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최후의 용 (2)
관조(觀照).
조용한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봄.
혹은 지혜로써 사물의 실상을 비춰봄.
그런 사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것에 정우는 빠져들었다.
메아리가 남긴 흔적을 찾겠다고 접근한 심상이 오히려 정우를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진행된 관조.
그것은 메아리와 비교해서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정우는 자신의 심상 속을 정확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힌다.
단 한 줌의 빛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곳에 빛이라 할 만한 것이 생성된다.
그 빛은 매우 미약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세계엔 큰 변화나 마찬가지였다.
윤곽이라는 것이 생겨났으니까.
더 짙고 흐린 경계선이 등장하며 흐릿하게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느껴지기 시작한 그것에 정우는 더 집중했다.
작은 빛.
굉장히 넓은 지역에 켜진 작은 촛불과 같은 그것이 점차 덩치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한계는 존재했다.
촛불이 화롯불이 된 정도에 그쳤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언가가 나타나는 형상을 확인하는 것은.
‘……역시, 있었다.’
그것은 나무였다.
세계수.
묘목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한 사이즈였지만, 심상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정우는 빛으로 관심을 옮겼다.
이 빛이 조금 더 커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빛에 대한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왜 갑자기 이 빛이 생겨났을까.
‘…….’
한참을 살피던 정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세계수의 열매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리를 병상에 눕게 만들었던 물건이자, 그가 이중 던전에서 보상으로 받은 물건.
그것이 세계수와 반응하여 빛을 만들어 냈다.
‘…열매에 담긴 마력을 불태우고 있어.’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열매는 반응했다.
스스로를 불태워 불빛을 만들어 냈고, 그로 인해 어둡기만 하던 공간을 조금 밝혀 냈다.
세계수의 열매 역시 마력으로 이뤄졌다.
그 마력은 이곳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 맹렬하게 스스로를 태워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알려 주듯.
‘마력이 없는 공간에서, 마력을 사용한다……. 어떻게 가능한 거지? 정령력 때문인가?’
고민이 이어졌다.
여러 가설이 떠오르고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답답함에 목이 졸릴 지경이 되었을 무렵, 빛이 한 차례 흔들렸다.
‘…마력이 부족하다.’
세계수의 열매가 가진 마력으로도 이곳을 밝히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주변의 마력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태워야 했으니 한계가 더 빨리 다가온 것이다.
‘……스스로의 마력을 불태워?’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벼락같은 감각이 머리를 스쳤다.
외부의 마력을 사용하던 자신으로서는 이곳을 벗어나는 게 무리였을 것이다.
마력이 사라진 자신은 어지간한 아이에게도 패배할 정도로 허약한 육체의 소유자였으니까.
지식의 신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그런 상태의 자신을 사로잡는 건 일도 아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건강한 육체에 각종 훈련으로 다져진 운동 신경은, 다니엘일 때엔 꿈도 꾸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체력이라 부르는, 생명력의 일종.
‘……버틸 수 있을까?’
잠시나마 마력을 사용하면 이곳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고심은 짧았다.
‘하자.’
지금이 기회였다.
후퇴한 지식의 신의 지식은 방대했고, 어떠한 방향으로 일을 꼬이게 만들지 몰랐다.
빠르게 몰아쳐야 했다.
후욱!
결정과 동시에 숨을 들이켠 정우의 고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네가 준 선물을 잘 써주지.’
공명으로 인한 증폭.
마녀 일족에게서 배운 비기가 수많은 고리를 자극했다.
치이이익!
천천히 몸이 달궈진다.
체력을 소모시켜 마력을 사용하는 방법.
생체력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그것을, 정우는 아낌없이 사용했다.
빠른 속도로 지방이 타들어 가고, 근육마저 자극을 받는다.
혹사에 가까운 운동 끝에 오는 심각한 근육통처럼, 전신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인위적으로 공명시킨 고리가 만들어 내는 여파는 예상보다도 강했다.
‘…으득, 빨리 찾아.’
스스로를 독촉했다.
절로 이가 갈렸지만, 정신만큼은 집중을 놓치지 않았다.
모닥불.
아니다.
정우의 생체력은 태양과도 같았다.
세계수의 열매는 본인의 것이 아니었기에 미약한 형태가 전부였지만 생체력은 아니다.
이곳은 정우의 정신 속이었고, 정우는 스스로의 육체를 태우는 중이었으니 효과가 다른 건 당연했다.
한순간 세상이 밝아진다.
사람 키 정도의 묘목.
그리고 드러나는 무수한 별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그것들은 정우가 만들어 낸 빛을 반사하며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수는 정말로 무수했다.
저 먼 우주처럼.
정우는 그 모든 것들을 둘러봤다.
크고 작은 별들.
밝고 탁한 별들.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원하는 것을 찾는 건,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이 별은 무엇일까.
의문이 들었다.
마력에 반응하여 빛나는 별.
‘……스킬이다.’
스킬.
혹은 스킬처럼 사용할 수 있는 본인의 능력을 뜻했다.
정우는 스스로가 이토록 많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플레이어의 능력이 자신의 것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적어도 플레이어가 가진 모든 능력을 혼자 운용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한 사람이 가졌다고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방대한 재능.
감탄은 짧았다.
통증이 거세졌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태양 빛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때때로 어둠이 도래하기도 했다.
조급함이 앞섰지만, 오히려 정우는 차분하게 모든 능력을 살폈다.
