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청탑 (4)
끈질긴 나카무라 안을 떼어 낸 정우는 눈물까지 흘리며 애원하던 그녀를 떠올리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의 이미지는 어디로 간 건지…….”
냉정해 보이던 이미지는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건 말도 많고 가벼운 나카무라 안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제 본 모습을 되찾은 듯, 그녀의 그런 모습은 꽤나 어울렸다.
“상황이 상황이라 냉정하게 보이려고 노력한 걸지도 모르겠어.”
지금 당장은 주 수입원이 박살이 나고 내수조차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앞으론 나쁘지 않겠지.”
앞으로는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국력이야 한국이 더 세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피식 웃음을 흘린 정우가 걸음을 멈췄다.
세계수 묘목의 앞에 서며 숨을 골랐다.
또 다른 기억.
그것을 얻기 위해.
‘왜 이걸 놔둔 거지?’
막상 세계수 묘목을 앞두자 마왕이 떠올랐다.
모두는 하나.
그렇다면 이 묘목조차 그에게는 매우 중요해야 옳았으니까.
세계수는 묘목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모두는 하나.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이 등장한 것이었다.
세계수에게 묘목은 중요하다.
본체를 대신할 서브이자 본신의 힘을 어느 정도 머금고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럼에도 세계수의 분신인 마왕은 묘목을 내버려 두었다.
세계수의 가지를 찾아다녔던 게 무색하게.
거기서 정우는 한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세계수는 내가 기억을 되찾기를 바라고 있어.’
기억을 되찾기를 바라는 존재가 자신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왕은 세계수의 가지를 찾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세계수 묘목을 놔두고 있었다.
가지와 묘목.
그리고 리가 품고 있었던 열매까지.
전 인류의 배척을 받기는 했지만 마왕이 가지는 힘은 엄청났다.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잠적을 하지 않았다면, 인천에서 만났던 수 이상의 빌런이 한 명의 명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만약에 마왕이 적극적으로 세계 정복을 꿈꾸며 움직였다면 각국의 플레이어조차 힘겨웠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왕의 힘이 너무 강했으니까.
게이트라는 초유의 물건을 공간이동수단으로 사용하는 데다, 던전 내부의 환경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은 정우로서도 기함할 정도였다.
그가 작정하고 움직였으면 세계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그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찾아는 다녔으되 방치했다.
‘정말로 최소한의 가지만 찾은 것 같았어.’
정확하게는.
‘세계수가 뿌리를 내릴 수 있을 정도의 힘만 회복시킨 느낌이었지….’
의도적으로 세계수의 성장을 멈춘 느낌이었다.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눈을 피하기 위함이라…….’
입맛이 썼다.
더 기억을 얻어 정보를 모아야겠지만, 확신까지 든 자신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모두는 농락당한 셈이었다.
빌어먹게도.
그렇게 찌푸려진 눈가로, 정우는 세계수 묘목에 손을 뻗었다.
화아악!
밝아지는 세상 속에서.
잊었던 기억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 * *
마지막 남은 ‘씨앗’이 사라졌다.
“……분기점이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예전엔 느낄 수 없었던 감각.
그는 이 감각을 너무도 사랑했다.
“무엇을 기억했는가에 따라, 모든 게 바뀔 것이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파지지직!
돌연 허공을 가득 채우는 전격이 요란하게 번쩍였다.
“찾았다. 피에로!”
그 전격 사이로 사자의 울음소리 같은 음성이 들렸다.
피에로가 가면을 매만지며 침입자를 환대했다.
“뇌신!”
뇌신은 피에로를 향해 전격을 쏘아 냈다.
마치 발전기가 폭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막대한 전격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피에로는 전격을 막으며 가면 너머로 뇌신을 노려보았다.
“강해졌네?”
웃는 낯의 피에로 가면의 말에 뇌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널 죽일 생각이니까.”
“기대되는군.”
피에로의 말에 뇌신이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허공의 전격이 하나의 창으로 변화한다.
