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다니엘 (4)
세계수는 세상을 일군다.
단절의 결계 안쪽의 태고의 환경이 바로 그러했다.
이를 보는 순간, 다니엘은 확신했다.
세계수를 희생시키면.
‘새로운 토양을 만들 수 있다.’
어둠의 기운의 손길이 닿지 않는 새로운 장소를 만들 수 있음을.
그렇기에 확답을 할 수 있었다.
어둠의 영역 앞에서 고민하고 고민했던 그 결과물에 대하여.
“나의 희생이라….”
“희생이라고 해봐야 다른 건 아니에요. 능력을 최대한 억제한 상태로…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거죠. 평생의 터전을, 바꾸는 거예요.”
“터전을 바꾼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내용이긴 하구나.”
“…해봐야 할 거예요.”
“생각을?”
“네.”
다니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세계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모든 게 변하고 있었다.
찬란한 유산은 범람하는 강물에 휩쓸려 사라진 도시처럼 부정한 기운에 휩쓸려 사라졌다.
자신과 격을 논할 수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남은 건 눈앞의 아이뿐이었다.
세계수는 자신의 아이를 통하여 계속 이 아이를 눈여겨보았다.
자신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무수한 세월을 살아왔다.
자신과 비슷한 격의 이들 역시 각 종의 생명치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낸 이들이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는 다르다.
인간의 범주.
평범한 인간이 자라나 노환으로 죽기 전까지의 시간을, 이 아이는 아직 살아가는 중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격으로 한계를 뛰어넘은 아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자연과 닮아 있었다.
다니엘은 마력의 사랑을 받는 자이다.
세상에 이런 자가 존재하리라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가정조차 해본 적이 없구나. 마력의 사랑은 나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때가 내 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니….’
하지만 이 아이가 등장한 이후, 마력의 사랑은 갈대처럼 방향을 옮겼다.
자신이 아닌, 이 아이에게로.
자연의 대변자라고 생각했던 자신과는 달리 인간이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는 이 아이에게로.
이 아이는 아직 친우를 잃지 않았고, 긴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지인이 자신을 두고 늙어 죽는 경험을 겪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모되지 않았다.
감정과 생각이.
‘그렇기에 이 아이의 주변엔 나름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넘쳐나는 것이지.’
어지간한 시대라면 능히 선두를 다툴 만한 강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 긴 세월 내에서도 흔치 않았던 이들도 더러 있었다.
검으로 태산을 가르는 이가 충성을 맹세했고.
어둠을 벗 삼는 이가 이 아이의 곁을 지켰으며.
진리를 맛본 마법사가 이 아이를 사모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전설적인 무구를 만들 만한 장인이.
정령의 가호를 받은 아이가.
자연의 신비의 비밀에 닿은 소수 종족의 보물이.
한 신의 편애적인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가.
평생에 걸쳐 한 세대에 하나씩이나 등장했던 전설적인 이들이 하나같이 이 아이를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익히 등장해 왔던 전설들인 자신을 쉬이 뛰어넘어 불가해의 영역에 닿은 아이의 곁에.
‘혼란스럽구나.’
불과 몇십 년 만에 자신과 동격을 손에 넣은 아이다.
몇 배에 달하는 시간이 주어지면 어디까지 다다를지 그 끝을 모를 정도의 천재였다.
마력의 사랑을 받아 마법을 정립하는 자.
수천 년의 긴 세월 동안 등장했던 천재들조차 바꾸지 못한 모든 마법 체계를 바꿔 놓은 자.
그게 바로 눈앞의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판단이다.
어둠을 이기기 위해선 자신들이 ‘도주’해야 한다고.
“…한 점의 빛도 없는 장소에 홀로 떨어질 것이냐.”
아이는 혼자 남을 예정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고, 그 세계에 남은 생명을 모조리 옮길 생각이다.
아공간.
그것과 닮은 또 다른 형태로.
하지만 마법이란 건 나름의 규칙이 있는 이능이었다.
