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다니엘 (1)
과거는 현재의 근간이다.
“이건 본체일 텐데요?”
차가운 말에 드워프는 볼을 긁적였다.
“어쩔 수 없다.”
“그걸 왜 드워프가 결정하는 거죠?”
“그럼 내가 결정하지 누가 결정할 건데?”
“…감히.”
“이봐, 말라깽이. 말은 똑바로 하자고. 내가 쓰자고 하는 거야?”
“…….”
“우리가 그렇게 좋은 사이가 아니란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예외적인 일이야.”
“…….”
“평소엔 이성적인 녀석이 일족과 관련만 되면 냉정을 잃어버리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고.”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요?”
“최후의 일족이기에? 알지 않나.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걸.”
드워프를 가만히 주시하던 사내가 모자를 벗었다.
은빛 장발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외모에 긴 귀가 특징인 종족, 엘프였다.
“기어이 최후의 계획을 시행하겠다고요?”
“그럴 수밖에 없다. 아니, 그조차 안 한다면 대체 뭘 하려고?”
드워프의 코웃음에 엘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도 드워프의 말이 맞다는 걸 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닌.
“……세계수인데.”
일족의 근간이자 세계의 마력을 정제하고, 정령의 터전이 되는 세계수를 사용하자는 계획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과거에 드워프와 엘프는 사이가 좋았다.
자연의 광물을 본연의 성질대로 살리는 드워프와 각종 식물을 사랑하는 엘프는 부딪칠 일이 별로 없었다.
서로가 각자의 영역에서의 ‘장인’임을 인정했고.
드워프의 대장일은 대부분 용암지대에서 이뤄졌기에 나무의 소비도 많지 않았다.
엘프는 자연을 매우 소중히 여겼지만, 그들이라고 아예 모든 물건을 자연의 것으로만 대체할 수는 없었다.
몬스터라는 적이 있었기에 필연적으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타고난 종족적 능력을 제외하고서도 무기는 필요했다.
드워프는 그런 엘프들에게도 든든한 아군이었다.
전투 능력이 부족한 드워프에게도 엘프는 든든한 아군이었고.
두 종족은 공생 관계로 꽤나 오랜 역사를 함께했다.
최초 문제가 된 건 드워프였다.
태초의 자연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엘프와는 달리 드워프는 창작이라는 시점에서 계속해서 발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종족이었으니까.
드워프는 새로운 광물이나 물질을, 눈이 돌아간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갈망했다.
공생을 했으니 서로의 영역을 넘을 때가 있었고, 드워프의 눈에 ‘세계수’가 들어온 건 당연했다.
엘프들이 신성시 여기는 나무.
모든 정령의 탄생지이자, 세계의 마력을 정화하는 신물.
그것의 열매는 죽은 자를 살린다고 알려져 있고, 그것의 잎사귀는 생명을 연장시킨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그것의.
‘가지는 얼마나 귀중할까!’
드워프는 세계수에 관심을 가졌고.
누대에 걸친 갈구에 엘프는 가지 일부를 넘겨 주었다.
인간의 탐욕만큼이나 장인의 재료 탐욕은 대단했다.
세계수의 가지를 활용하는 일백 가지의 방법을 제시했을 땐, 엘프의 억눌린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때문에 드워프들도 입맛을 다시며 포기를 해야 했다.
그때부터 엘프는 드워프들이 호시탐탐 세계수를 노리지는 않을까 경계하기 시작했고.
드워프는 자신들의 탐구욕을 매몰차게 거절한 엘프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워낙 솔직한 두 종족이기에 서로의 관점을 토로하는 시간이 오갔지만.
세계수라는 신물은 합의점을 찾기엔 너무도 거대하고 위대한 것이었다.
때문에 둘의 관계는 세계수의 연구에 대한 드워프의 요청이 이어질 때마다 멀어졌고, 호기심을 참지 못한 한 드워프가 묘목의 가지를 꺾기 위해 접근했던 사실이 발각되면서 악화일로를 겪었다.
세간에 알려진 견원지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달라진 것은.
‘어둠’이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였다.
죽음의 숲, 악마의 숲, 저주받은 대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그것이 ‘어둠’이라는 단어로 통일되었을 땐.
한 개의 산맥이 통째로 그 정체불명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무렵이었다.
