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어둠의 마력 (4)
* * *
“수르트가요?”
유서린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윽고 단단한 감정이 자리 잡는다.
“이번 기회에 죽이죠.”
그녀는 자신의 검을 틀어쥐었다.
정우는 리정환에게 들은 내용을 유서린에게 언급했다.
‘말하는 게 낫겠지. 놈을 유인하려면….’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놈을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어둠의 영역에서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까.
정우는 수르트를 떠올리면 드는 살의를 억눌렀다.
아니, 애당초 빌런이란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살의의 대상이었다.
“제게 이야기를 했다는 소리는… 유인을 바라는 건가요?”
확실히 유서린은 머리가 뛰어났다.
“그렇겠죠. 제가 은근히 정보를 흘릴게요. 다음 일정 정도로 잡으면 편하겠죠. 아무래도 여태까지 헌터의 일정은 협회에서 관여했으니까요.”
내친김에 전화를 걸어 일정을 잡은 그녀가 입술을 핥았다.
불의 왕, 수르트.
하지만 그의 재능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타인의 것.
때문에 수르트를 부르는 이면적인 칭호는 ‘강탈자’였다.
강탈의 능력.
‘쩝. 어떻게 그런 능력이 존재하는 건지….’
유서린은 그 능력을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녀가 정우를 다시 보았다.
“옷이 조금 찢어진 걸 제외하면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네요.”
꽤나 치열해 보였던 로드와의 전투의 여파가 예상보다 적어 보여서 그녀는 솔직히 놀랐다.
한정우란 사람의 수준이 아득히 높은 곳에 있다는 것에.
‘……근데 왜지?’
유서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상하지가 않아.’
정우의 성장은 십 년의 세월을 통틀어도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 어떤 플레이어도 이런 성장은 보이지 못했다.
지상 최악의 재능이자 모든 플레이어 위에 군림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인 ‘마왕’보다도 더.
어떤 면에서는 경계도 해야 하고.
어떤 면에서는 질투도 해야 했다.
심지어 천재로 이름을 떨쳤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유례없는 천재.
그런 수식어가 따라붙었던 건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기이하게도, 한정우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은 사라진다.
질시, 경계, 분노, 좌절….
이상하게도 한정우의 저런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 납득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곤 흠칫 놀랄 때가 한두 번이었던가.
당연한 옷을 입은 것처럼, 한정우의 수준은 당연해 보였다.
‘…심지어 스스로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잖아.’
유서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가끔 ‘격(格)’이란 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릴 때의 아버지나 대마법사.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마왕이나 뇌신 역시 격이란 걸 지녔다.
지금은 상당히 따라잡아서 그 차이가 미미하다고 여기지만.
‘……왜 다른 격을 지니고 있는 거 같지?’
정우의 격은 그런 격과는 달라 보였다.
한 단계 고차원적인 격의 느낌.
자신은 평생을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감각이 그녀의 뇌리를 장악했다.
정우는 유서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경외심이네요.
메아리의 말 때문이었다.
유서린이 자신에게 경외심을 품었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저쪽은 전부 다 처리된 건가요?‘
“…팀 버튼 협회장은 꽤 유능한 사람이니까요. 아마 곧장 데니 라이언에게 고소부터 할걸요.”
소송의 나라, 미국다운 결말이었다.
“처리가 되었다는 소리고…. 남은 사람은요?”
“김하란 플레이어는 전투를 복기하고 있고요. 사사키 후유 플레이어도 남아 있어요.”
“사사키 후유 씨는 왜 남아 있는 거죠?”
“한정우 씨 보고 간다는데요?”
“음……. S급이 된 것 때문에 그런 건가.”
정우의 말에 유서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죠….”
“뭐가요?”
“제가 S급이 된 것도 던전을 클리어하면서였어요. 클리어 보상. 그걸 받으면서 벽을 넘었어요.”
“근데 이번엔 아니라는 거죠?”
“…맞아요. 전투 도중에 벽을 넘는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들은 것도 없고….”
