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최후의 용 (8)
정우는 기억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
그 누구도 자신의 곁에 없었던 그 순간을.
어둡고 축축하며.
비릿하고 차가운 공간의 감각이 다시금 몸을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어디서부터 경계가 무너졌을까.
어디까지 무너진 걸까?
이 법칙은…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정우는 침음을 삼켰다.
마력이 회복되지 않은 아무르타트는 정우의 공격에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최후의 용.
그리고 지식의 신의 최강의 눈.
그런 것치고는 허무하리만큼 밀리고 있는 그였지만, 막상 소환진에 다가서는 것만큼은 기를 쓰고 막아댔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완성된다!’
소환진이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완성되는 소환진으로부터 트라우마를 자극할 만한 기운이 뿜어졌다.
눈이 뽑혀 보지 못하고, 손목이 잘려 느끼지 못하고, 마력이 사라져 무엇도 감지하지 못하는 상황.
자신의 최후.
그때의 감각이 정우를 휩쓸었다.
‘같은… 공간이다.’
때문에 정우는 알았다.
이 소환진이 그때와 같은 공간을 불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그리고.
‘으득, 이번엔 다를 거야.’
자신도 그때와는 다르게 허무하게 패배하지 않도록 준비를 했다는 것을.
이윽고 완성된 소환진으로부터 밤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것은 어둠이었다.
밤하늘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검고 검은 물감이 하늘에 뿌려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둠이 도래했다.
정우는 거리를 벌렸다.
‘적응해야 해.’
지금 필요한 건, 아무르타트를 무너트리는 게 아니었다.
세상을 뒤덮기 시작한 저것에 적응을 하는 것이었다.
흐읍.
아무르타트는 어둠의 안개가 자신에게 닿자마자 크게 호흡했다.
커다란 동체가 부르르 떨린다.
쾌감에 몸서리치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 같기도 했다.
‘부수는 건 불가능해.’
어둠의 마력을 뿜어내는 소환진을 부수는 건 불가능했다.
‘그때와… 같은 짓을 또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남는 건, 공략뿐.
만 년의 시간 동안 공략하고 또 공략하여 기어이 봉인했었던 그때와 같은 짓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정우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방법을 고민하던 정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소환진으로부터 무언가 익숙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검은 구.
“…지식의 신!”
자신의 영역으로 숨어 버린 지식의 신이었다.
하지만 그 모양새가 조금은 이상했다.
구체라 상하좌우가 구별되지 않는 형태였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소환이 되지 않도록 발버둥치는 형국이었으니까.
[ 왜, 날 소환했나! ]
결국 몸체 대부분이 소환진 밖으로 빠져나온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놈의 의지가 아니라고?’
정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 소환은 놈이 예상한 사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르타트는 그를 끌어냈다.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테니 궁금하지도 않지만, 한 가지 이유만큼은 정우의 뇌리를 가득 채워 버렸다.
‘왜?’
이유 말이다.
지식의 신의 반응은 정우의 예상과는 달랐다.
오연한 표정으로, 진짜 신처럼 강림하는 것이 예상된 태도였으니까.
하지만 막상 모습을 드러낸 지식의 신은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 태도 역시 심상치 않았다.
[ 왜 그릇된 선택을…! ]
탈력감에 휘청거리는 아무르타트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는 지식의 신의 모습은.
마치 좀비를 피해 벙커에 숨었는데 누군가가 그 문을 열어 버린 느낌에 가까웠다.
그 순간.
정우는 어둠의 마력으로 몸을 던졌다.
화악!
온 세상이 검게 변하고, 시야에 잡히는 건 사라졌다.
마력감지 능력 역시 사라져 버렸다.
지식의 신의 모습도.
아무르타트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건 마력감지 능력뿐이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탈력감.
마력 자체가 증발이라도 한 듯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물론 그땐 결말에서나 본 상황이었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둠의 영역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마력이 사라지자 남은 건 육체적인 능력뿐이었다.
