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최후의 용 (4)
정우와 세계수가 대화하고 있던 무렵.
파지직.
뇌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질.”
“알아. …던전 브레이크야.”
“젠장. 도대체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 거야?”
세계가 변화했다.
격변?
그때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좋지 못했다.
진짜로 아포칼립스를 떠올릴 정도로.
뇌신은 혀를 차며 스킬을 사용했다.
“낙뢰.”
파지지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번개에 얻어맞은 몬스터들이 파르르 떨며 쓰러진다.
반경 오십 미터의 몬스터들이 모조리 절명한 상황.
“…나머진 너희가 맡아라.”
잠시의 여유에 숨을 고른 뇌신이 자이언트 길드원에게 말했다.
자이언트 길드장은 다른 방향에서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기에 자이언트 길드원들은 고개를 끄덕인 후 포메이션을 만들었다.
길드장이 있었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같은 S급이라고 하더라도 뇌신과 자이언트 길드장은 격차가 심했다.
그런 뇌신의 표정은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대마법사는 이미 마른침을 삼킨 채 입술을 달싹거리며 곧장 공격할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감지는? 안 돼?”
“S급… 그 이상.”
“Fuck! 지금 상대한 놈들도 A급 몬스터였다고. S급 던전이었어!”
“등장하는 걸 어떻게 해! 입 다물고 공격할 준비해.”
그간의 경험상 게이트는 마력이 밀집되는 장소에 생겨났다.
즉, 한번 게이트가 생성된 장소엔 일정 시간이 지나고서야 게이트가 생성된다는 소리였다.
마력을 소비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던전 브레이크가 벌어진 건, 고작해야 한 시간 반 전의 일이었다.
뉴욕.
여러 사람이 미국의 수도로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도시가 전란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높고 화려한 건물은 무너지고.
수많은 인파는 목숨을 잃거나 도주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곳뿐이면 다행일 터.
빌어먹게도 미국 전역의 곳곳에서 이와 같은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재차 등장한 던전 브레이크는 이상했다.
최강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뇌신과 그에 준한다고 알려진 대마법사가 동시에 긴장할 정도로, 마력 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이윽고.
허공이 갈라진다.
쩌적, 허공에 생겨나는 구멍 사이로 검은 연기가 넘실거렸다.
“……작아?”
뇌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이 입구로 사용하는 게이트의 크기는 등급에 상관없이 모두 동일했다.
색과 마력 농도가 다를 뿐, 형태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던전 브레이크의 게이트는 아니다.
던전 안에 있었던 몬스터들의 크기가 천차만별인 것을 적용하듯, 그 크기에 맞게 게이트의 형태도 변화한다.
드레이크가 등장했을 때의 게이트 크기는 무려 20미터에 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작았다.
긴장을 줄 정도의 마력 수치와는 달리, 게이트의 크기는 오히려 일반적인 형태보다도 작았다.
“방심하지 마!”
대마법사가 일갈하며 마력을 풀었다.
게이트가 생성되었다는 소리는, 안에 있었던 몬스터가 등장한다는 소리였다.
평균적으로 1분 내외.
파직.
성급한 놈일 땐 10초도 채 걸리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게이트의 마력이 한 차례 요동쳤다.
“온다!”
그 말인즉, 내부에 있던 몬스터가 밖으로 발을 들인다는 소리였다.
우연히도 전투를 벌이던 장소 바로 옆에서 생성이 되었기에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렇기에 대마법사가 택한 마법은.
“디스트럭션 윈드(Destruction Wind).”
대마법이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바람이 곧장 광풍이 되어 게이트 주변을 에워쌌다.
그와 동시에 다른 마법도 전개한다.
“워터 레인(Water Rain).”
물기를 머금기 시작한 바람의 파괴력은 토네이도 이상의 자연재해와도 같았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이며.
만약 견딘다고 하더라도 이윽고 쏟아지는 뇌신의 공격에 쓰러질 것이라 확신했다.
문제는 수였다.
“무리하지 마.”
뇌신은 대마법사를 향해 그렇게 말했으나, 별반 효용이 없는 잔소리였다.
이미 전개된 마법이었고, 대마법사가 유지하는 동안엔 계속 마력이 소모될 테니까.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로 마력 농도가 심상치 않은 거였어?’
전력을 다했다는 소리였다.
저 정체불명의 던전 브레이크를 상대로.
뇌신도 마력을 끌어 올렸다.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준비했다.
이윽고.
게이트 안에서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살의에 차서 달려 나오지도.
나오자마자 포효를 내지르지도 않았다.
이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두 발로 걸어서 나왔을 뿐이다.
그러고는 아주 태연하게.
“……환대가 거창하군.”
“……!”
“인간형……!”
손을 들어 허공을 붙잡아 당겼다.
부욱!
“……말도, 안 돼.”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음과 함께.
콰쾅, 쾅, 후둑, 후두둑! 휘이잉.
탈진을 각오했던 대마법사의 마법이 소멸했다.
두 거인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벌어진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한발 늦게, 뇌신이 이를 갈며 일갈했다.
“내리쳐라, 번개여.”
푸르게 물든 뇌신의 일갈과 함께, 거대한 번개의 창이 침입자를 관통했다.
콰앙!
* * *
“…….”
정우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치유 능력으로 치유를 했다고는 하지만, 애당초 신성력이라는 게 자연적인 치유력을 극대화한 것이었기 때문에 뻐근함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육체가 아니라 마력이었다.
스스로를 파괴할 정도로 가열한 탓인지 고리가 삐걱거렸다.
마력의 흐름도 불안정했다.
도박은 성공했지만, 여파는 감당해야만 했다.
‘그래도… 확실히 안정적이다.’