하나의 드워프 부족과 둘의 엘프 부족의 연락이 끊긴 것을 기점으로 두 부족은 어둠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서로 협조하지 않고선 작은 단서조차 파악하기 어려웠기에.
동족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두 종족은 차츰 교류를 하며 협조하기 시작했다.
어둠의 영역은 어느 순간 생겨났지만, 그 원인도 원흉도 모르는 기이한 존재였다.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고, 짙은 피로감이 드는 기운.
그 기운의 천적을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세계수는 한 개의 본체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묘목을 따로 두고 있었다.
전 대륙에 퍼져 있는 여러 엘프 부족들 중 꽤나 강대한 부족은 하나같이 세계수 묘목을 기르고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점차 인간들 세상에도 어둠의 영역에 대한 이야기가 만연해질 무렵, 어둠은 기세를 높여 엘프의 숲 하나를 덮쳤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한 차례 기세를 잃고 경계를 취하는 것처럼 잠시 물러났다.
어둠의 기운이 물러난 건 처음이었고, 그것이 물러난 뒤의 대지를 목도한 것 역시 최초의 일이었다.
때문에 어둠 내부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벌레가 괴물이 되고.
괴물이 재앙이 되는 장소.
생명이 버티지 못할 극한의 환경이며, 자연이 무너질 죽음의 땅.
서로 경쟁하며 경계하고, 싸우며 증오하던 인간들은 하나의 왕국이 완전히 무너지고서야 어둠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엘프와 드워프만이 초기부터 이 어둠이라는 영역에 대해 경계할 따름이었다.
그 와중에 발생한 사건은 하나의 큰 희망이었다.
세계수 묘목.
그것의 영역을, 어둠은 침범하지 못했다.
난생처음 보는 생물을 마주한 강아지처럼, 움찔하고 뒤로 물러선 후 경계하는 태세를 보이는 어둠의 영역 때문에.
“바로 그 세계수 덕분에 우리는 기회를 얻었었다.”
“…알고 있어요.”
“…그때. 어떻게든 묘목을 잃었으면 안 됐었어.”
“그건…….”
“말라깽이.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우린 실패했고, 좋은 기회를 놓쳤기에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
어둠의 영역은 잠시 물러갔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시’에 불과했다.
상대의 모양, 습성, 능력, 위험도까지 파악한 후에야 사냥을 시작한 사냥꾼처럼.
그것은.
“놈이 물러간 뒤에 어떻게든 ‘그’에게 연락을 취했어야 했어.”
놈의 영역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물러섰던 어둠의 영역이 다시 밀려들고.
휑하니 죽음의 땅이 되어 버렸던 장소가 다시 그것의 기운으로 뒤덮였다.
죽음의 기운에 발을 들이지 않고서는 그것의 속살을 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졌다.
드워프는 그게 지금도 아쉽기만 했다.
묘목의 저항.
그건 도망치던 생존자가 목격한 사실이었다.
어둠은 결계를 뚫는 침입자처럼 굴었고, 묘목은 자신이 왜 세계수의 묘목인지 증명이라도 하듯 어둠의 힘을 밀어내며 저항했다.
하지만 어둠의 힘은 강했고, 묘목은 약했다.
그 사실은 두 종족의 회의에 알려졌고.
몇 세대 동안 수면 위로 떠 오르지 않던 안건을 위로 떠 오르게 만들었다.
세계수의 활용.
드워프와 엘프의 협조가 단절될 뻔한 사건의 재등장이었다.
“그때… 인간과 협조했으면 상황이 달랐을 거다.”
“…….”
엘프는 입을 다물었다.
당시엔 아니었다.
드워프의 결정은 자신들의 사상과 신념, 능력 모든 걸 무시한 처사였다.
때문에 협조 체제마저 무너질 뻔했다.
묘목을 집어삼키느라 몇 년의 시간을 잠잠하던 어둠의 영역이 다시금 기세를 떨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드워프는 세계수의 활용을 주장했고, 엘프는 그것에 반발했다.
드워프는 인간과의 협조를 주장했고, 엘프는 그것에 반발했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주장이 의미를 잃은 건, 네 개의 묘목이 어둠의 영역에 집어삼켜진 후였다.
처음엔 몇 년.
그다음엔 일 년.
다음엔 팔 개월.
다음엔 육 개월.
현저히 짧아지는 묘목의 흡수 시간은 엘프족마저 세계수로 무기를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고심하게 만들었다.