체력과 근력.
‘근데 예상보다 더 버틸 만한데?’
순간적으로 의아해했던 정우는.
‘…아!’
갑작스럽게 온 깨달음에 탄성을 삼켰다.
근력 : 89 체력 : 92
‘플레이어!’
플레이어의 능력.
상태창에 드러나는, 신체강화의 증거.
플레이어가 되기 전에도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엄청난 운동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정우였지만, 지금은 그 궤를 달리했다.
마력이 성장에 개입한 것만큼은 확실해 보이지만, 이미 성장된 근력과 체력은 마력 제약의 이 순간을 훌륭하게 벗어났다.
그리고 그건, 정우에겐 예상치 않은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근육이 폭발적으로 지면을 밀어낸다.
놈들의 위치는 가늠이 되질 않지만, 단 한 가지.
뛰어들 때의 방향만큼은 그대로 유지한 채 올곧게 나아간다.
‘마력이 내 몸을 개조시켰다면….’
그러면서도 정우는 마법사적인 탐구로 한 가지 추론을 이어간다.
마력이라는 수치를 제외한 마력이 신체능력을 향상시켰다.
던전을 공략한 보상.
그 모든 건 마력으로 이루어진, 마력의 부산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육체에 녹아든 마력을 반대로 끌어서 사용하는 건… 가능한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시스템이 변했다.
던전을 클리어해야지만 보상을 받는 시스템에서, 게임과 같이 경험치를 실시간으로 적용받는 시스템으로.
‘…이것까지 예상했다면, 세계수는 ‘예언’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그건 기회였다.
실시간이라는 건 말 그대로 업데이트와 다운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소리였다.
즉.
‘소득을 통해 원리를 파악해서, 그 소득의 형태를 변환시키는 게….’
정우는 눈을 빛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능하다는 소리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정우는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했다.
알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쓸려 나간 상황에서, 자신이 그런 시스템의 순간을 마주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였으니까.
화악!
어둠이 밀려나고.
어둠 속에서 유일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존재가 보였다.
구체.
그리고….
[ ……! ]
푸욱, 콰득!
[ …다니엘! 이 빌어먹을 놈이 지금 무슨 짓을! ]
자신의 등장에 화들짝 뒤로 물러서는 구체를 대신하여 가만히 서 있던, 최후의 용.
아무르타트.
정우는 그의 눈에 지팡이를 박으며, 생명을 불태웠다.
생겨나는 마력이 지팡이를 타고 용의 뇌를 헤집는다.
속에서 터져 버린 폭발에 용의 한 눈이 까무룩 뒤집어지고, 거대한 동체가 휘청거리더니 바닥으로 쿵 쓰러진다.
파르르 발작하듯 경련하던 놈의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
[ 안 돼! ]
막대한 보상이 밀려들었다.
* * *
세상이 뒤바뀐다.
이리저리 빙글 회전하는 시야 속에서, 흐릿한 무언가가 점차 또렷해졌다.
멀고 먼 곳에 있던 장면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것처럼.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기억이 천천히 떠올랐다.
“…….”
유서린은 몇 차례 눈을 깜빡였다.
꽤나 선명한 꿈을 꾼 느낌이다.
그만큼 그 기억이 자신의 기억이라는 것에 대한 감각은 옅었다.
하지만.
“…마야?”
눈앞의 존재의 모습이 변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존재로.
꿈속의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친구의 모습으로.
“…하아.”
메아리는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반신반의했던 세계수의 말이 사실로 드러났다.
저 먼 곳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자신의 수면 아래의 무의식과 비슷했고.
주인의 존재감이 한순간 흐려진 것으로 보아, 어둠의 영역에 발을 들였음을 직감했다.
시간이 없었다.
“안나. 잘 들어.”
“…안나. 안나, 안나….”
유서린이 과거의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이름을 곱씹을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반복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되뇌었다.
“시간이 없어. 기억을 찾아야 해.”
“…기억을? 무슨 기억을?”
