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어둠의 영역 (3)
읽어.
…읽지 못하겠어.
버텨.
…버티지 못하겠어.
저항해.
…저항할 수가 없어.
이겨 내.
…내가?
…저걸?
수백 년에 걸친 세월은 어느 순간 심어진 씨앗을 움트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감정이 사라진다.
명령과 부정.
두 가지만 남아 발악을 해댈 뿐이다.
어둠의 마력이 한 차례 요동을 친 이후, 다니엘은 정말 죽을 각오로 움직였다.
어둠의 마력은 한 점을 향해 흘렀고, 다니엘은 그 중간을 틀어막은 채로 어둠의 흐름에 저항했다.
흐름을 읽고.
흐름에 버티고.
흐름을 저항하며.
흐름에 이기기 위해서.
또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오백 년.
도합 구백 년의 사투 끝에, 어둠의 마력이 잠시 뒤로 물러섰다.
노고와 같이 몰려들던 기운이 일순간 사라지자 다니엘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바닥을 짚었다.
손아귀에서 바스러지는 흙과 같은 잔해를 멍하니 보는 그의 모습은 애처로웠다.
놈을 밀어냈다는 승리의 도취는 없었다.
견뎠다는 것을 자축할 만한 여력도 없었다.
단지.
놈의 후퇴에 몸을 웅크리고 힘을 기를 뿐이다.
왜 내가 이걸 해야 하지?
왜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까?
한순간 들었던 의문이 바스러진다.
머릿속이 멍했다.
어둠의 마력을 활용하면서 그 여파가 다니엘의 정신에 스며들었다.
몇 번이나 꺾일 뻔했지만, 그럼에도 긴 세월 동안 꺾이지 않은 의지가 흔들렸다.
무엇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들어와 있는 건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둠의 마력이 이젠 기존의 마력을 대체할 만큼 강력해졌다는 것만이 유일한 변화였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조차 자지 않은 채 버텨 온 시간이 구백 년이다.
처음에는 대략적으로만 느껴졌던 시간의 흐름도 어둠의 마력을 사용하면서부턴 확실하게 인지가 되었다.
태양과 달, 별을 비롯한 그 어떤 자연적인 모습이 없는 이 기이한 공간에서도.
유일하게 확실히 인지되는 것이 바로 시간이었다.
저벅.
재와 같은 흙을 움켜쥔 채로 잠시 웅크리고 있던 다니엘이 누군가의 접근을 들었다.
인위적으로 내는 발소리.
자신에게 득달같이 달려들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이곳에 입장하여 처음으로 만나는, 의지였다.
다니엘은 몸을 일으켰다.
이따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조차 지워 버렸다.
그저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그게 육체를 지배할 따름이었다.
정신은 차근차근히 무너지고 있었다.
상대의 모습이 보인다.
괴물이라 불릴 법한 여러 기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던 놈들과는 달리, 처음으로 상대는 어느 정도 완성된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두 개의 머리를 지닌 것만이 다를 뿐.
놈의 형태는 거인족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두 개의 머리는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다.
뱀.
붉고 짙은 두 갈래의 혀를 날름거리는 두 개의 머리가 자신을 굽이 내려 보았다.
무어라 말을 건넨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 말뜻을 알지 못했다.
들리지도 않고,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두 갈래의 혀가 쯧, 하는 형태의 모양새를 그린 것만큼은 다니엘도 인지할 수 있었다.
감히!
평상시라면 들지 않았을 감정.
하지만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의 감정이, 생각이, 판단이 어떠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지금에는 당연한 감정이.
다니엘을 휩쓸었다.
격랑과 같은 일순간의 감정을 폭발시킨 그의 주변으로 어둠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어둠의 마력은 여전히 어둠의 영역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캬아-!
적어도 이 일대만큼은, 다니엘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 사실에 찢어진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쫙 벌린 두 마리의 뱀이 다니엘을 향해 짓쳐 들었다.
* * *
“……쿨럭.”