과거의 개념으로 서클이란 총 열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견습 마법사가 1서클.
상급 마법사가 4서클.
대마법사는 8서클로 분류되었다.
드래곤의 경우에는 9서클이라고 여겼고, 새로운 체계를 이룩한 마도사의 경우가 10서클이라 분류했지만.
애당초 정우는 서클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이론만으로 남은 개념이었다.
그것에 착안하여 정우는 원래 열 개의 고리를 연결하려고 했었다.
올림픽의 오륜기처럼,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열 개의 고리를 생성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정우의 컨트롤은, 그들의 예상보다도 뛰어났다.
굳이 열 개로 나누어 마력을 밀집하는 것보다, 무수히 많은 작은 고리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온몸이 마력의 고리 그 자체였으며, 마치 사슬 갑옷을 입은 것처럼 작은 고리가 수없이 연결되어 마력을 증폭시켰고, 또 충격을 완화시켰다.
덕분에 이 정도로 그친 것이다.
그만큼 이번의 시도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고리를 자극해 인위적으로 마력을 뽑아내는 방식.
최후의 수단은 되겠지만 자주 쓸 수는 없을 것 같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내 마지막은 어떻게 된 거지?”
정우의 물음에 세계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정우의 최후.
그걸 언급하기 위해선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입에 담아야 했다.
그러려면 등장해야 하는 한 존재가…….
“……!”
잠시 고민하던 세계수의 고개가 획 하니 돌아갔다.
긴장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움찔한 메아리가 한 발을 떼었고.
정우가 주무르던 양손을 늘어트렸다.
“왜…….”
세계수는 둘의 모습엔 관심이 없었다.
저 먼 곳.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감각을 중요시했을 뿐.
넘어올 리 없는 자가 게이트를 넘었다.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자를 사용할 정도로 지식의 신 역시 별다른 패가 없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결과였지만.
“한정우!”
세계수는 다급히 정우를 불렀다.
“…뭐지?”
“그가 왔어.”
“…그?”
그는 아니었다.
자신과 조금 섞여 버린 존재.
용족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자신의 능력을 탐욕스럽게 먹어 치운 존재.
최후의 용이었지만, 이제는 멸망의 용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존재.
“……아무르타트.”
그 이름에 정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던전에 입장했을 때 자신을 보았던 눈.
얼핏 기억이 떠올랐을 땐 자신의 자리를 찬탈했을 거라 예상했던 자.
자신을 죽였을 것이라 파악했던 자.
온갖 부정적인 것으로만 엮였을 줄 알았더니, 결국엔 자신의 친우였던 자.
정우가 ‘찬탈’을 다짐했던 자.
최후의 용이자 마지막 남은 눈.
“어디지?”
정우의 물음에 세계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르타트의 감각이 전해져 왔다.
“미국. ……뉴욕이다.”
* * *
“젠장!”
욕설을 내뱉은 뇌신이 다급히 발을 굴렀다.
등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에 기겁했다.
“헬파이어보다 뜨거워!”
대마법보다 놈이 내뱉는 숨결이 더 뜨거웠다.
“없는 줄 알았어.”
“뭐가!”
블링크로 피한 대마법사가 헐떡거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뇌신은 양손에 번개를 만들어 내며 한껏 고개를 쳐들어 상대와 시선을 마주쳤다.
“드래곤.”
뇌신의 말에 대마법사도 침음을 흘리며 입술을 씹었다.
뇌신의 번개가 관통한 직후.
몬스터는 손을 휘저었다.
내리치던 번개가 그 손에 가볍게 잡히고, 대마법을 찢었던 것처럼 어렵지 않게 번개를 부러트릴 때까지도.
둘은 이 비현실적인 일에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이 누구인가.
플레이어 중에서는 최강자 자리를 논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의 공격이.
그것도 전력을 다한 일격이 너무도 허무하게 막혀 버렸다는 것에서 둘은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그간의 노련한 경험이 아니었다면, 명성에 비해 너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뻔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약하군, 일순간 분노가 느껴질 정도의 평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몬스터의 공격은 거셌다.
작은 손짓에 태산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자신들이 전력을 다한 공격에 가까운 공격들이 쉴 새도 없이 이어졌다.
아름다운 도시 뉴욕이 파괴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이었다.
하나하나가 다 대마법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파괴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었으니까.
두 사람을 제외한 플레이어들은 단 한 번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어 버리고 말았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죽은 건 플레이어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몬스터들까지 싹 다 죽어 버렸다.
이 넓은 반경에 살아 있는 이는 뇌신과 대마법사.
그리고 정체불명의 인간형 몬스터뿐이었다.
언어가 통하고 대화가 되며, 이능을 사용하는 상대.
뱀파이어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지만, 이게 바로 종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적.
그 적이 목을 꺾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여흥은 이만하지.”
대마법사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의 고등급 마법을 연달아 사용한 것치고는 너무도 평온한 어조와 태도도 충격이었지만.
여흥이라는 말과 함께 폭사하기 시작한 마력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폭증하는 마력만으로도 어지간한 공격과 비슷했기에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그리고 그 폭풍이 가라앉았을 때.
반격을 준비하던 둘의 신형이 덜컥 멎었다.
이전에 잡았던 드레이크를 연상시키는 형체.
하지만 크기나 마력이나 할 것 없이 압도적인 존재.
존재하지 않을까, 하며 상상으로 그려 내던 최강의 생물.
드래곤(Dragon).
그것이 입을 쩍 벌리며 포효했다.
“질!”
“…마, 마력을 흡수하고 있어! 젠장, 못 피해!”
대마법사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한껏 끌어당기는 마력.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어떠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각종 판타지에서 종종 그려지곤 했던 공격.
“브레스(Breath)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