본인의 것.
그러나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원형에서 파생된 모든 능력들을 살피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파생은 버려. 원형만 찾자.’
메아리에게서 영향을 받은 능력.
그게 생체력을 태우지 않고서도 이곳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수명이 다한 전구가 깜빡거리는 것처럼, 어둠이 찾아오는 빈도수가 증가했다.
순간적인 통증엔 정신을 놓아 버릴 정도였다.
후욱!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암전했을 땐, 정우도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찾았다.’
정우는 원하는 걸 찾았다.
그와 동시에 빛이 사라졌다.
극심한 통증만이 잔여물처럼 남아,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정우는 갑자기 느껴지는 울렁거림에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느껴지는 것은 없었지만, 조금 나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 회복을 해야 해. 메아리…. 날… 깨우지 마.’
정우는 혹여나 메아리가 능력을 거둘까 염려하며,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 * *
메아리는 기겁했다.
갑자기 정우의 온몸에서 수증기가 날 정도의 열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불과 몇 분 사이에 눈에 보일 정도로 핼쑥해지기까지 했다.
체력이 소진된다.
“주인님…….”
메아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뻗은 손을 거둬들이는 순간까지 수많은 갈등이 오갔다.
하지만 자신의 주인의 결정을 막기엔, 그녀도 지금 이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지금 무언가를 얻지 못하면,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지식의 신을 마주해야 할 터였다.
환상을 그려 내고, 지구의 인간들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아낸 것까진 좋았지만.
아무래도 영혼의 계약을 맺은 정우의 상태가 위험한 게 너무 컸다.
이중 던전 안에서 사로잡혀 있던 자신.
두 날개가 찢겨 나가고 뿔이 부러져 있던 그것은, 스스로가 만든 상처였다.
패배의 상처가 아닌, 부족한 능력을 보충하기 위해 본래의 마력까지 사용한 결과물인 것이다.
그조차도 모자라 결국, 계획과는 다르게 일부 권한을 지식의 신이 쥐게 되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권한이 미치는 건 오로지 G급 던전뿐이었다.
그조차도 손댈 구석이 거의 없었다.
재능의 개화, 마력의 습득, 전투 경험까지.
주인을 도울 군대의 양성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필요했고, 손을 대는 것이 더 위험했으니까.
울컥!
“…주, 주인님.”
메아리의 음성이 떨렸다.
자신의 주인이 내뱉는 덩어리진 핏물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모습이 꼭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깨워야 하나? 지금이라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하나?’
짧은 순간 많은 고민이 오갔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이 무색하리만큼 정우의 안색은 편안해져 갔다.
오히려 이제야 안정적이라는 듯 비틀었던 몸도 스스로 바로 했다.
가만히 누운 정우의 가슴께가 천천히 오르고 내리며 균일하게 호흡했다.
메아리는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꿈에 관여하는 그녀였지만, 영혼의 계약 때문에 주인의 심상엔 관여하는 게 불가능했다.
오로지 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주인의 역량으로 벗어나야 하는 것이었다.
주인을 믿지만, 이미 패배를 경험해 본 그녀로서는 아무래도 자신의 죽음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정우의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희미하게 지은 미소가 메아리의 큰 눈동자에 각인되었다.
* * *
자신에게서 시작된 능력이었다.
메아리가 영향을 끼쳤다고는 하지만, 원형은 자신의 것이었다.
정우는 그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건 자신이 아니라는 소리가 있다.
하지만 정우는 마력에 관해서는 스스로를 자신했다.
스스로의 재능, 역량, 한계까지.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영향을 미친 게.
의외로 원래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능력이라고.
마녀 일족의 그것.
‘통로’였다.
F급을 채 벗어나기 전부터 정우는 염동을 습득했다.
그건 정우가 어둠의 영역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했던 것이었다.
‘익숙해서 습득한 줄 알았어.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염동은 초능력을 뜻하며.
정신적인 능력을 뜻했다.
자신은 어둠의 영역에서 이미 정신적인 능력을 깨우친 상태였고, 그로 인해 어둠의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관심이 갔던 능력, 그래비티.
중력을 다루는 그것은 공간 이동보다도 더한 마력 컨트롤을 요구했다.
필요한 공간, 필요한 부분만을 자극하여 공간에 개입하는 것이었으니까.
정신적인 컨트롤을 배우고, 마력적인 컨트롤을 다룬다.
그로 인해 완성된 건, 다름 아닌 통로였다.
마녀의 숲에서 배웠지만, 배움과 동시에 곧장 사용이 가능했던 그것.
그게 바로 메아리에게서 받은 능력이었다.
게이트.
꿈과 꿈을 넘나드는 힘.
게이트의 원천은 바로 그것이었다.
서큐버스 말이다.
‘돌고 돌아 원형이라….’
정우는 내심 웃겼다.
그토록 찾았던 메아리에게서 받은 능력이 꿈을 뛰어넘는 것이라니.
마치 서큐버스가 된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우연히도 이 능력은.
‘너무 중요하지.’
자신에겐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던전의 마력이 흡수되던 게이트는 메아리의 심상과 이어져 있었다.
환상으로 만든 실체.
실체와 같은 환상.
정우는 지금.
그곳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그 말인즉.
‘해킹이 필요 없다는 거다. 지식의 신.’
실체를 지식의 신이 머무는 장소로 보낼 방법을 찾았다는 의미였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
정우는 두 눈을 부릅뜨며 잠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