다니엘은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폐가 오그라들 정도의 고통이 전신을 누볐다.
후들후들!
손이고 발이고, 떨리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눈앞이 빙글 도는 상황에서도 다니엘은 전신을 다그쳤다.
‘…여긴, 위험해.’
어지간한 존재라면 전투의 여파만으로도 기겁하겠지만, 여긴 아니다.
두려움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장소.
그게 그나마 느껴지는 건 초입에 불과했다.
죽이고 죽이는 곳.
어떻게든 상대의 목을 따고, 심장에 자신의 무기를 쑤셔 넣는 곳.
그곳이 바로 어둠의 영역이었으니까.
최소한 놈들을 쓸어버렸던 장소까진 가야 했다.
어질거리는 머리로, 다니엘은 겨우 발을 뗐다.
하지만.
풀썩!
몇 발짝 걷기도 전에 쓰러진다.
어둠의 마력이나마 사용하지 못하는 다니엘의 신체 능력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으니.
지금의 상태를 버틸 정도의 체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스르르.
애원하는 감정과는 달리 정신이 뚝 끊긴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랬다.
조금의 기억이 떠올랐다.
두 개의 뱀 머리를 지닌 거인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온전한 형태를 지닌 무언가와의 전투가 처음이어서.
그리고 등장한 누군가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잊을 수 없었던 그것조차 잊고 있던 기억이 이제야 선명히 떠올랐다.
처음으로.
스승이라 부를 수 있었던, 이가.
끔뻑.
저 멀리 달아났던 정신이 급속도로 다가오자, 다니엘은 두 눈을 부릅떴다.
‘살았나!’
두 눈만 부릅뜰 뿐, 탈진한 육체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누워 꿈틀거리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니엘은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육체는 아직. 마력으로 보호하기 전엔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해. 그에 반해 마력은…….’
“……!”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다!’
마력의 회복은 빨랐다.
비록 어둠의 마력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몇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싸울 수 있었던 근원이었기에 거부감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니엘은 마력을 움직였다.
말라비틀어진 육체가 마력의 반응에 비명을 질러댔지만.
탁한 다니엘의 눈동자는 한 차례의 떨림만이 감돌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움찔.
손가락 끝이 움직이고.
다리에 힘이 들어갈 무렵.
다니엘은 근육을 강제적으로 쥐어짜 대충 상체를 일으켰다.
‘여긴?’
앞뒤로 절벽이 보였다.
마력을 퍼트려 주변을 읽었다.
‘…지하다. 틈으로 떨어진 건가?’
기억을 잃기 전과 상황이 달라졌다.
‘…그래도, 살았군.’
다니엘이 벽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검은 하늘 사이로 경계가 보였다.
‘생각보다 깊다.’
최근 들어 멍해졌던 정신이 예전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마야가 제정신을 차리면 좋겠는데….’
대화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힘겨운 일이었는지.
의지되는 상대가 없다는 것이 이토록 버거운 일이었는지.
다니엘은 처음으로 겪는 여러 감정 속에서 작게나마 안도했다.
목숨을 건지고 있음에.
그리고.
‘…그것. 분명히 지성을 가진 놈이었다.’
뱀 머리의 거인.
무어라 표현을 하려 했지만 끝내 통하지 않았던 대화 속에서 전투를 감행했다.
놈은 버거웠고 위험했다.
놈의 두 개의 주둥이에서 떨어지는 독액은 저주로 말라붙은 대지마저도 녹일 정도로 강력했다.
‘덕분에 몇 가지 기술을 익혔지.’
어둠은 온갖 부정적인 정의의 집합체였다.
그 중엔 타인의 재능을 질시하여 강탈하는 것도 있었다.
위기의 순간.
다니엘은 뱀 거인의 능력을 강탈하여 독액의 범람에서 살아남았다.
그 외에도 놈에게서 빼앗은 재능들이 있었다.
탐식의 능력.
다니엘은 보다 강력하며 특별한 능력을 ‘권능’이라 분류했다.
