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G급 던전의 찬탈자-225화 (225/293)

225화

-뱀파이어의 성 (15)

* * *

나무의 정화.

“……세계수.”

정우는 침음을 삼켰다.

밝은 빛을 뿌리는 그것은 자신의 키보다 조금 더 큰 나무였다.

아직 묘목이라 불릴 정도의 나무.

그것의 밝은 빛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끊임없이 흔들렸다.

가지와 씨앗.

그런 게 아니다.

“미친…. 세계수 자체를 옮겨 온 거였어?”

정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왜 세계수 본체가 아라크네의 배 속에 담겨 있었는지 이해가 가버렸다.

마녀의 경우에서 이미 겪었기 때문이다.

마녀는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아라크네의 배 속에 담겨 있으면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아라크네의 배 속은 일종의 저장고였다.

마력을 먹이로 삼는 그것은 교활했다.

어떻게 해야 마력을 최대한 빨아먹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해야 자신의 힘을 불릴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성질 때문에 오히려 천혜의 보고가 되는 것이다.

당장 흡수하지 않은 채로 보관하니까.

세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라크네의 배 속이기에 보호가 되었다.

외부로부터, 내부로부터.

세계수의 마력은 어마어마하다.

괜히 세계수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다.

그런 세계수가 이 정도로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게 정우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더불어.

‘가지다.’

잘려 나간 가지의 형태가 고스란히 보였다.

정우는 저도 모르게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이 지팡이는 저것의 파편에 불과했다.

고작해야 파편.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존재가 저것이었다.

더불어.

‘아버지께서 직접 찾으라고 했던 게 이것일 줄이야.’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정우는 세계수를 복잡한 눈으로 보았다.

세계수는 퀘스트의 말대로 정화가 필요했다.

세상 모든 오물이 묻은 것처럼, 부정적인 마력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정화…를 괜히 준 게 아니란 거지.’

정우는 천장을 보았다.

세계수의 빛으로 밝아진 고성의 내부는 삭막했다.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은 채, 그저 덩그러니 건물만 있을 뿐이었다.

즉, 고성 내부엔 아라크네와 세계수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정우는 아라크네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쩌적!

세계수를 꺼낸 것만으로도 아라크네의 전신은 바스러지는 껍질처럼 뚝뚝 갈라지기 시작했다.

‘역시 보관소였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음!”

정우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사아아-!

세계수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이 전신을 저릿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건가?’

정우를 이를 갈았다.

세계수의 정화는 퀸 마야의 성장처럼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았다.

당장 해결하라는 듯.

저릿저릿!

부정적인 존재감을 떨치기 시작했다.

‘…아라크네의 영향력이 사라지자 부정적인 기운이 득세하기 시작했어.’

정우는 주변을 다시금 살폈다.

‘아무도 없다.’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소름 끼치는 기운을 내뿜는 세계수를 본 정우는 이를 갈며 자세를 잡았다.

웅웅!

몸속의 마나를 자극한다.

‘……이거 때문이었군.’

정우는 로드를 떠올렸다.

자신을 베는 것으로 자격을 증명하고자 했던 계획이, 세계수를 마주한 순간 이해가 되어 버렸다.

빌어먹게도.

로드를 상대하기 위해선 성의 디버프를 해제해야 했다.

성의 디버프를 해제하는 동안 마나의 고리는 더욱 두꺼워지고.

빠르게 안정화에 접어들었을 터였다.

디버프를 어느 정도 이겨 내는 순간, 로드와의 결전도 결착이 났을 거고.

막강한 디버프에도 승리하는 동안 마력은 담금질이 되었을 것이었다.

‘본인의 공격으로 내 마력을 계속 자극하고자 했던 거야….’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위한 마음뿐이었던 전투였다.

절로 가슴이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렇기에.

‘…준비가 덜 됐어.’

마력의 담금질은 미흡했다.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지팡이에 내장된 스킬은 두 가지였다.

공격에 대한 반사 능력을 지닌 방어막, 리플렉트와 부정적인 기운을 없애는 정화.

고작해야 가지가 가지는 능력이 그러했다는 소리다.

‘세계수가 가진 힘은 더 강해….’

세계수는 이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기물이었다.

그 어떤 부정적인 기운도 침범하지 못할, 거대하고도 청량한 기운이 가득한 나무.

그랬던 나무가 이토록 기운을 잃고 묘목처럼 변해 부정적인 기운조차 밀어내지 못했다는 건.

‘아니, 반대인가? 부정적인 기운에 눌려 힘을 잃은 걸지도 모르겠어.’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었다.

그만큼 부정적인 기운이 강하다는 소리였다.

정우는.

‘퀘스트는 잊자. 이건 퀘스트와 상관없이 이대로 둘 수 없는 물건이야.’

세계수가 완전히 잠식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가질 않았다.

부정적인 기운은 저주와는 다르다.

