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청탑 (3)
* * *
“대화는 끝나셨소.”
“이지스. 오랜만이야.”
정우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이지스에게 화답했다.
“깜짝 놀랐을 건데….”
“놀라긴 하였소. 갑자기 저만한 거물이 우리의 터전에 발을 들였으니 말이오.”
“그런데 왜 싸우지 않았지?”
“…잊으셨소? 이곳의 열쇠는 오로지 왕께만 있소.”
“…….”
“더불어 저자도 전투 의사가 없었고….”
이지스가 아버지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돌려 본 아버지 역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꽤나 친해지셨군.”
“이만한 대화 상대도 없으니 말이오. 레베카가 아무리 저 세상에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실질적인 거주자에게서 듣는 것만은 못하지 않소.”
“꽤 오랜만에 친구를 사귄 듯하구나.”
아버지 역시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괜찮고요. 그나저나, 이지스.”
“말씀하시오.”
“잠시 대화를 했으면 해.”
“음…… 알겠소.”
정우와 이지스는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결계의 경계에서.
정우는 이지스를 가만히 보았다.
“‘회랑’의 일이오?”
“음?”
“회랑에 입장하여 끝까지 이동했다고 들었소. 그리고 우리는 가보지 못한 장소에 입장했다는 소식까진 전해 들었소.”
“그런 장소가 있는 건 알고 있었나?”
“유추요. 우리에게 그곳은 그저 막다른 벽일 뿐이오. 하지만 왕은 그곳으로 사라졌소. 그럼 비밀 장소가 있다고 봐야 옳지 않겠소?”
“맞아. 비밀 장소.”
그곳은 비밀 장소나 마찬가지였다.
지식의 신.
그의 본체가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마녀들은 지식의 신의 사도나 마찬가지였다.
“이지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시오?”
“마녀 일족에 대해서 다시 한번만 말해 줘.”
“…음. 우리 일족이라면, 그때 말한 것 이외에 특이한 건 없소만….”
“그래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소.”
정우는 마녀의 역사를 들었다.
마녀로 몰려 죽은 사람.
때문에 우르르 몰려 나가 복수를 외치며 마녀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사건.
‘……이상해.’
한번 의문을 품었기 때문일까.
정우는 이지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날 본 적이 있다고? 그래서 신이 된 사나이라는 이름의 기록을 남겼다고?’
이지스가 알려준 책은 분명히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지스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마녀에 대한 일화가 자신이 존재하던 시대 훨씬 이전의 옛이야기처럼 여겨졌으니까.
시점이 맞지 않는다.
아무르타트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지스의 이야기는 별다를 게 없었다.
이미 들은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들은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지식의 신을 다시 찾아가야겠어.’
자신에게 필요한 건 정보라는 것을.
* * *
지식의 신이 지구로 넘어온 건 이미 예상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로이의 기억과 다르다는 것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지식의 신이 얻은 지식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로이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확실한 건 뭔가가 어긋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정우가 택한 방법은 하나였다.
“일본에 가겠습니다.”
“일본이라면….”
“제임스가 다시 일본으로 갔던가요?”
“음… 아니요.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일본은 아니에요.”
“일본으로 넘어오라고 해줘요. 그리고 하시모토라고 사사키 후유 씨에게 연락을 하면 연결이 될 거예요. 세이렌이 있었던 장소로 오면 된다고 전해 줘요.”
“바로 넘어가실 건가요?”
“네.”
“…끄응. 엄청 바쁘네요.”
“그래도 유 과장님이 계신 덕분에 조금은 편하게 움직이는 거죠.”
“말만이라도 고맙네요. 알아주는 거 같아서….”
유아영에게 인사를 건넨 뒤 정우는 곧장 공간을 넘었다.
“…누, 누구야!”
“고, 공간 이동? 어, 어떻게….”
“후유 길드원에게 연락해!”
연구원들이 정우의 등장에 혼비백산하여 소리쳤다.
세계수 묘목 주변으로 연구 장비가 마련되어 있었다.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열 명 정도.
이 정도 대규모 연구에 투입되는 인원이 최소 몇십 명인 걸 감안한다면 굉장히 적은 인원이었다.