그리고 그 권능을 습득하고서야 다니엘은 알게 되었다.
이 어둠의 영역.
그 근원이 되는 마력의 성질 중 가장 중요한 게 바로 ‘탐식’이라고.
‘치유, 정화, 해제… 긍정적인 능력을 제외한 모든 부정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이 마력이야.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더없는 파괴력을 부여할 수 있는 마력.’
이제야 조금 알겠다.
다니엘은 이 기이한 마력의 껍질을 한 겹 벗겨 낸 느낌이었다.
이 마력은 이로운 개념으로 접근하면 안 됐다.
어둠의 마력을 정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참여했는가.
각 교단은 성전(聖戰)까지 선포하며 어둠의 영역과 싸웠다.
하지만 그 모든 교단은 무너졌고, 사제들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교단은 무너졌다.
모조리.
여태껏.
대륙엔 위기가 없는 게 아니었다.
마왕이라 불릴 만한 자가 등장하기도 했고, 마룡이라 칭해지는 족속이 등장하기도 했다.
놈들의 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고, 놈들을 상대하는 건 보통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때마다 도움을 주었던 신성력의 주인들이, 이번만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은 부정하는 곳이니까.
이 마력 자체는 치유와 정화, 해제 등의 긍정적인 능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즉, 압도적인 화력으로 이곳을 정화하지 않는 이상 이곳의 부정한 마력을 지우는 건 불가능하단 소리였다.
대륙 전역을 뒤덮으며, 대부분의 생명을 모조리 앗아간 이 거대한 기운을 압도해야 한단 말이었다.
‘…그런 건 불가능해.’
어둠의 마력을 다루며 다니엘은 확신했다.
이 마력을 일거에 지우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과 세계수가 겨우 버틸 정도로, 이곳의 마력은 방대하며 거대했다.
‘그래서 확신이 든다…. 잘, 들어왔다고.’
어둠의 영역 내부에서가 아니면 이 영역을 축소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들어와 보니 알겠다.
묘목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선 잠시 물러났던 건, 그것의 존재감에 몸을 사렸던 게 아니다.
탐구심.
자신과 전혀 다른 힘을 지닌 세계수 묘목을 탐구하여, 결국 자신의 것으로 삼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공을 들인 거야.’
그렇기에 또다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기운은.
자연적인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내뿜는 인위적인 기운이었다.
하지만 이게 가능이나 한 걸까.
모습은 드러내지도 않은 채, 이 방대한 영역을 뒤덮는 기운을 내뿜는 것이.
그 기운이 마치 살아 존재하는 것처럼 생명을 탐하고 변한다는 것이.
다니엘은 구덩이에서 숨을 고르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지쳤던 정신이 회복된 것만으로도, 자신에겐 너무 다행인 상황이었다.
몇 년이나 걸릴까.
근 천 년이 되어서야 어둠의 마력을 스스로 이용하는 적을 만났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지성이 있음이 분명한 존재.
이 기운의 주인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놈을 이기기 위한 시간은 또 얼마나 걸릴지.
다니엘은 막막하기만 한 미래를 지워 버리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어.’
다니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이 구덩이의 모양새는 특이하네.’
어둠의 마력이 뒤덮은 대지는 평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이리저리 갈라지고 속을 드러내는 구덩이가 곳곳에 있었지만, 이 정도로 깊은 구덩이가 일자로 쭉 뻗어 있는 건 다니엘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심지어.
‘어둠의 마력이 조금 옅어. 지하라서 그럴까? 여기라면 뱀 머리 놈도 날 찾는 게 더딜 것 같군.’
이곳은 도피처로는 최상의 공간이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안도감을 지하에서 느끼다니.
다니엘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유독 도드라진 마력의 감각에 주변을 살펴보다가 눈을 반개했다.
‘…저건 뭐지?’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질적인 감각.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묘목처럼, 그것 역시 미약하게 지하에서 생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검?’
한 자루의 검이었으며, 검을 든 자였다.
“검의 신!”
다니엘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