특히나 공간을 여닫는 건, 이 아이조차 쉽게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므로.
모든 이가 넘어갈 때까지 공간의 통로를 유지한다면, 이 아이는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누군가가 문을 걸어 잠가야만 부정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터인데.
생명을 탐하고 존재를 탐하는 저 부정한 기운은 자신의 탐식을 좇아 열린 통로로 넘어가고자 총력을 다 할 것인데.
“…….”
다니엘은 입을 다물었다.
통로를 열고 세계수를 넘기는 건 자신으로서도 상당한 각오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세계수가 새로운 대지를 만들고 뿌리를 내리며 환경을 조성할 동안.
그곳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으니까.
어둠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지역을 지키는 이는 자신뿐이 아니다.
현재로선 세계수의 역량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었다.
세계수는 다른 장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힘을 갈무리해야 할 테고.
‘그때부터 이곳에서 버티는 건 내가 될 거야.’
선택의 여지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제 힘들잖아요. 더 버티는 게.”
없었다.
세계수는 한계에 다다랐다.
예상대로.
“…….”
세계수는 텅 빈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절의 결계?
마음만 먹으면 부수고 넘어갈 수 있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저 결계야말로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랄까.
“내 아이들이 단절의 결계라 붙인 그것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랬을 거예요. 대단한 마법이긴 하지만, 저도 어렵지 않게 들어왔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 결계가 꽤 도움이 되는구나.”
“왜죠?”
“…내가 펼쳐야 하는 영역에 한계를 정해 주니, 외부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존재 자체로 주변에 영향을 미쳤다.
태고의 환경.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니다.
존재함으로써 생성된 것일 뿐.
과거엔 보다 넓은 지역이 세계수의 영향력 안에 속했다.
하지만 어둠이란 부정한 기운이 등장하고, 그것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짙어질수록 자신의 짙은 영향력의 태고의 환경은 부담으로 작용되었다.
때문에 엘프들이 단절의 결계를 만들 때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소리는…….”
다니엘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단절의 결계가 생긴 건 꽤나 오랜 과거의 일이었다.
“맞다. 부정한 기운의 태동은 상당히 오래전의 일이었으니…… 보다 방대한 앎을 갈구하던 이가 너의 말에 귀를 기울인 건, 비단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방대한 앎을 갈구하던 이라면…… 지식의 신을 말하는 건가요?”
세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고요?”
“그런 것 같더구나. 당시의 대화를 나는 들을 수가 없었으나, 그가 전해 달라는 내용은 들을 수 있었으니… 유추는 어렵지 않더구나.”
지식의 신과 나눈 대화의 양은 방대했다.
그 중엔 당연히 어둠의 영역에 대한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지식이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그는 어둠의 영역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저 떠도는 소문의 종합지.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로 저 현상을 설명해 보고자 하는 노련함이 전부였다.
그만큼 어둠의 영역은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는 장소였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대화는 저것의 발현과 처리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니엘은 자신의 지금과 같은 생각의 시발점을 지식의 신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둠의 영역에 발을 디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먼저 방법을 찾아 다른 장소로 넘어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방대한 앎을 갈구하던 자는 고민하였던 것 같더구나. 바다와 같을 거라던 자신의 앎은 마른 강물과 같았을 것이고, 유예가 주어지면 알 것이라던 존재는 시간의 흐름만큼 불가해의 영역을 넓혔으니….”
“뜬금없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어투군요.”
“어쩔 수 없구나. 본래 입이 존재하지 않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권능의 일부이나, 종의 태생을 넘은 것이기에 제약을 얻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고루한 말투가 세월에만 국한된 게 아니란 뜻이군요.”
“현재의 시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법이라는 것을 이해하나, 내게는 더 이상의 습득이 허락되지 않았구나.”
“엘프의 말투가….”
“내 말투를 닮은 건 아니구나. 비록 엘프들이 나의 아이를 자청하고, 나 역시 그들의 심성을 사랑하나… 그들 중엔 나와 격을 논할 만한 아이가 탄생한 적은 없었구나. 참으로 아쉽고도 아쉬운 노릇이지.”