플레이어의 성장은 공략에 ‘성공’했을 때 주어진다.
던전의 클리어.
퀘스트의 클리어.
던전 브레이크의 클리어.
모든 건 목적을 완료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하지만 사사키 후유는 도중에 성장했다.
그건 플레이어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방식이었다.
실시간의 성장.
마치 게임의 경험치 같지 않은가.
“…그리고.”
유서린이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동화율이라는 것도 신경이 쓰여요.”
“…동화율이요?”
정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동화율.
그것은 자신에게는 등장하지 않는 수치였다.
하지만 이변이라는 게 등장한다고 모든 플레이어에게 퀘스트가 주어졌을 때.
‘동화율도 등장했어…. 무엇에 동화가 되는 걸까?’
동화율은 퍼센트라는 수치로 등장했다.
처음엔 등급에 따른 퍼센트라는 주장이 있었다.
등급이 높을수록 퍼센트 수치는 높아지니까.
하지만 A급 플레이어보다 수치가 높은 B급 플레이어가 나오고, S급의 플레이어보다 수치가 높은 A급 플레이어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재능 혹은 재능의 활용 영역이라는 주장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건 제 능력과 관계가 있다는 거예요.”
“능력과 관계라….”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정우는 이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지구라는 세계와 연결된 이유까지는 모르더라도 이 사태의 시작점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 떠올린 게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세계수로 만드는 새로운 세상.
그곳으로 도주하는 것이 세계수와 세운 계획이었다.
외부를 정확하게 감지하진 못했지만 어둠의 영역 내부에서 확인한 바로는 어둠의 마력은 도주하는 친우들을 비롯한 최후의 생존자들을 막지 못했다.
그 말인즉, 세계수와 세웠던 계획은 성공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잘린 기억 뒤에.
‘난 어둠의 영역에서 나와서 친우들에게 돌아간다. 감정을 잃은 채로….’
정우는 분명히 유토피아로 귀환했다.
다시 통로를 열었으며, 닫았을 것이다.
아니, 어둠의 근원을 막고 나왔을 때 친우들이 반겨 주었…….
‘……어?’
갑자기 소름이 밀려들었다.
통로를 열거나 게이트를 넘었다는 기억이 없었다.
기억 자체가 아직 전부 다 복구가 된 게 아니기 때문에 확신을 할 수는 없었지만….
‘통로를 열고 단절된 공간을 찾아서 이동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느낌이 들었다.
세계수의 흔적을 찾아서 통로를 열어 이동했을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아.’
제로라는 것에.
그렇다는 건.
‘설마… 세계수가 통로를 통해 다른 장소로 넘어가는 도중에 어둠의 영역도 같이 넘어간 건 아닐까?’
어둠의 영역이 통로를 넘어가지 못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부정적인 힘에 의해 오판을 한 것이라면….
‘아니. 일단…… 더 생각해 보자.’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이 간극이 의문에 대한 답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동화율.
그 개념도 지금 떠올린 간극과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았다.
“거기까진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군요. 아직 아는 게 없어서….”
“그렇겠죠. 이건 아직도 설왕설래 말이 많은 부분이니까요.”
“그나저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뭐죠?”
“칭 샤오의 움직임은 없었죠?”
“아, 네. 그때 이후로 인천 전역을 관리하고 있긴 한데, 아직은 움직임이 파악된 건 없어요.”
사람을 풀어 파악하는 관리만이 아니었다.
컨트롤 타워.
S급이라는 마력을 감지하기 위해 한국은 컨트롤 타워까지 사용했다.
다른 지역에 대한 감지가 허술해지겠지만, 그만큼 인력을 풀어 보완하기로 결정했다.
칭 샤오는 몇 개의 던전 브레이크를 감수할 정도의 가치를 지녔으니까.
“그래도 사람이 있는 지역은 길드와 협력해서 전부 파악하기로 했어요. 방치한 곳은 산 같은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뿐이니까요. 근데 칭 샤오의 움직임을 물어본다는 건… 때가 된 건가요?”
