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청탑 (7)
“……역행이라.”
뇌신에게서 연락을 받은 대마법사는 생각에 잠겼다.
역행이라는 단어가 입에 감겼다.
플레이어의 언어 체계는 매우 훌륭했다.
아니, 훌륭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자신은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상대의 언어가 정확하게 번역이 되어 들렸다.
현지인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농담.
혹은 비속어까지.
모든 의미가 고스란히 번역이 되었다.
과학자들이 바라 마지않는 실시간 통역의 궁극이 플레이어에겐 기본 능력이 되었다.
때문에 한자든 오지 부족의 언어이든 대화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놀라운 건 그 단어를 전달함에 있어서도 해당 의미가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점이었다.
영어로 대화함에도 정우가 말한 단어가 고스란히 들린다는 건,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기야 스킬과 마력을 과학으로 증명할 수나 있겠냐마는.
그녀 역시 초재생을 생각했다.
하지만 초재생과는 다른 여러 조건에서 피에로가 가진 능력을 정의하지 못했고.
유지석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한정우를 떠올렸다.
대마법사인 자신이 이뤄야 하는 경지인 ‘마도사’를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한정우를.
유지석에게 듣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당장 찾아가겠다는 걸 만류한 유지석이 원망스러웠을 정도였다.
과연.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다… 이거지?’
한정우는 답을 내렸다.
역행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답을.
“그런데… 납득이 간단 말이야. 그 개념이라면…….”
죽일 수 없는 존재.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유지석에게 들은 내용도 이해가 간다.
“그 이기적인 놈들이 왜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달려드나 했더니…… 이걸 본 거였어.”
죽지 않는 존재.
어쩌면 마왕은 그런 모습으로 ‘부활’ 혹은 ‘영원’을 언급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비처럼.
“확실히 내 수준을 뛰어넘었단 말이야…. 근데 이상한 건 내 마음이야.”
질 고메즈는 청탑을 보았다.
완성된 청탑의 형태는 그리 아름다운 형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마법사였고, 마법진이 내뿜는 빛을 알고 있는 자였다.
저걸 당장 완성하라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터였다.
청탑은 자신의 수준을 벗어났다.
정확하게는 마법진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종류였다.
일 층부터 걸어서 올라간 청탑은 각 층마다 기묘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외부에서 본 청탑의 표면에도 마법진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회색빛의 저 흉물스러운 건물이.
“볼 만하겠어.”
마법진이 가동되는 순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날 것이란 게, 그녀의 눈엔 보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국에 머물렀다.
저 청탑의 완성을 보고 싶어서 더더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청탑 때문이라도 알렌 보머의 요청을 무시하고 한국에 남았다.
한정우와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도 컸고.
“피에로가 마왕이라…….”
뇌신의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사로잡은 피에로의 얼굴은 마왕의 얼굴과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짧은 질문만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피에로는 마왕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묘해….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기엔, 아는 게 많아. 그런 것치고 능력은 전혀 다르고….”
마왕의 능력은 피에로의 능력과 전혀 달랐다.
실제로 보진 않았지만, 전투를 벌인 알렌 보머가 그렇게 말했으니 확실할 것이다.
전혀 다른 능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원래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이 청탑의 주인.
한정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마왕과 피에로라……. 능력을, 변환시키는 힘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오버레이 때문인가?”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다.
상대는 달랐지만, 한정우라면 어느 정도 답변을 내려 줄 것만 같은 묘한 감정이 생겨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청탑 안쪽에서 묵직한 마력이 느껴졌다.
질 고메즈는 빠르게 청탑에 접근했다.
“대체 대륙 간 공간 이동을 어떻게 하는 거지? 마도사이기 때문인 건가?”
“여기엔 무슨 일이죠, 대마법사?”
“질이라고 불러도 돼.”
“그건 생각해 보죠.”
정우의 태도에 질 고메즈가 입술을 삐죽였다.
“무슨 일입니까?”
“…이거, 완성 좀 보고 싶어서.”
그녀는 청탑의 내벽을 손으로 쓸었다.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이랄까?”
잠시 생각하던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마법사의 표정이 밝아진다.
칭 샤오를 놓아주었을 때의 날카로운 시선은 사라졌다.
오히려 기대와 흥미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마치 안나처럼.
‘…….’
정우는 눈가를 좁혔다.
안나와 비슷한 능력을 지닌 이는 질 고메즈였다.
더 많은 기억을 되찾은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중 던전을 경험한 이들은 자신과 관련이 있고, 그들이 각성한 능력은 자신과 관련된 이들과 연관이 있다는 걸.
말이 조금 이상했지만.
‘어쨌든 능력을 계승한다고 해야 할까.’
능력만큼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질 고메즈의 능력은 안나와 흡사했다.
하지만 안나를 떠올리면.
‘……왜 그 사람이 떠오르는 거지?’
기이하게도 전혀 다른 사람이 떠오른다.
리는 제이의 기억과 능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로이의 기억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기억에 따라 능력이 따라오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지? 술식 계산이 어려운 건가?”
“…음.”
질 고메즈의 말에 정우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청탑은 중요했다.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청탑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은 비단 아티팩트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건 플레이어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들.
청탑이 주로 생산할 것들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외벽에 새겨진 마법진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그건 제작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방어를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증폭기. 그리고 중계기.’