제우스의 손에 들린 번개와 같은 위용으로 피에로를 압박했다.
“썬더볼트(Thunderbolt).”
직관적인 스킬명과 함께 빛과 같은 속도로 전격의 창이 쇄도한다.
공기를 태우고.
적을 불태우기 위한 일격이 내리친다.
피에로의 손이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눈이 멀 정도의 광원과 함께 짓쳐 드는 썬더볼트를 향해 손을 휘젓는다.
콰득!
마력으로 이루어진 썬더볼트를 잡아 찢는 손아귀는 거인의 그것과 비슷했다.
“불도마뱀의 발톱(Firelizard's Talons).”
거대한 손아귀가 허공을 찢어 버린다.
전격과 화염의 격돌.
후웅!
뜨거운 열기와 함께 거대한 폭발이 소리 없이 발생했다.
뜨거운 열기 사이로 두 명이 격돌한다.
뇌신의 움직임은 정말로 번개를 연상시킬 정도로 빨랐으며 모든 공격이 번쩍거렸다.
그에 반해 피에로는 조용한 움직임으로 번개를 마주 쳤다.
굉음과 후폭풍이 요란하게 울렸다.
멀리서 볼 땐 번개 폭풍이라도 강림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는 거지?”
피에로를 스쳐 가며 뇌신이 소리쳤다.
“무슨 짓이라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피에로의 가면 안쪽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여유.
뇌신은 피에로의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꼬리를 말고 도망칠 때는 언제고 이젠 여유를 부리겠다?”
뇌신의 몸이 한 차례 푸르게 빛났다.
‘헤르메스의 발걸음.’
전격을 통해 신체의 반응 속도를 올리는 기술이었다.
가뜩이나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빠르던 뇌신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팟!
처음으로 피에로의 어깨에 상처가 난 순간이기도 했다.
뇌신은 피에로를 몇 년이나 쫓았다.
거의 스토커에 가깝게 집착을 부리며 대부분의 일을 뒤로 한 채 그는 피에로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퍼억!
“……으음.”
“내 친구의 복수를 하려면 아직도 멀었어!”
하나는 친구의 복수.
피에로의 손에 죽어 버린 친구를 위해 뇌신은 그를 잡고 싶었다.
승기를 잡은 뇌신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진다.
일격마다 맺힌 마력의 양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대단했다.
퍼억, 퍼퍽!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에로의 전신이 이리저리 뒤틀렸다.
콰앙!
물론, 피에로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뇌신의 옆구리에 무지막지한 일격을 가했으니까.
파지직!
“……짜릿하네요.”
피에로 가면 아래로 핏물이 흘렀다.
그럼에도 피에로는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히죽거렸다.
“빌런의 성장은 소름이 끼칠 정도란 말이야. 바퀴벌레같이….”
뇌신이 번개의 검을 두 자루 생성해 양손으로 들었다.
자세를 낮추며 뇌신이 피에로를 잡기 위한 일격을 준비한다.
피에로 역시 창을 만들어 냈다.
‘……저건 뭐지?’
그건 검은색의 기이한 감각이 느껴지는 창이었다.
“바퀴벌레라…. 그것 아나요?”
“…….”
“당신과 나, 어차피 마주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 ‘지금의’ 나는 아마 당신을 이기기 어렵겠죠.”
“……지금의? 그건 무슨 소리지?”
“바퀴벌레에게도 목적은 있어요.”
“무슨 개소리야?”
“무자비한 식성과 온갖 병원체의 집합체. 생존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며, 번식력도 기겁할 정도로 대단한 놈들.”
“바퀴벌레 강론이라도 하시나? 하! 곤충학자나 되지 그랬어?”
“그놈들의 목적은 하나예요.”
“생존?”
“아니요. 멸종.”
“……헛소리를 들은 내가 멍청이군.”
뇌신이 달려들었다.
뇌신의 검을 쳐 내며 피에로는 말을 이었다.
“놈들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종의 멸종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병원균도 그 때문이죠.”
“참신한 주장이군.”