연구원들은 당황하긴 했지만 재빨리 버튼을 눌러 경계를 서고 있는 후유 길드원을 호출했다.
정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허공에 떠 있는 세계수 묘목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정우는 묘목이 허공에 떠 있는 점이 마치 이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마치 외부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듯 말이다.
“당신 누구야!”
후유 길드원들이 요란하게 접근했다.
자신을 에워쌈에도 정우는 반응도 없었다.
실제로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고.
‘…음?’
세계수 묘목을 관찰하던 정우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마력에 고개를 돌렸다.
“……어? 당신은?”
다행히도 상대가 자신을 알아봐 주었다.
“야, 적 아니야. 경계 태세 풀어.”
여자가 검을 집어넣으며 다른 한 손을 휘저어 동료들의 경계를 해제했다.
“이렇게 갑자기 등장하면 어떻게 해요? 여기 공간 이동 제한이 걸렸을 텐데 어떻게 뚫었고요?”
“후유 길드원을 부른다고 하던데 그쪽에서 올 줄은 몰랐네요.”
“아! 흐흐. 저 후유 길드원이에요. 정확히는 부길드장.”
“……?”
“저 말고 야마구치 유이와 모리 마사유키도 전부 후유 길드원이에요. 직급은 저와 같고요.”
나카무라 안이 씨익 웃었다.
“통합인가요?”
“에이. 아니죠. 원래부터 하나였어요.”
“부길드장님.”
“아. 뭐, 상관없어. 이젠 경계해야 할 대상도 없잖아.”
“그래도….”
“이 사람 모르지? 한정우 씨야. 우리 길드장의 은인.”
“……아.”
은인이라는 말에 분위기가 변했다.
은근히 남아 있던 경계의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정우는 그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총리 때문에 분산을 시킨 거였군요.”
“그렇죠. 아무래도 한 길드에 전부 다 몸담고 있으면 제약이 심하니까요. 일본 사대 길드라고는 하지만 우리 위로 두 개나 더 있었잖아요.”
그녀의 말마따나 후유 길드를 비롯한 세 개의 길드가 일본 사대 길드로 불린 것은.
‘그들의 입장이 철저히 자국민들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지. 물론, 그렇다고 제국주의를 숭상하는 등의 비정상적인 사상도 아니고.’
가히 존경을 받을 만한 여러 업적을 남긴 게 바로 사대 길드였다.
이미 드러난 여러 비리를 권력과 힘으로 무마시키고 있는 타소가레 길드와 카미나리 길드와는 궤가 달랐다.
그렇기에 일본인들은 사사키 후유를 영웅으로 여겼고, 그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아 일본의 사대 길드라고 불렀다.
“머리가 좋군요.”
각자 어느 정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길드였기에 협력을 하자 거대한 한 길드보다 더 파급력이 컸다.
확실히 괜찮은 선택이었고, 훌륭한 계획이었다.
“타소가레 길드의 빈자리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겠군요.”
나카무라 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썩어 버릴까 봐 고민이에요.”
사대 길드가 하나가 되었으니 소속원들이 느끼는 감정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중소 규모일 때와 대기업일 때의 느낌이 다르듯 말이다.
자신이 몸담은 길드가 자신처럼 여겨지고, 그게 곧 명함과 권력이 되는 건 전 세계적으로도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말하니 아직은 괜찮군요.”
정우의 말에 나카무라 안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도움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나카무라 안이 소리를 죽이며 은근히 물었다.
“S급. 한정우 씨 덕분이라고 하더라고요.”
정우는 고개를 까딱였다.
“사사키 후유 씨가 기회를 얻은 건데요, 뭐.”
분위기는 좋았다.
“근데 여기는 무슨 일이죠? 제임스 밀러 씨를 보러 오셨나요?”
나카무라 안이 본론을 꺼냈다.
“아니요. 세계수 묘목을 보러 왔습니다.”
“아. 음… 아직 연구가 덜 되었는데…….”
나카무라 안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색을 표했다.
“왜 그러죠?”
“아니, 우리 길드장과 총리가 이곳의 권한이 한정우 씨에게 있으니까 무조건적으로 협조하라고 했거든요.”
저것도 마찬가지로요, 그렇게 말한 나카무라 안이었지만 아쉬운 표정이었다.
