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청탑 (2)
세상이 변한다.
혹여나 하는 마음이 들긴 했다.
아버지와 이지스가 전투를 벌이는 장면으로 인해 피폐해진 환경까지.
혹은 침입자에 대한 경계는 물론 뱀파이어라는 종족을 알아본 이지스의 억압까지.
왜 복잡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모든 걸 감안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을 예상한 건 아니었다.
그네 의자에 앉아서.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아이들의 훈련을 보는 눈빛에 정우는 걸음을 멈췄다.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아버지는 그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신이 기억하는 눈동자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고.
“아빠. 여기 보세요!”
어릴 적의 기억이 짧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자신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일까.
고개를 돌리던 아버지의 눈동자가 커지는 게 보였다.
[ 뱀파이어 로드 ]
이름조차 없는 칭호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정우야.”
아버지가 다가와 자신에게 말을 건넬 때까지도 정우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아버지도 막상 다가와 손을 내밀지 못하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쭈뼛 멈춰서 있었다.
미국에서와는 다르게.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보자 정우는 울컥했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하도 기묘해서.
“……정우야.”
우정보다 부정이 먼저일까.
아버지의 음성과 표정으로 내민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전생의 친구가 아버지가 되어 생활하다가 이젠 뱀파이어까지 된 입장에서.
자신 못지않게 기구한 인생의 아버지를 보며 정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었다.
주륵.
입술에서 피가 턱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게 떨린 손이 훅 다가온 것도 그때였다.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는 손길은 차가웠다.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손길.
하지만 정우는 자신을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보며,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손길로 만지는 아버지를 보며.
로이가 아닌.
뱀파이어 로드가 아닌.
아버지로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애당초 이곳을 찾을 때 들었던 마음대로.
* * *
“…….”
말문이 턱 막혔다.
자신의 일 년도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삶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버지에 비하면, 자신의 상황은 훨씬 나았다.
던전에 입장해서.
살아남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발악을 하며 살아남았다.
뱀파이어의 로드를 잡기 위한 수고는.
아니, 이중 던전에 들어간 뒤로 겪어야 했던 고난엔 정우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빠득.
다물어진 입속에서 연신 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교근이 도드라졌다.
흔치 않은.
그리고 긴 서사를 들은 정우의 눈에서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내 옛 기억이 날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혼란스러웠지. 하지만 덕분에 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로이의 기억.
그건 아버지에겐 천운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은 누구인가.
한정우인가.
다니엘인가.
그에 따른 대답은 이미 정해 놓았다.
자신은 한정우이지만 다니엘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 이 일을 끝맺음해야 한다고.
즉, 다니엘과 한정우는 다른 사람이라고 보기가 어렵다는 게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친우와 부친이라는 관계가 괴상하게 얽혀서 그렇지, 아버지와 로이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였다.
전생.
하지만 현재로 이어지는 기억.
정우는 납득했다.
“우릴 위해서?”
정우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와 너흴 보기 위해서.”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가 뜬 정우가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손에 온기를 전해주듯,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덮었다.
오 년 전의 아버지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땐 자신의 손을 덮는 건 아버지였고, 추운 겨울에 자신의 손을 감싸 주는 손길엔 온기가 가득했었으니까.
“……그럼 됐어요. 방법은 찾아볼게요.”
정우의 말에 아버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현재의 삶의 관계에 충실하기로 결정한 자신의 친구이자 아들에게 미안함 마음이 들었다.
정우가 방법을 찾겠다는 건, 자신을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는 말이었다.
가족을 위해서.
“오스카였던가요? 백작을 먼저 보낸 것도 아버지의 결정이었나요?”
철원에서 등장한 뱀파이어 백작을 떠올리며 정우가 물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이미 계획되어 있던 거였다. 대신 내가 로드가 되고선 명령을 바꿨지.”
“명령을요?”
“이전 로드에게서 내려진 명령은 숨어들되 빠르게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그래선 피해자만 속출할 뿐이었어.”
당연한 말이었다.
수를 늘린다는 건 결국 감염을 시킨다는 소리였다.
일반인의 피해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로드가 된 뒤로는 확실한 기회를 포착하기를 명령했다. 힘을 회복하면서.”
“그랬다가 만약에 위험해졌다면요?”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이 된다고 하더구나.”
정우는 그 말을 한 사람을 알 것만 같았다.
“……마왕이요?”
“음…….”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표정이었다.
정우는 아버지가 가진 생각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에 대해서 대부분은 말해도 돼요. …제 추론이 맞다면.”
“그 추론이란 걸 듣고 이야기해야겠다.”
“제약 때문이라면…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제약이라는 단어에 아버지의 눈이 살짝 빛났다.
은근한 기대감도 피어났다.
과연 정우가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관심을 가지는 투가 역력했다.
그렇기에 정우는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마왕의 정체에 대해서.
“……하!”
정우의 길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질렀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탄성이었다.
감탄이나 긍정에 가까운 투였지만 정우의 시선을 잡아끈 건 ‘아쉬움’이었다.
