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메아리의 능력 (3)
“슬픔과 기쁨을 주관하며 사고와 환상을 어루만지는 자여.”
슬픔과 기쁨.
감정이었다.
사고와 환상.
능력이었다.
환상은 애당초 자신의 근원이었다.
감정은 정신의 신의 능력을 일부 계승하면서 얻은 새로운 힘이었다.
사고는 무엇일까.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 자신이 무슨 힘을 더 얻은 것일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한 가지.
“……나, 인가요?”
말투마저 바뀌었다.
경계의 태도에서 자문을 구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적에서 옛날의 절대자에게 묻는 형태로.
마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메아리는 말문이 막혔다.
어둠의 영역.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어둠의 마력을 봉인한 게 자신이라는 점이 믿기지가 않았다.
순간적으로 아찔한 충격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때였다.
“……아무래도.”
고개를 든 마왕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옅은 흥분으로 입가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승부가 난 모양이군.”
‘…승부?’
조금 늦게 상황을 인지한 메아리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 상황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주인의 것이었다.
어둠의 마력이 어째서 봉인되어 있는지는 주인과 고민해도 늦지 않았다.
“어떻게 확인하는 거죠?”
메아리의 질문에 마왕이 잠시 시선만 아래로 돌려 그녀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나의 아이들을 통한 정보를, 나도 얻었으니까.”
비록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았지만 말이다.
그때 얻은 능력으로 마왕은 플레이어의 능력에서 조금 더 벗어났다.
세계수 묘목을 찾고, 그것을 성장시킨 후부터는 잠시 잠깐 어둠의 마력을 밀어낼 능력이 생겼다.
덕분에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녀가 날 찾은 방법을, 그자가 과연 모를까 의심이 가는구나.’
이제 와선 확신이 들지 않지만.
어쨌든 전투는 끝났다.
메아리는 일부러 전투의 결말을 묻지 않았지만, 마왕은 자신의 표정으로 결말을 드러냈다.
승리는.
* * *
푹!
아주 작은 소음이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드러난 눈을 찌르며 들린 것은.
하지만 그 소음이야말로 정우가 바랐던 것이며, 지식의 신이 거부했던 것이었다.
부정의 검.
검의 신이 쥐고 있던 그 검이 기어이 지식의 신의 본체를 관통했다.
게이트와 같은 통로를 통해 눈알까지 찔렀고.
[ ……어떻게. ]
충격에 휩싸인 메시지가 조금 늦게 떠올랐다.
흩어지는 마력을 틀어막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라는 걸, 정우는 잘 알았다.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오만에 찬 음성으로 ‘감히’라고 내뱉던 친우의 비명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아스라이 흩어졌던 추억이 되어 다가왔다.
“어둠의 마력을 흩어버리는 것. 네가 날 이겼던 방법이 바로 그거였어.”
같은 패턴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격돌했고, 거의 비슷한 능력으로 맞붙었을 것이다.
어둠의 영역 안에서의 전투를, 지식의 신은 보고 있었던 게 틀림이 없었다.
같은 행동을 반복했고, 같은 능력을 수없이 사용했다.
적의 수는 많았고, 전투는 끊이질 않았으니까.
그 정도의 반복이면 어린아이조차 전문가가 되어야 할 정도였다.
그뿐이랴.
머문 시간은 만 년에 달한다.
그 모든 것을 보아 왔다면 자신도 모르는 습관까지 속속들이 들켰다고 봐야 옳았다.
그렇기에 정우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순수한 오러.
그 안에 담는 부정의 힘.
하나를 습득할 때마다 조합하여 변해 버린 그것을, 완전히 분해하여 초창기로 되돌렸다.
발전된 힘이 아닌 투박해진 힘이었지만.
그건 분명히 변화였고, 예기치 않은 사건이었다.
지식의 신.
수많은 지식을 가졌기에 붙여진 칭호.
마천루처럼 높게 쌓인 지식은 오히려 가장 기초적인 지식을 놓칠 가능성이 높았다.
단순하고 우직한 일격.
그건 오히려 변수가 될 확률이 높았고, 흩어지는 마력들과는 별개로 뭉쳐진 마력은 한 가지의 부정(否定)을 머금고 지식의 신을 꿰뚫었다.
자신 역시 여러 여파로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 푸흐, 흐흐……. ]
“…왜 웃지?”
[ 웃기니까……. ]
지식의 신이 웃음을 흘렸다.
메시지마저 치직거리며 불안정함에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정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 이게 끝은 아닐 텐데…. ]
“전형적인 악당 같은 멘트로군. 아무르타트를 믿는 건가?”
[ 그 또한 내 패 중의 하나이지. ]
“패 중의 하나라…. 더 가진 게 있다는 소리인데….”
[ 나의 오래된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인데, 패가 없으면 쓰나. ]
정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도?”
[ 이 상황이기에……. 잘 봤다. 너의 능력, 너의 한계. ]
지식의 신의 구체에 균열이 생겼다.
쩌적, 갈라지는 형태는 마치 과자를 부서트리는 것 같기도 했다.
[ 내가 다시 승리하겠구나. 푸흐…. ]
지식의 신이 웃는다.
진정으로 기껍다는 듯, 웃음을 참지 않았다.
[ 곧 다시 만나자. 금방일 테니…. ]
그 말과 함께 눈꺼풀이 눈을 감추는 것처럼 구체의 틈이 사라졌다.
파슷.
부정의 검이 허무하게 사라진다.
뒤로 물러선 정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허하게 변해 버린 세상.
그 속에서 부유하던 구체가 한순간에 게이트를 넘어 사라진다.
