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칭 샤오의 정체 (7)
세계수.
그건 엘프들에게는 신목(神木)으로 불렸으며, 세계의 자연을 유지하는 능력으로 정령과 정령력이라는 개념을 생성시키는 초월자였다.
격이 맞는 이들과만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격이 맞지 않는 이들에겐 조금의 의사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제약이 뚜렷한 초월자.
하지만 그 덕분인지 가진 바 힘은 그 어떠한 존재보다도 방대했던 존재.
나무라는 특성상 새로운 대지에 뿌리를 내려 공고하게 유지시켜 주기를 바랐던 존재.
하지만 어둠에 감염된 아무르타트의 손아귀에 오염되고야 만 존재.
두근.
흐릿하긴 하지만 정우는 분명히 저곳에서 세계수의 감각이 느껴짐을 확인했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본 묘목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었다.
크기도 훨씬 더 커졌고.
“…네가 어떻게 세계수를 키운 거지?”
세계수는 의지를 가진 식물이었다.
식물이라는 범주로 보기엔 적합하지 않았지만, 태생 자체가 나무라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으니, 더 어울리는 단어를 선택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기에 키웠다는 말은 적당했다.
정우는 뜬금없이 발키리의 말이 떠올랐다.
세계수의 가지를 찾아다닌다던 자에 대한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마왕.”
한층 경계 태세를 갖춘 정우가 칭 샤오를 노려보았다.
“네가… 마왕이구나.”
칭 샤오도 S급이었지만 마왕은 격이 달랐다.
세계수라는 단서만으로 칭 샤오를 마왕이라 취급하기엔 무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
칭 샤오 외에 그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수의 가지를 수집하던 마왕.
다른 묘목보다 더 자란 세계수.
그리고 그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칭 샤오.
모든 정보가 칭 샤오의 숨겨진 정체를 밝혀 주고 있었다.
“맞아요.”
칭 샤오는 히죽 웃으며 정우의 생각을 긍정했다.
한 가지가 퍼뜩 떠올랐다.
“…그 모습도 오버레이인가?”
“네. 이것도 오버레이죠.”
그 말에 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돌연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판단.
놀랄 만도 하지만 칭 샤오는 오히려 정우의 공격을 반긴다는 듯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쩌엉!
“제압을 한 뒤에 대화를 나눠도 좋다. 이거로군요.”
정우는 난색을 표했다.
갑작스럽게 끌어 올렸다고는 하나 자신의 전력이었다.
‘내 기감에도 걸리지 않았다고?’
갑작스러운 반발력으로 인한 통증에 정우는 이마에 피를 흘렸다.
어찔한 통증이 전신을 휩쓸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공격을 가로막은 결계의 존재에 소름이 끼쳤다.
전혀 감지하지 못했으니까.
“한정우 씨. 저는 이때를 굉장히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그걸 잠시 투덕거리는 걸로 끝낼 순 없죠.”
“…내가 너와 마주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않나?”
“아니죠. 아니었어요. 하지만 처음은 맞아요.”
“…그게 무슨 소리지?”
정우의 물음에 칭 샤오.
아니, 마왕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장소. 여기가 가장 중요했거든요.”
마왕이 양손을 펼쳤다.
그러고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정우도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 이곳을 한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세계수의 숲이 연상되는 장소였다.
“선물은 잘 받았나요?”
“…….”
정우는 말문이 막혔다.
역시나,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C급 이상의 플레이어 천 명과 세 명의 S급이 계획적으로 공격을 가했다면 어쩌면 위험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비는 했을지언정 놈들은 의외로 정직하게 공격을 가했고.
막상 최고 전력인 S급 세 명은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방치했다.
덕분에 어둠의 마력에 적응한 셈이었으니 정우로서도 나쁠 건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무슨 짓이지?”
적을 강하게 만든 이유.
바로 마왕의 목적이었다.
“세계수에 대해서 얼마나 알죠?”
마왕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신을 등지면서까지 설명을 이어 나가는 마왕을 보며 정우는 천천히 그와 자신을 가로막은 결계에 대한 파악에 나섰다.
