 목적만큼은 둘 다 동일했다.
하지만 그 병력의 용도만큼은, 둘은 첨예하게 달랐다.
메아리는 지식의 신을 치기 위해서.
지식의 신은.
‘어둠의 마력에게 바치기 위해….’
봉인을 지워 버리기 위해.
봉인 너머의 세계.
놈은 여전히 그 갈망을 지워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우가 느끼기로는.
그게 바로 놈의 유일한 패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