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다니엘 (3)
천천히 걷는다.
드드드.
걸음에 따라 대지가 살짝 밀려나며 길을 만들어 낸다.
나무가 양옆으로 밀리며 길을 만들어 내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었다.
촤아아.
갑자기 치솟은 물길과 화륵, 불꽃이 만나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자신의 등을 떠밀듯 뒤쪽에서부터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다니엘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극진한 환대로군.”
네 종류의 정령들이 긍정이라도 하듯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개구쟁이 같은 모습에 다니엘은 미소를 베물었다.
단절의 결계 안쪽은 태고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숲으로만 보이던 장소엔 떡하니 낮지만 계곡까지 있는 동산이 존재했고.
연인들이 함께 오면 당장 결혼을 약속할 정도의 아름다운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뿐일까.
온도는 어찌나 따뜻하고 날씨는 얼마나 쾌청한지.
지상낙원이라는 표현이 절로 들 정도의 장소였다.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모습.
하지만 그 어떤 곳보다 안정적이며 평화롭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공간.
어쩌면 엘프는 이 광경도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
정령들의 환대를 받으며 다니엘은 천천히 걸었다.
기를 쓰고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고작해야 벽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모든 게 달라졌다.
환경은 기본이고 활기찬 정령의 행동도 눈길을 끌었지만.
다니엘의 시선을 제일 먼저 잡아끈 건 다름 아닌 기운이었다.
세계수의 기운.
굳이 표현하자면 정령력보다는 이 말이 가까웠다.
‘생명력. 그렇지. 이 단어가 어울리네.’
태고의 지역은 생명력이 가득했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중상자도 금방 낫겠어.’
트롤조차 한 수 접어 줄 정도의 회복력이 주어질 곳이 이곳이었다.
그 정도의 기운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생소하면서도 근원적인 기운.
‘확실히… 본능이 외치고 있다.’
근원(根源).
근원이 망가지면 그에 따라 파생된 수많은 것들이 무너진다.
근원은 주춧돌이자 시작점이다.
‘세계수…… 확실히, 엄청나군.’
그 주춧돌이자 시작점이며, 생명력의 근원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저것이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Yggdrasil).
샤르르르.
거대한 나무의 끝도 모르게 뻗은 가지가 잘게 흔들렸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청명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천국이란 곳의 온갖 환상이 전부 다 적용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
“…지나치잖아.”
지나치도록.
다니엘의 뜬금없는 말에 세계수의 떨림이 멈췄다.
나뭇잎은 물론, 바람마저 흐르지 않았다.
자신의 근처에서 모습만 감춘 채로 환영의 인사를 건네던 정령들의 기척도 사라졌다.
모든 게.
-거짓…… 같겠지.
거짓말처럼.
다니엘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거대한 나무.
그것의 음성은 나뭇잎의 속삭임 같기도 했고, 바위의 웅장함 같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위쪽이 아닌 아래쪽이 ‘본체’라는 것이다.
-한눈에 진리를 꿰뚫는 건가. 과연… 오래전부터 내 기척을 느낀 아이답구나.
세계수의 아래쪽.
뿌리 기둥 쪽에서 무언가가 툭 하니 솟아났다.
나무뿌리가 이리저리 얽히더니 모양을 만들어 낸다.
인간과 닮았지만 다른 형태.
굳이 분류하자면 나무 인간인 그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력의 사랑을 받는 아이야.”
다니엘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 * *
정령이 날아와 나무잔에 물을 채워주었다.
평화로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 모든 것들이 이질적으로만 느껴졌다.
연출(演出).
“굳이 이럴 필요가 있어요?”
거짓이라고 느낀 건 거짓이 아니었다.
표현이 웃기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럴 필요가 있지. 지성을 가진 생명은 보는 대로 믿기 때문이다.”
“보는 대로 믿는다….”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무 인간.
세계수의 본체는 텅 빈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가만히 하늘을 주시하던 그가 말했다.
“이게 내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로구나.”
“바라는 세상이라. …좋네요.”
다니엘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피식 웃었다.
세계수는 거대한 나무였다.
기둥의 두께만 해도 대도시에 준할 정도의 크기에다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높게 솟았으며, 구름처럼 넓게 가지를 펼치고 있었다.
심지어 보통의 나무와는 달리 가만히 보면 반투명한 형체였기에 더욱 신비해 보였다.
엘프들이 눈이 돌아가 섬길 정도의 나무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다니엘에게는 보였다.
저 거대한 건 허상이다.
실상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인간 형태의 나무.
그것과 연결된 지하의 뿌리와.
“깜짝 놀랐어요.”
“무엇이?”
“세계수가 묘목과 크기에서 별반 차이가 없는 존재라서요.”
“우린 다르지만 하나란다. 하나가 힘을 잃으면 다른 존재가 모두의 힘을 받아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이란다.”
세계수의 비밀은 특이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런 세계수의 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파악했다.
“다르지만 하나? 설마…….”
나무 인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직한 움직임에 다니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치가 빠른 아이구나. 확실히… 마력의 사랑을 받으니 보이는 거겠지. 예상이 옳구나.”
당사자의 긍정에 다니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세계수의 묘목.
그건 또 다른 세계수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집어삼킨 어둠은 세계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세계수의 마력 패턴이나 흐름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세계수는 묘목만 잃은 게 아니다.
또 다른 자신을 잃었다.
심지어 자신이 가진 마력의 흐름과 패턴 모두를 상대방에게 먹힌 셈이다.
본래의 능력이 워낙 강대했기에 버티고 있을 뿐.
“……시간문제라.”