정우가 생각하는 진정한 청탑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각 층마다 견고한 마법진을 그려 놓았다.
지구의 과학이 훌륭한 점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설계대로 그려 낼 수 있다는 점.
마법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그 정도로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건 확실히 과학의 장점이었다.
정우는 다시 점검하며 일 층으로 내려왔다.
마법진은 훌륭했다.
완성이야 자신의 몫이지만, 적어도 설계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렇기에.
“시작하겠습니다.”
후웅.
정우의 마력이 퍼져 나간다.
마력은 거칠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막대한 마력을 일거에 쏟아붓는 게 아니다.
계량을 하듯 정확한 마력을 정확하게 배치하는 게 중요했다.
우웅, 공명하는 고리의 감각을 조금씩 퍼트린다.
층마다 그려진 마법진에 푸른 마력이 CG처럼 입혀진다.
홈을 따라 푸른색의 물이 퍼지는 것처럼 한 층에 그려진 마법진의 모든 홈이 푸른 마력으로 가득 찼다.
그제야 정우는 다른 층으로 마력을 퍼트린다.
“…….”
대마법사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신비한 광경이었다.
마법진이 물들고.
흩어지려는 성질이 강한 마력이 가만히 마법진에 안착했다.
아직 스위치를 켜지 않은 것처럼 마법진이 발동된 건 아니었지만, 그 마력의 흐름은 대마법사에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단 마정석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마법진은 의외로 흔한 개념이었다.
한국 플레이어 협회에도 여러 개의 마법진이 있었고, 공간 이동을 위한 마법진이 있는 것처럼.
미국은 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마법진이 다수 존재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의 대부분은 대마법사의 손에서 탄생되었다.
그녀는 지구상 가장 마법진을 잘 다루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청탑의 마법진에 관심이 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지금 보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자신의 마법진이 얼마나 조악했는지.
자신의 마법이 얼마나 별 볼 일 없었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자신은 감히 흉내 낼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의 고도의 능력이었다.
마법진에 마력을 퍼트리는 방식도.
그리고 퍼트린 마력을 유지한 채 다른 마법진에 신경을 쓰는 역량도.
퍼져 가는 마력이 쌓이고 쌓일수록 생겨나는 공명도.
그녀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질투보다는 감탄이 우선시되고 충격이 그저 충격으로만 남지 않는다.
대마법사는 땀으로 흥건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게… 마도사의 경지인가?’
손에 잡히기 시작한 다음 직업.
그 경지를 미리 본 듯하여서.
물론, 마도사가 된다고 한정우와 같은 능력을 사용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같은 출발선은 밟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감정도 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정우의 경지는 고작해야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아무튼, 충격적이면서도 희망적인 장면이 이어졌다.
그리고 옥상까지 완성이 되었을 때.
정우는 마력을 갈무리했다.
그럼에도 마법진의 마력은 독자적인 존재처럼 마법진에 남아 발광(發光)하고 있었다.
신비한 장면.
대마법사는 조심히 물었다.
“…이 마력은 어떻게 고정시키는 거지?”
그녀의 물음에 정우는 천장을 슬쩍 보고선.
퉁!
손가락을 튕겼다.
“……!”
파앙-!
마법진의 마력이 한 차례 박동하는 것처럼 기묘한 존재감을 뿌리더니 안착한다.
타투를 새기듯.
마법진에 각인되는 모습이 보였다.
마정석은 필요하지 않았다.
“……마력 자체가 마정석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어떻게?”
그녀가 큰 눈을 부릅뜬 채로 정우에게 물었다.
마정석은 마력을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인류는 마정석을 사용하여 배터리나 출력을 대신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군. 마정석도 어차피 마력이 모여 있는 물건이니까… 마력 자체를 고정시킬 수가 있는 거였어.”
그녀는 답변도 듣지 않은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정우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런 행동도 비슷했다.
안나. 그녀와.
하지만 이상하다.
왜 비슷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질 고메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건지.
안나라는 사람의 재능과는 전혀 다른 재능을 개화시킨 또 다른 천재의 모습이 왜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떠오르는 건지.
휘휘.
정우는 머리를 흔드는 것으로 상념을 털었다.
대마법사는 저 고민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갈 것이다.
정우는 그녀의 깨달음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주변으로 아예 방어막까지 쳐놓았다.
소음도, 충격도, 누군가의 접근도 막을 생각으로.
정우는 청탑을 확인했다.
각 층의 마법진이 제대로 안착되었다.
‘이젠 외벽이다.’
외벽의 마법진은 더 정교했다.
이것이야말로 청탑을 세운 궁극적인 이유였으니까.
저벅.
정우는 청탑을 나섰다.
가만히 서서 청탑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마력을 뿌린다.
아래서부터 넝쿨이 자라나는 것처럼 푸른색이 이런저런 형태로 자라났다.
탑을 뒤덮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터덜.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이고 있던 대마법사가 묘한 표정으로 청탑에서 나온 건, 청탑의 외벽이 전부 푸르게 물들었을 때였다.
뒤늦게 그 상황을 인지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압도당한 대마법사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저건.
“……저게, ‘탑’이라고?”
거주지 따위가 아니었다.
회사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대마법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