유서린의 눈이 번들거렸다.
칭 샤오는 전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베일에 싸였던 이의 행적을 밝혀냈으니, 유지석이 총력을 기울여 놈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네. 놈을 잡을 겁니다.”
직감이었다.
칭 샤오가 자신의 단절된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일본으로 곧장 가고 싶었다.
묘목이 자신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칭 샤오를 잡는 게 더 중요했다.
던전을 터전으로 삼는 방법은, 자신의 것.
즉, 마녀의 마을을 유지하는 방법과 동일할 터였다.
‘아니. 더 확실한 방법일 거야.’
정우는 자신이 가진 열쇠를 떠올렸다.
회랑의 열쇠.
대도서관까지의 복도 혹은 그 이전의 공간조차 출입에 열쇠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야 던전으로의 이동을 선택할 수 있었다.
‘예전엔 몰랐는데 이젠 알겠어. 이지스. 그가 이 열쇠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던전으로의 출입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거야.’
반대로 말하면 이지스가 없다면 던전을 오가는 건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레베카는 게이트를 오가는 게 가능한데 이지스는 불가능한 이유가 그거지. 이지스보다 더 강해진 메아리조차 통로를 오갈 수 있는데 말이야….’
“곧장 갈 건가요?”
“흥분하신 모양인데, 전 여기서 먼저 할 일이 있어요.”
“뭔…… 아!”
유서린의 흥분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놈들부터 잡아야죠.”
“…….”
유서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검을 틀어쥐는 손의 힘줄이 대답을 대신했다.
* * *
재능.
“참 재미있는 단어 아니야?”
“…으음.”
수르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왜 눈길이 갔는지 모른다.
성장의 보고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판단에 감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구멍이 뚫린 형태.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비정상적인 형태에 수르트는 매혹이 되었다.
마치 그 구멍들이 빼앗은 재능의 판처럼 여겨져서.
“뭔가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단 말이야.”
강탈의 능력을 지닌 자신.
구멍 뚫린 재능을, 의외의 속도로 만개한 한정우.
자신의 유추대로 구멍을 채우는 것으로 빠른 성장이 가능해졌다면.
‘난 마왕을 뛰어넘어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거야!’
초월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곧 도착하는군. 붐은 필요가 없소?”
“계약대로 보냈잖아.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제물의 인장은 그 자체만으로 효과를 보인다.
제약과 보상.
그것에 집중된 인장은 생명을 매개체로 성장에 집중할 뿐, 다른 효과는 적었다.
이미 S급이 확실한 이상, 제물의 인장은 더 이상 가치가 없었다.
물론, 붐의 능력이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당신과 함께하는 작업인데 문제가 있을 리가 없지.”
적어도 스나이퍼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알렌 보머도 ‘피에로’에 시선이 팔려 있고.
무슨 이유에선지 대마법사는 한국에 발이 묶였다.
둘이 아니고서야.
“김하란은 한국으로 귀환했고…. 유서린은 애리조나 협회를 방문했으니, 지금이 기회이긴 하군.”
“내 일에 참여해 준 걸 무한히 감사하지.”
“흠. 어차피 놈은 제거해야 하니까 나쁠 건 없소.”
수르트가 땅을 박차며 스나이퍼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속셈이야 모를까.
하데스와 발키리의 부재가 확실한 이상, 자신을 견제할 이는 스나이퍼밖에 없었다.
‘마왕이 잠잠할 때 빨리 성장해야 하니까….’
수르트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빈사 상태의 적.
강탈을 위한 조건을 무너트릴 가장 강력한 존재를 힐끗 보며, 수르트는 품 안의 물건을 떠올렸다.
‘푸흐. 네가 남은 게 내겐 천운이다. 원거리? 그 거리가 네 기회를 빼앗을 테니까.’
비틀린 미소를 지우며 스나이퍼를 보았다.
“여기서부턴 혼자 가시오.”
걸음을 멈춘 스나이퍼의 손에는 거대한 총이 들려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수르트가 땅을 박차며.
그랜드 캐니언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