“다만 외부에서 이계의 물건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싶어서…….”
나카무라 안의 생각이 읽혔다.
‘어지간히 나라를 사랑하는군.’
현재 일본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주 수입원이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이 플레이어 관련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의 대부분은 두 종류의 사업에서 나왔다.
하나는 마정석 분해 장치 임대 사업.
그건 정우의 손에 박살이 났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정석 수거 사업이었는데, 빌런들이 그 루트를 타고 대거 이동한 정황이 발견되면서 다들 일본과의 거래를 꺼려 하게 되었다.
플레이어가 등장한 이후 국격이 꽤나 하락했던 일본으로서는 세계수의 파악을 하나의 기회로 본 게 틀림이 없었다.
그 기회를 놓치게 되었으니 어두운 표정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보상은 해줄게요.”
“…네?”
“제 탑이 곧 완성됩니다.”
“탑이라면… 그 청탑 말인가요?”
“네. 그곳에서 만들 여러 물건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전 세계수가 필요해요. 저것을 연구해도 얻을 건 많지 않을 거예요. 대신에 제가 다른 걸 드리죠.”
“……그걸 한정우 씨가 왜 보상한다는 거죠?”
정우는 나카무라 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만 느끼는 부채감이었으니까.
이 사태를 만든 것에 대한.
자신이 관여된 것에 대한.
정우의 표정을 본 나카무라 안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요. 어차피 저희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해야 하니까……. 더 바라는 건 욕심이죠.”
나카무라 안이 괜한 소리를 했다며 손을 휘저었다.
“잊어 줘요. 미안해요.”
그 말에 정우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원래라면 길드장이 직접 방문을 해야 하지만 지금은 아시다시피 좀 바빠서요.”
“괜찮아요.”
“보아하니 설명이라고 할 것도 없고… 장비를 수거할 시간만 주면 안 될까요?”
“그 정도야 기다릴 수 있어요.”
“…그럼 얼른 준비시킬게요.”
나카무라 안이 꾸벅 묵례를 한 후 몸을 돌렸다.
“연구는 이만 접어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연구 일정이 끝났어요. 장비 철수시킬 테니까 여러분들도 귀가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아니, 갑자기 그러면 어떻게…….”
연구원들의 반발에 나카무라 안이 인상을 구겼다.
“애당초 이 연구는 저분의 허락으로 된 거예요.”
“저분이 누군데요?”
“그것까지 알려 줘야 해요? 다른 연구를 맡겨 드릴 테니 일단 자리를 비켜 주시고….”
약간의 실랑이가 오갔다.
국민 편이라고 불리는 나카무라 안이었지만 냉정한 면이 없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이전에 보았던 그녀는 딱딱 떨어지는 말투에 냉정하기까지 한 어조로 일관했으니까.
오히려 지금은 충분히 연구원들의 사정을 봐주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 헌터요?”
정우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 듯 연구원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그러면 대한민국에 설립되고 있는 청탑의 주인인가요?”
“네. 맞아요.”
“…….”
나카무라 안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고요해졌다.
소란은 사라졌다.
오히려 연구원들이 적극적으로 연구 장비 철거를 돕고 나섰다.
세계수 묘목의 마력을 읽고 있던 정우가 뒤늦게 반응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카무라 안에게 물었다.
“갑자기 협조적이네요?”
“……하아. 이렇게 간단한 걸…….”
“음?”
“…청탑의 마스터라는 걸 밝히자마자 군기가 바짝 들었네요.”
“군기요?”
“제가 멍청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나카무라 안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혀를 찼다.
벌써 해체에 돌입한 연구 장비와 연구원들을 힐끗 본 그녀가 정우를 향해 말했다.
“한정우 씨 직원들이잖아요. 저분들.”
“……?”
“JM 그룹. 청탑 소속이라면서요?”
나카무라 안의 말에 정우는 드디어 상황을 이해했다.
제임스 밀러가 이 연구를 총괄한 것이다.
JM 그룹의 연구진을 불러서.
“그게 아니에요. 저분들, 이곳에 와서 계약을 맺었대요. JM 그룹 아니, 청탑 소속으로….”
입맛을 다시던 나카무라 안이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일본으로 귀화 안 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