정우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통로.’
마찬가지로 게이트를 넘어 이동한다.
자신의 영역, 마녀의 마을로.
* * *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구려.”
그런 것치고 이지스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모두 넘어갈 수 있겠소?”
“가능해.”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미리 예견된 것처럼.
세계수 묘목이 뿌리를 내릴 때마다 왜 변화가 시작되었을까.
아니, 변화를 알렸을까.
그건 경고였다.
세계수가 세상에 보내는 경고.
준비하라고.
대격변에 준하는 변화가 곧 도래한다고.
그렇기에 메아리를 보냈다.
‘눈’을 경계하며 도주를 감행한, 연신 호의적이었던 마왕에게로.
“적합률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했었지.”
“…같은 결론을 내렸소.”
“그래. 적합률이 높은 건 위험하지. 지식의 신이 이용할… 능력이니까.”
플레이어의 적합률에 대해 내린 결론은 두 가지였다.
그중의 하나는 이지스가 방금 말한 것처럼, 지식의 신이 해당 플레이어의 능력을 사용하는 수준이었다.
그거라면 S급보다 A급의 적합률이 높은 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지스에게 말하지 않은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 힘은 나의 것이다. 내 걸 찢어서 나눠 줬다면… 내 힘을 받아들인 적합률 또한 다를 것이지.’
정확하게 판단을 해봐야겠지만, 적합률에 따른 마력의 성장폭도 다를 것만 같았다.
물론, 죽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플레이어를.
“다 같이 넘어갈 거다.”
“……이 체계를 벗을 수 있을까.”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아버지와 이지스의 한계는 비슷했다.
몬스터로 등록이 되었고, 몬스터로서 활동을 했다.
차이라면 아버지는 시스템적으로 몬스터의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란 점이었고, 이지스는 여전히 몬스터의 범주에 머문 존재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가능해요.”
“어떻게?”
“메아리가 방법을 알아 올 거예요.”
무려 세계수가 같은 방법으로 지식의 신의 눈을 피하고 있었으니까.
정우는 확신했다.
예전이라면 오히려 지식의 신은 세계수의 도주를 쉽게 찾아냈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방법에 대해서 눈치는 챘겠지만, 한계가 존재했다.
시스템의 한계.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 오히려 지식의 신이었다.
그렇기에 변수가 필요했다.
‘아마도…… 나와 메아리겠지.’
G급 던전에서 메아리를 구한 게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다.
미리 준비된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시스템의 시작은 G급 던전에서부터였다.
지식의 신의 손길이, G급 던전에도 닿아 있다는 소리였다.
정우는 그걸 잊지 않았다.
‘몇 가지 정보를 더 정리해야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하자.’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음…….”
아버지는 침음을 삼키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가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사실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피… 없애 드려요?”
그렇기에 아버지는 정우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이걸… 없앨 수 있다고?”
일반적인 감염자도 아닌, 뱀파이어 로드였다.
그가 곧 뱀파이어였고, 그의 피로 시작되는 것이 진조였다.
소실된 마력을 복구하기만 하면 S급을 양성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로드의 위치였다.
피를 지우는 건, 존재를 지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조금만 준비하면 가능할 거예요. 하지만… 일단은 같이 싸워 줘요.”
아들의 말이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그러나 뜨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후의 전투가 머지않았음을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지식의 신은 도주했지만, 패배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한 수조차 조소로 떨칠 정도로 대단한 존재였으니까.
고작해야 진리를 탐구하는 자의 위상이 너무 거대해져 버렸다.
켜켜이 쌓인 지식의 양식만으로 만족해야 할 놈이.
“너무 새로운 걸 확인하고 싶어 하네요.”
“새로운 것이라면….”
“어둠의 마력, 말이오?”
둘은 정우의 말을 곧장 알아들었다.
어둠의 마력.
정우는 놈의 갈망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어둠의 영역을 공략하고 벗어난 자신은 친우들을 만났다.
분명히 친우들을 만났다.
지식이 신이 보여 준, 아무르타트에 감염된 세계수와는 조금 다른 행보였다.
세계수는 어둠의 마력에 감염되었고, 안나를 비롯한 친우들이 그것을 확인한 건 자신이 어둠의 영역으로 입장한 지 사 년이 지났을 때였다.
자신의 퇴장은 오 년째에 이뤄졌다.
일 년이 빈다.
이미 감염된 세계수는 어떤 방향으로든 새로운 세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Tutelary.
이 이름 역시 한 줄기 의문으로 남는다.
어둠의 영역에 다 집어삼켜져 버린 세계에 붙이기엔 더없이 영광스러운 이름이었으니까.
수호자라니.
예전엔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그것이 변화했다.
청탑이 최후의 도시를 건설했을 때부터.
사람들은 청탑을 기준으로 수호자란 표현을 사용했다.
영웅이라는 표현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우가 의아한 건 다른 게 아니었다.
지식의 신에게만큼은 그 세계가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로지 지식만을 탐구하는 자가 수호자란 표현을 고스란히 녹여 내고 있었으며.
메아리는 명칭이 중요하다며 자신에게 조언했었다.
터무니없이 약하고 아는 지식이 없었던 그때.
정우는 그때를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메아리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올지.
세계수는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지.
그 계획을 어떻게 이용하거나 협력할지.
“일단은 청탑에 자리를 마련해 놨어요. 여러 물품이나 도구도 마련해 놨으니, 이지스는 마녀들을 이끌고 마법 물품을 제작하도록 해. 아버지는…… 저와 함께 가요.”
“어디를?”
“미해결 지역. 그곳들을 전부 없애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