결국엔 세계수도 어둠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집어삼켜질 터였다.
세계수는 나무다.
당연하게도 자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세계수 자체가 자연에 영향을 주면서도 스스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존재.
그렇기에 세계수의 주변은 항상 태고의 모습을 간직해야 했다.
하지만 어둠의 기운이 대륙의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정상적인 대지는 부족해졌다.
세계수를 지탱할 정도의 여력은 없는 셈이었다.
대지의 영양은 무한이 아니다.
농사조차 연작을 하면 대지가 힘을 잃고 작물이 자라지 못한다.
마법을 사용하여 대지에 기운을 북돋아도 한계는 분명했다.
정령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수는 자신의 또 다른 존재를 집어삼킨 존재와 싸우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단 하나의 묘목이라도 남겼다면 모를까, 세계수로서도 지금의 상황은 달갑지 않은.
“…그 정도가 아니구나. 달갑지 않은 게 아니라… 버거운 정도다.”
“그 정도인가요.”
“……그래서 조금 더 빨리 오기를 바랐는데, 내 아이들의 아집이 너까지 흔들어 놓은 모양이더구나.”
세계수는 엘프를 자신의 아이들이라 불렀다.
“이 정도 영향력이면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었을 텐데요.”
“…불가능하다.”
“왜죠?”
세계수는 나무가 아닌 인간 형태로 자신의 말을 전할 수 있었다.
육성이 아닌 뇌리에 울리는 텔레파시의 그것과 비슷한 형태였지만, 의사소통이 된다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고집이 센 엘프조차 세계수의 말이라면 수긍하고 들었을 터였다.
자신의 이용.
그조차도 명령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기에 세계수를 보호하고자 엘프는 그의 의사와는 다르게 결계를 쳤다.
“내가 이 모습을 할 수 있는 건, 격이 맞는 존재에 한해서이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네가 전부겠구나.”
“……!”
다니엘의 눈이 커졌다.
세계수의 말은 이해가 갔다.
애당초 세계수는 격이 높은 존재이긴 했지만 나무라는 정의에서 크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럴 능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본인이 택한 길이야.’
마력을 이용하면 격이 문제일까.
신언(神言)을 전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수는 자신의 마력을 한 올도 그렇게 낭비하지 않았다.
세계의 유지.
그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둠의 천적과 같은 존재가 된 거겠지만….’
아쉬웠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야….’
세계수가 말한 격(格)이라는 게 문제였다.
자신이 아는 한 세계수에 준하는 ‘격’을 지닌 이는 자신 혼자가 아니었다.
가장 최근에 만난 이로는 ‘지식의 신’이 있었고, 자신이 도시를 설립할 때 만났던 ‘검의 신’도 세계수가 말하는 격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그 외에도 세계수와는 가장 어울리는 ‘자연의 신’도.
‘심지어 맹약에 의해 잠들어 있는 태고의 신은 세계수보다 격이 높아.’
그럼에도 세계수는 격에 부합하는 인물이 자신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 되려면.
‘…힘을 잃거나, 존재가 사라지거나….’
둘 중의 하나의 이유가 필요했다.
“…어느 순간 느껴지지 않는구나. 호승심을 이기지 못하고 저 안으로 들어간 게 아닐까 염려스럽구나. 한 자루의 날붙이를 가지고 태산 위에 서 있던 이는….”
‘검의 신.’
“들어갔노라. 자신의 검이 저 부정한 기운을 베기를 갈구하며.”
“…검의 신이!”
다니엘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이들은 자신이 잘못되었을 때 후일을 기약할 수 있게 만드는 존재였다.
하지만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진짜로 없는 건가요?”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지 않더구나.”
세계수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나무줄기로 얽힌 얼굴의 표정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나무 인간의 주변의 식물이 한순간에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감정이 자연스레 읽혔다.
낙담(落膽)의 감정이.
“방법을 모색해 봐야겠군요.”
다니엘의 말에 세계수가 지그시 시선을 마주쳤다.
“날 찾은 이유를 짐작하고 있다.”
“……!”
“어느 날 느껴지더구나. 저 부정한 기운의 경계 앞에서…….”
다니엘은 이어지는 세계수의 말에 입술을 질끈 씹었다.
“저 부정한 기운을 ‘피할’ 방법을 찾던 아이가….”
어둠의 영역은 강대하다.
친우들에게는 자신이 있다고 웃어넘겼지만, 막상 어둠의 영역을 탐색할 때마다 느꼈던 감정은 막막함이었다.
끝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저갱이라는 게 이런 건지, 자신의 마력을 상당히 쏟아도 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마녀’를 찾아 통로를 제대로 습득하고.
“저 부정한 것의 발길이 닿은 곳으로부터 도주할 계획이로구나.”
남은 이들을 모조리 데리고 다른 장소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 것은.
나무 인간의 상체가 스르르 기울어졌다.
“가능한 것이냐?”
“…….”
멍한 정신 속에서 정우는 생각했다.
무어라 대답했더라?
어떻게 판단했더라?
저 강대한 존재를 보며, 자신은 무엇을 계산하였더라?
잊고 있던 과거가 떠오르며.
잊고 있던 자신의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기억이 떠오를 때와는 조금은 다른 형태였다.
마치 사건을 영상으로 보는 느낌이었으니까.
잠시 떠올랐던 정신이 다시금 가라앉는다.
아직 이르다는 듯.
더 감상하라는 듯.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존재가 입을 열었다.
“희생한다면… 가능해요.”
“누구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지?”
묵직한 음성으로 다니엘이 말했다.
“당신과 저. 둘의 희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