‘단절의 결계와는 달라. …마치 뚫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느낌이었어. 정확하게는…….’
마력의 단절.
마력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단절의 결계와는 다르게 방금의 돌진에 따른 반발은 보다 근원적인 무언가에 닿아 있었다.
그런 정우를 내버려 둔 채로 마왕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생각보다 더, 세계수는 근원적인 힘을 품고 있어요.”
마왕이 몸을 빙글 돌린 후 손가락 하나를 폈다.
“세계에 닿는, 근원적인 힘. 그렇기에 우리는 이 나무를 세계수라고 칭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모르시겠어요? 천재로 이름을 날렸던 자치고는 생각이 너무 둔한 거 아닌가요?”
“……!”
“놀랄 것까지야. 여기까지 오면 당신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을 거잖아요.”
“…….”
정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중 던전…. 전 거기서 ‘마족의 뿔’을 얻었죠.”
정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중 던전….’
예상으로 이중 던전은 친우들이 겪는 던전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예전의 자신과 관련이 있든가.
마왕도 자신과 관련이 있었다.
유지석에게 들었던 것처럼.
그렇기에 정우는 혼란스러워했었다.
자신의 친우 중에 마왕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를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우는 묻지 않았다.
그저 마왕의 이야기만 듣고 있을 뿐.
“마족에 대한 기억은 없나 보군요.”
마왕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퀸은 어디에 있죠?”
“……!”
“어떻게 알았는지, 쓸데없는 질문은 사양하도록 하죠. ‘눈’을 피하는 건 꽤 버거운 일이니까요.”
“…눈?”
“음……. 기억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삶을 살면서 판단력이 저하된 걸까요? 이것도 재미있군요.”
마왕이 턱을 쓸었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비틀며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 행동에 정우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퀸과 뿔?’
“…설마.”
“후후. 당신의 당황한 표정은 언제 봐도 어울리지 않는군요.”
마왕이 비웃듯 어깨를 으쓱였다.
“……마족의 뿔이 퀸의 뿔이었나?”
“아직까지 한 개의 뿔만 얻었으면 그렇겠죠. 아마도.”
“…왜 퀸이 마족이지?”
“그건 비밀이에요. 어차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테니까, 궁금증은 뒤로 미뤄 두죠.”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지.”
“뭐죠?”
“…왜 이런 걸 꾸민 거지?”
“꾸미다니요. 계획이라고 여겨 주시면 좋겠군요.”
“말장난은 좋아하지 않아.”
“흐음. 예전과는 또 다른 모습이군요.”
“내 예전을 잘 아는 것처럼 대한다고 해서 네 입장과 내 입장이 달라지는 건 아니야. 질문에 대답이나 해.”
“……이것도 나쁘지 않군요.”
“뭐라고?”
“아니요. 그냥 혼잣말을 좀 했네요. 뭐, 좋아요. 어차피 당신과 저는 이곳에서 결판을 내야 하고, 전 당신에게 해줄 말이 있으니까요.”
마왕이 제 볼을 잡았다.
쭈욱!
“……오버레이인가.”
“제가 제작자인데 제가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마왕은 칭 샤오의 얼굴을 벗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를 벗어 버렸다.
‘…….’
피부가 저릿해진다.
뒷골이 싸늘해진다.
단순히 거짓된 육체에서 본신으로 돌아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가벼운 행동에.
그저 가면을 벗은 것처럼 가볍게 벗어젖힌 거죽의 안쪽에 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자가, 마왕.’
확실히 마왕이라는 이명이 어울릴 정도의 인물이었다.
확연히 달라진 존재감.
S급이 몇이나 달려들어도 상대하기에 모자랄 것만 같은 존재감에 정우는 뜬금없이 한 명을 떠올리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왜 웃죠?”
“……수르트가 헛된 꿈을 꾸고 있었어. 그놈은 날 먹었어도 널 못 잡았겠군.”
“그 열망이 쓸모가 있는 거예요.”
정우는 마왕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의외로 마왕은 한국인이었다.