엘프들이 그렇게 일족의 관점에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드워프는 구전으로, 기록으로 내려오는 세계수의 기운을 짐작하여 여러 가설을 써 내려갔고.
묘목이 저항하며 내뿜은 기운을 파악하며 설계에 나섰다.
네 번째 묘목이 삼켜질 때 부서진 가지를 들고 도망친 생존자 덕분에 가지를 직접 만져 보고 느껴 본 건 큰 도움이었다.
“그 본능은 이제 지워 버려.”
드워프의 음성은 단호했다.
굵은 선의 표정 역시 주름을 만들어 내며 엘프의 망설임에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대체 저놈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지키는 건 공격하는 것보다 더한 힘이 필요하다.
그나마 ‘그’에게 가세하면서 유의미한 대치가 시작되긴 했지만.
그사이 대륙은 더 이상 생명의 터전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졌다.
한 개의 왕국.
세 개의 도시.
남은 건 이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럼에도 세계수를 연구하고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엘프의 생각엔 짜증마저 치밀 정도였다.
엘프에겐 어둠의 기운을 대척하는 세계수가 있었다.
드워프에게는 그 세계수를 제련할 기술이 있었다.
인간에게는 그걸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왜 아직도…!”
욱한 드워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프는 그런 드워프를 보면서 침음을 삼켰다.
자신도 안다.
왜 모를까.
부서진 세계수 묘목의 가지로 만든 지팡이가 보여 준 능력만 해도, 세계수의 활용에 찬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세계수는 근간이다.
마지막 왕국.
네 개의 도시가 속한 지역은 세계수의 영역 그 자체였다.
고작해야 커다란 나무의 가지 하나.
그렇게 보기엔 어떤 여파가 생길지 알 수가 없었다.
건강한 나무조차 작은 생채기에도 약해지는 것이 하나의 섭리였으니까.
어둠이라는 천적과 대치하는 마당에 상처가 생기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엘프는 그것이 두렵고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거냐! 그러게 진작 좀 움직였으면 좀 좋아?”
드워프의 말은 타당했다.
인정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엘프는 눈가를 좁혔다.
잘생긴 외모조차 수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 넓은 지역이 사라졌다.
자신들의 터전이 되어 주었던 숲과 산이 모조리 놈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증오스러운 기운.
과연 이런 기운을 떨치는 존재가 누구인지 얼굴은 물론 존재조차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 어둠이 누군가의 기운이라면, 그 누군가를 죽어서까지 원망할 정도였다.
물론, 대륙 전역의 대부분을 집어삼킨 기운의 주인이라면 감히 ‘신’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겠지만….
‘최후의 하이 엘프라니… 마왕이 등장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누구도 성공한 적이 없는 대륙 정벌을, 정체불명의 기운이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차라리 인간이 대륙 정벌을 꾀한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수치나 치욕은 있을지언정 멸망을 마주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저것의 득세는 곧 멸망을 뜻했다.
세계수가 버티고 있다.
말 그대로 버티는 거였다.
드워프의 말은 타당하다.
문제는 내구성이다.
세계수는 신의 나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 기운은 대륙 전역을 뒤덮고 있었고, 자연과 정령의 모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만한 기운을 가진 세계수도 어둠의 득세를 막지 못했다.
죽음의 땅으로 바뀐 대륙은 더 이상 세계수의 양분이 되지 못할 터였다.
나무이기에 대지의 기운은 꼭 필요했다.
저만한 크기가 과연 이 정도의 영역으로 버틸 수나 있을지.
엘프는 그럼에도 본능적인 아집을 버리지 못한 채 갈등했다.
드워프는 혀를 차고선 몸을 돌렸다.
실망감.
멸족을. 아니,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도 종족의 아집을 버리지 못하는 일족의 아둔함에 대한 실망감을 버리지 못했다.
‘빌어먹을 엘프들!’
선조들의 관심에 경계심을 품은 엘프들은 몇 세대에 걸쳐 세계수 주변으로 침입자를 막는 결계를 쳐 놓았다.
대륙에 위세를 떨친 마녀들조차 세계수의 결계 앞에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는 건 매우 유명한 일화였다.
엘프만이 열쇠였다.
강제로 세계수에 다가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것이 가능한 건, 오로지 그뿐이었다.
다니엘.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영웅을… 왜 믿지 못하는 건지.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