세계수의 음성은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저 뇌리를 통해 전달될 뿐임에도, 다니엘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였다.
버겁다.
그런 표현을 쓸 정도로 세계수는 한계에 달해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하이엘프에게나마 미리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으면 상황은 훨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만을 토로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구나. 흘러간 시절은 그저 과거로만 남겨 두어야 미래가 있지 않겠느냐.”
세계수의 음성이 달라진다.
그에 반응하듯 주변의 풍경이 보다 화사하게 변했다.
꽃이 만개하고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멀어졌던 정령들이 나무 인간의 근처로 몰려들었다.
가히 신비한 장면.
그 속에서 세계수가 단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네 판단을 지지한다.”
다니엘의 표정이 굳었다.
“방대한 앎을 갈구하는 자는 자신의 앎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내게 맡겼구나.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택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의 앎만은 내게 전달되었으니. 그것이 내가 널 기다린 이유 중 하나로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니엘의 옆에서 석판 하나가 솟아났다.
조금의 진동이나 소음도 없는, 조용한 등장이었다.
“……대도서관(大圖書館).”
다니엘은 석판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곳을 본 적도, 입장해 본 적도 없음에도 한눈에 석판의 내용이 대도서관의 편린임을 깨달았다.
지식의 신이 그토록 자랑하던, 지식의 보고.
하지만 자신 외엔 그 누구도 열람하지 못하는, 죽은 지식의 산물.
그와 동시에 다니엘의 옆에 검은 구멍이 하나 생겨났다.
“……!”
통로.
자신을 이지스라 칭했던 이가 보여준 자신들의 비기.
그것이 등장하며.
“…유예시켰던 선택이라는 게 이거였나?”
열쇠 하나를 툭 하니 내뱉었다.
석판의 상단에 적힌 내용이 실현된 것이었다.
“완성…시켰구나.”
다니엘은 묘한 표정으로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이는 대도서관에 입장하지 못한 채 지식을 탐구하고 수집하며, 대도서관의 기틀이 되기를 자청한 종족의 보물이었다.
회랑(回廊).
복도에 불과한 그곳을 채우는, 대도서관의 또 다른 사서들.
“마녀를 다른 장소로 넘기는 것에….”
다니엘은 자신을 알았다.
마법은 신비롭다.
마력이라는 연료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 바로 마법이었다.
하지만 마법이라고 모든 걸 창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에 따른 지식과 지혜.
원론과 결과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마법의 기틀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력에 대한. 그리고 마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마법사의 지능이 평범한 수준을 월등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다니엘은 마력에 대한 이해도만큼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고, 대기를 어떻게 조성해야 하는지.
환경은 어떻게 조성되며, 생명은 어떨 때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지식은 부족했다.
새로운 땅.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방주이자 도피처이며 새로운 터전이 될 그곳의 이름을 미리 따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도시에 붙이지 않았던가.
다니엘은 석판을 마저 읽었다.
석판의 내용은 방대했다.
하지만 그 골자는 간단했다.
유토피아의 완성.
정확히는 통로를 만드는 방법과 그것을 이용한 계획.
자신이 마녀를 다른 장소로 옮길 때 썼던 방법까지.
“……이거 한계가 명확한 방법이군.”
다니엘은 지식의 신의 방법의 한계를 읽었다.
더불어 반감도 들었다.
마녀에게 행한 방법은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실험에 불과했으니까.
설명할 여력도 없어 그들의 터전 근처에 던져 놓은 채로 ‘삼켜지기’를 바랐다는 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미리 설정된 값이 있다고는 했지만.
“부정한 것의 부정을 거두기 위해 나의 열매를 탐하였다. 나로서는 협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구나.”
“절 빼고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니… 놀랍군요.”
다니엘은 어둠의 영역을 몰아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그것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고민에 휩싸였던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세계수도.
지식의 신도.
혹은 자신과 조우한 적이 없어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신이라 불리는 이도.
다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