놀랍게도.
“오랜만이네요. 이 얼굴은.”
마왕은 자신의 얼굴을 쓸며 정우를 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깊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당신도 오버레이를 사용한 것과 같지 않나요?”
“…내가?”
정우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랐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정우란 사람으로서의 기억은 온전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나 가족 간의 추억이 가득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긍정하는 부분도 있었다.
평생을 한정우라는 사람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전생이 현재에 영향을 미쳤다.
‘다니엘…. 그 입장에서 보면 난 오버레이를 사용 중인 것일지도 모르겠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 질문엔 대답하지 않을 건가?”
툭.
마왕은 뜬금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드드드.
나무뿌리가 움직이며 의자를 만들어 낸다.
마왕의 뒤에 하나.
자신의 뒤에 하나.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은 마왕이 말했다.
여유가 없다는 것치곤 매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눈을 피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그 눈이 뭐지?”
“설마… 거기까지도 파고들지 못했던 건가요?”
정우의 질문에 마왕은 진짜로 놀란 듯 상체를 기울였다.
‘파고들다?’
무언가가 잡힐 듯 말 듯했다.
“‘제약과 각인’.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개념이 아닌가요?”
마왕의 말에 정우는 침음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뱀파이어의 성에서 묘목을 하나 얻으며 떠오른 기억엔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정신의 신.
그녀의 부정(否定).
“같은 상태라고만 해두죠.”
“…….”
그 말에 정우는 생각에 잠겼다.
‘제약과 각인이라면 정신의 신의 그것과 비슷해. 그렇다면… 말할 수 없거나 잊은 거다. 무슨 대가를 걸었는지 알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대가를 아는 순간 상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상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도 파악할 수 있었다.
상대를 파악하는 건 꽤나 중요한 것이었다.
마왕에 대한 건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유지석 협회장이 의도적으로 지웠을 수도 있겠어.’
유지석이 마왕과 관련이 있음을 확신했다.
과거엔 같이 활동하던 친구였다고 했으니, 더더욱.
다만 그 의도만큼은 불순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소란을 막거나 쓸데없는 분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하지만 제약과 각인치고는 꽤나 많은 걸 대답할 수 있는 듯했다.
“퀸을 데리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의외로 마왕은 퀸 마야의 존재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퀸은 왜 찾지?”
“왜긴요. 제가 그녀의 반쪽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스윽.
허공에서 일 미터 크기의 뿔이 나타나 마왕의 손에 떨어졌다.
‘확실히… 메아리의 것이다!’
“넌 내가 퀸을 데리고 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푸흡. 몇 번이나 존재를 노출시켜 놓고 무슨 소리예요?”
“…….”
마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
“자, 한정우 씨.”
“…….”
“그리 많지 않은 시간을 이렇게 사용하지 말죠. 제가 세 가지를 물을 테니, 당신에게도 질문 세 가지를 허락하죠.”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눈가를 좁혔다.
“잘 선택해야 해요.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전 많은 걸 걸었으니까요.”
‘……많은 걸 걸었다고?’
정우는 혼란스러웠다.
마왕의 태도는 예전부터 이상했다.
철원에서 보았을 때는 친근함으로 접근했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여러 상황 가운데에서도 여유를 두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장에 필요한 조건을 여럿 준비해 둔 것만 같았다.
‘…뱀파이어 백작을 묶어 둔 것도, 어쩌면 저놈일지도 모르겠어.’
의외로 활동이 적었던 뱀파이어 백작을 떠올리고는 정우는 침음을 흘렸다.
굉장히 예전부터 자신은 마왕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날 처리하지 않았지?”
“서두가 잘린 것 같지만 유추는 가능하니 넘어가죠. 그나저나 저부터 질문을 한다고 했는데… 얼렁뚱땅 본인이 먼저 질문을 하는군요.”
헛웃음을 흘린 마왕이 대답했다.
“힘이 없을 때 처리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퀸이 함께했을 때부터, 전 당신이 이 자리에 서기만을 기다렸던… ‘존재’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