이 기억이 자신인지 아닌지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마야를 알아본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게 진짜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다니엘이 위험해.”
“……!”
그리고 메아리가 선택한 단어는 정답이었다.
다니엘.
그녀가 구하고 싶었던 인물.
“…어디야!”
그녀의 기세가 바뀌었다.
메아리에겐 익숙한 기세를 담은 그것은, 버서커의 기운과 만나 보다 소름 끼치게 변해 있었다.
대마법사 안나.
그녀는 메아리가 대답도 하기 전에 마력을 퍼트렸고, 다니엘에 미치진 못했지만 천재로 이름을 날렸던 존재답게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을 감지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라면, 공간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
“…왜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지?”
유서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꿈속에서의 기억은 확실했다.
유년시절부터 최후의 순간까지.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특히나 과거의 자신이 재능을 떨쳤고, 가장 자신이 있었던 분야인 마법에 대해서는 이론이나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마법은 사용되지 않는다.
마력을 움직이고, 좌표를 계산해서 마법을 전개해도.
검증을 위해 간단한 라이트 마법을 전개해도.
“…왜?”
마법은 사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부정’했으니까.”
“뭐?”
가만히 지켜보던 메아리가 말했다.
그녀에겐 다니엘이고, 자신에겐 한정우가 된 사람이 위험한 건 사실이었다.
어둠의 영역에 다시 발을 들이는 건 위험했으니까.
특히나 빼앗긴 ‘권능’ 때문이라도 더더욱.
그렇기에 시급한 순간이었지만, 안나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는 건 더 중요했다.
그녀가 키(Key)였으니까.
안나는 최후의 순간에 마법을 부정했다.
대마법사의 마법 부정은, 어둠의 영역의 부정에 가까운 힘을 발휘했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여 다니엘을 살리기를 바랐고, 마지막 순간에 다니엘을 죽음에서 건져내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 말하면.
“…영혼을 유지시켰어.”
“영혼? 그게 무슨 소리지?”
다니엘의 영혼을 놈들의 손아귀에서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숨겼다.
“영혼의 계약을 맺은 내 꿈속에.”
“…그게 가능해?”
“기억을 되찾은 게 온전하지 않아서 그래. 시간이 지나서 온전히 모든 기억이 떠오르면, 기억날 거야.”
메아리의 단정 어린 말에 유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적응되지 않았지만, 본능은 이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내 꿈속의 봉인은 주인과도 연결되어 있어.”
정우는 펜던트를 통해 어둠의 마력을 타고 해킹을 진행했다.
그러다 연결된 장소에서 새로운 기억을 되찾았다.
어둠의 마력이 봉인이 된 장소가 메아리의 깊은 정신 속이라는 것과 그 마력이 실체가 되어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까지.
그건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으나, 단 한 가지가 빠졌다.
“…봉인을, 다니엘의 꿈속에서도 풀 수 있는 거구나.”
“정확하게는, 봉인이 둘로 나뉜 거지. ‘가짜’의 내 꿈과. ‘진짜’의 주인의 꿈.”
“진짜와 가짜?”
“내 능력은 환상을 실체로 만드는 것이니까. 결국 내게 있는 건 환상이나 마찬가지야. 그 모태가 되는 건, 주인의 것이지.”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안 돼.”
유서린이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복잡한 이야기가 한 번에 흘러나왔으니까.
“주인의 봉인을 풀어야 해.”
“…그러면 어둠의 마력이 다니엘을 위협할 거야!”
“괜찮을 거야. 넌 마법을 부정했어. 그리고 아무르타트에게 분노했지. 그리고 주인을 치유하고 싶었어.”
메아리는 확실하게 말했다.
“그래서 네가 버서커와 성기사가 된 것처럼, 스스로를 부정한 자가 한 명 더 있더라고.”
“…그게 누군데?”
유서린의 말에 메아리가 쓴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곧 알게 될 거야. 가자. 주인에게로. 네 옛 연인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