뇌신의 검이 허공을 잘라 냈다.
피에로는 허리를 숙이고 몸을 회전시키며 창을 내질렀다.
쩌엉!
“……!”
창을 막은 뇌신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급히 목을 비틀었다.
쩌억!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창의 예기에 살갗이 벗겨졌다.
마력을 두르고 있음에도 너무도 가볍게.
뇌신의 몸이 번쩍하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그 창은 뭐지?”
처음으로 뇌신은 경계의 태도를 취했다.
창과 부딪치는 순간 검이 흩어졌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중상을 입을 뻔했다.
자신의 마력을 흩어 버리는 창이라니.
뇌신의 얼굴엔 불신이 떠올라 있었다.
“우리가 바퀴벌레라…. 맞아요. 우리가 해야 할 건, 하나니까요.”
“그 창이 뭐냐고!”
“멸종을 위한 병원균. 당신들이 바퀴벌레라 부르는 것들의 강력한 무기.”
“……X발.”
“굳이 이름을 붙이면 ‘부정의 창’이라고 해야 할까요?”
피에로 가면 안쪽의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
Damn, hell, fuck 등을 입에 담던 뇌신의 눈이 푸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육신을 버린 번개의 신이 강림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육체가 전격의 형태로 변해 갔다.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비기.
‘제우스(Zeus).’
그의 주변으로 번개의 창이 무수히 떠올랐다.
피에로는 창을 회전시키며 무수한 번개의 창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번개가 친다.
정신을 잠시만 놓아도 감지조차 하지 못할 속력으로 내리치는 공격 속에서.
피에로는 춤을 췄다.
창을 회전시키고, 발을 끌며 몸을 돌리고.
전투가 아니라 창검무를 추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뇌신은 그 부드러운 움직임에 소름이 끼쳤다.
자신의 공격은 A급 던전조차 초토화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피에로의 창 앞에선 모든 걸 태울 번개조차 정전기처럼 변해 버린다.
‘대체 저 검은 창이 뭐기에!’
검은 창의 움직임은 자유로웠다.
그럼에도 규칙이 있었다.
마치 땅에 굳게 뿌리를 내린 채로 자라나 가지를 뻗는 나무 같았다.
문제는 그 가지의 수가 상당히 많다는 것.
검은 창으로 만들어진 가지는 자신의 번개의 창을 어렵지 않게 쳐 냈다.
마력을 흩어 버리는 힘.
그 힘 덕분이었다.
‘대단해…. 어떻게 저런 힘이 존재하는 건지…. 하지만 내가 승리한다!’
뇌신은 부정의 창이 가진 힘에 감탄하면서도 승리를 확신했다.
파지직!
모든 공격을 쳐 내던 검은 창이 처음으로 번개의 창 하나를 놓쳤다.
감전으로 움찔거렸던 피에로가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연스러웠던 움직임에 부자연스러움이 끼어든다.
그리고 그건.
‘틈이다!’
틈이 되었다.
뇌신은 틈을 놓칠 만큼 약하지 않았다.
노련한 사냥꾼이 바로 그였으니까.
한 발, 두 발, 열 발.
창에 적중당할 때마다 피에로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쩌정!
비틀거리는 피에로의 가면에 금이 갔다.
번개의 창은 마력으로 이루어졌지만, 전격과 더불어 물리적인 파괴력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으니까.
‘낯짝 좀 보자!’
뇌신은 점점 균열이 커져 가는 가면을 보며 입가를 씰룩였다.
마력이 빠르게 증발하고 있었지만, 피에로를 잡기엔 부족하지 않았다.
부정의 창이 허공을 긋는다.
그 대가는 컸다.
“……으으으.”
기어이 피에로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수십 발의 번개의 창이 일제히 격추되었다.
쩡!
그와 동시에 가면이 산산이 조각났다.
그리고 드러나는 얼굴.
“……너, 넌?”
어찌나 놀랐던지 제우스마저 풀려 버렸다.
뇌신의 얼굴엔 경악의 감정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