정우 역시 아버지를 안다.
표정, 행동.
그것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가족을 정말로 좋아했기에.
그렇기에 느껴지는 아쉬움이라는 탄성이 주는 감정은.
‘…어쩌면. 하지만 확실히 해야 해. 조금 더 찾아보고. 조금 더 준비를 해보고… 난 뒤에!’
오히려 의심을 옅게 만들었다.
혹시나 하는 모호한 판단이 아닌, 그럴 수도 있겠다는, 반쯤은 수긍한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맞다. 세계수.”
그리고 기어이 아버지 입에서 마왕의 정체가 등장했을 땐.
반쯤의 수긍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기에 열렸던 입술을 애써 굳게 닫으며.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처음엔 놀랐다. 내게는 G급 던전이었던 튜토리얼의 세계에 들어온 이방인이었으니까.”
로드를 잡은 직후.
마왕은 곧장 게이트를 넘어 아버지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협조를 구했다.
“……협조요?”
“그래. 협조.”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아버지로서는 절대 반발할 수 없는 내용의 협조 요청이었다.
어둠의 소멸.
그것과 관련된 것이었으니까.
“……한 가지만 먼저 물을게요.”
정우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최후는 어땠나요?”
와락.
아버지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생각하기도 어려운 참담한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는 것처럼, 아버지는 웃음기 없는 딱딱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뱉은 음성 역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 최후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건 무슨 말이죠?”
정우가 깜짝 놀랐다.
그토록 처참한 상태에서 자신이 도주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자신을 도와줄 이가 없다면, 당시에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야. 정말로 그 누구도 네 최후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정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오 년이 지났어. 네가 돌아오고 우리는 널 회복시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감정을 잃은 상태.
그런 정우를 되돌리기 위해 친구들은 모든 노력을 다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넌 우리가 알던 다니엘로 돌아오고 있었고, 우린 기다릴 수 있었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하지만 그 일이 벌어졌다.
“어둠에 집어삼켜졌던 세계수. 그것의 마력이 폭주했다.”
또다시 어둠의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예전에 대륙을 뒤덮었던 것처럼.
“…….”
정우는 침음을 삼켰다.
이미 예상한 결과이긴 했다.
지식의 신의 기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지식의 신의 기억을 봤어요.”
“음…….”
“어떻게 된 거였죠? 안나가 세계수를 봤을 때, 세계수는 이미 어둠에 감염되어 있었어요.”
“맞아. 그렇기에 단절의 결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았지. 뭐, 별 소용은 없었지만….”
어둠은 세계수조차 막는 게 고작이었을 정도의 기운이었다.
정우도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믿을 건 단절의 결계랄까.
하지만 정우는 회의적이었다.
단절의 결계가 대단한 건 사실이나 세계수가 용인해 주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가 있는 수준이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부수려고 작정했으면 얼마든지 부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정우가 의아한 게 있었다.
“…세계수로부터 어둠의 마력이 뿜어진 게 제가 온 뒤의 사건이라고 했죠?”
“그랬지.”
“…그렇다면 제가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요.”
“너라면… 가능했겠지.”
아버지는 모호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제 상태가 걱정이 되었던 거군요.”
“겨우 감정을 되찾아 가던 시기였어. 무리를 시키고 싶진 않았다.”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괜한 걱정이었군요.”
“…….”
중요한 건 세계였다.
그 긴 세월 동안 어둠의 영역에서 살아왔던 자신의 감정이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될 정도였다면, 세계수를 모태로 탄생한 어둠의 영역은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르타트는요?”
정우는 애써 질문하지 않았던 내용을 입에 담았다.
“아무르타트……라.”
안나와 로이. 그리고 제이는 아무르타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친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르타트에 대해 들은 건 지식의 신으로부터였다.
자신의 친우들은 세계수의 감염만을 보았을 뿐.
아무르타트의 행동에 대해서는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까지 말하기엔… 어쩐지 꺼려졌다.
“놈이라면… 어느 날부터 두문불출했지.”
“원래부터 그런 녀석이었잖아요.”
“아니야. 네가 어둠의 영역으로 들어간 뒤 외로웠던 건지 아니면 걱정이 되었던 건지, 놈이 탑으로 찾아왔어.”
“……?”
“뭐,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원탁의 회의장에 입장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내용이었지만….”
“잠깐만요. 아무르타트가 탑으로 찾아왔다고요?”
“그랬지.”
지식의 신의 기억과는 달랐다.
시점이.
‘차이가 난다?’
달랐다.
정령사의 기억을 빌어 보자면 아무르타트가 세계수를 감염시킨 건 어둠의 영역에 입장한 이 년 뒤의 일이었다.
‘내가 어둠의 영역에 들어간 이후 어둠의 마력이 곧장 반응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고….’
그렇기에 어둠에 잠식당하던 아무르타트는 줄곧 혼자 지내다가 단절의 결계를 넘었어야 했다.
확신이 공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어떻게든… 마왕을 잡았어야 했나?’
얼굴이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