저주는 부정적인 기운의 한 갈래일 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적인 기운이 세계수에 달라붙어 그것을 성장시킨다면.

‘…어쩌면 몬스터에 당하기 이전에 무너질지도 모르지. 지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랐다.

때문에 정우는 자신의 전신을 갉아먹기 시작한 기운에 저항했다.

뱀파이어 성의 디버프는 이것에 대한 전초전에 불과했다.

짐짓 성급한 판단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버지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공격은 어려웠다.

이지스와 레베카.

둘의 실력이라면 충분했으니, 부디 해당 던전에서 잘 견디기를 바랄 뿐이었다.

심지 같던 실의 소멸은 게이트를 넘는 즉시 사라졌으니까.

즉, 로드와 연결되어 있던 상당 부분의 제약은 다른 던전으로 넘어가는 것만으로도 해결되었을 터였다.

‘어쩌면…….’

이 세계수가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일의 중추를 관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우는 세계수의 기운을 기억한다.

포근하고 따뜻하며, 세상을 어루만지는 기운.

하지만 지금은 난폭하다.

‘사납고 매서워.’

모든 걸 부정하는 절대적인 기운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신과 육체를 갉아 먹는다.

그 속에 던져진 정우는 마나를 회전시켰다.

욱신!

부정한 기운은 생조차 부정한다.

생의 기운이 막대한 부정에 상처를 입는다.

정우는 전신을 파고드는 통증에 이를 앙다물었다.

몸을 뒤로 빼는 건 불가능하다.

다른 것도 아닌 세계수였기에.

머리카락이 녹아내린다.

귀가 썩어 떨어지고.

손끝이 물에 푹 담근 채소처럼 흐물거리다가 뚝, 떨어졌다.

‘…….’

심각할 정도로 아파 온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더… 파악해.’

정우는 정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성을 공략할 때 느꼈던 거지만, 외곽에서부터 성에 걸린 버프를 해제하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어쩔 수 없어….’

뱀파이어의 성과 로드를 착실히 공략했으면 상황은 훨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우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기에 한 단계를 건너뛰었고.

그 여파는 지금 정우의 전신을 갉아 먹으며 퍼져 나갔다.

하지만 정우는 외부보다는 내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육체조차 외부가 되어 버린 정우의 정신은, 오로지 세계수의 흐름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부정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는 지금조차 저토록 맑은 기운을 뿌리는 세계수인데.

‘부정한 기운을 전부 없애 버리면… 엄청나겠군. …하지만 잡생각은 그만하자.’

정우가 집중하는 부분은 바로 그 점이었다.

세계수의 기운.

부정한 기운 너머의, 온전하며 완전한 기운.

‘그곳과 연결한 후에 정화를 사용하는 거야.’

지팡이뿐만 아니라 본인의 마나까지 전부 사용한다면 승산이 있을 테니까.

정우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자신의 부서지는 육체 따위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막대한 통증 역시 의지에 밀려 아스라이 사라진다.

끝을 모르는 우주 속에 덩그러니 떨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움찔.

그런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이거, 어디선가….’

정우는 기이한 기시감을 느꼈다.

뱀파이어의 던전 브레이크에 입장했을 때부터 느꼈던 기이한 기시감보다도 더 강렬한 기시감.

정확히 표현한다면.

‘기시감이라기보다는… 경험이다.’

어디선가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부정한 기운을.

‘내가 어디서 경험했을까….’

정우는 고민하고 고심했다.

온 정신을 세계수와 부정한 기운에 집중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부정한 기운의 흐름을 몇 단계 파악했을 때.

자신의 육체가 전부 녹아서 없어진 것처럼 느꼈을 무렵.

‘……아.’

정우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입조차 녹아내린 듯 탄성은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어디서 경험한 건지, 기억이 났다!’

정우는 눈을 부릅떴다.

세이렌의 영토.

그곳의 마력은 어둠의 그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비슷할 뿐이지 정확하게 똑같은 지역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은 농도가 달랐으니까.

어둠의 영역의 농도가 백이라면, 세이렌의 영토의 농도는 일이나 이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정우는 막대한 마력을 끌어모을 수 있었지만.

이곳만큼은 아니었다.

순도 백 퍼센트의 어둠.

지끈!

정우는 두통을 느꼈다.

‘이곳은… 모든 기운을 부정하는 공간이다.’

자신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의 감각.

그때의 판단.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예전에.

‘어떤 일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히 난 이 시스템과 관련해서 내가 관여되어 있다고 느꼈어.’

그 증거가 등장한 셈이었다.

어둠을 경험한 자는 정우밖에 없었다.

지식의 신이든, 검의 신이든.

신이라 불리는 모든 이들은 어둠의 영역을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오로지 정우만이.

오롯이 경험하고 없애기까지 했으니까.

충격에 몸서리를 쳤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세계수를 감싸고 있던 어둠의 기운을, 정우는 본능적으로 꿰뚫기 시작했다.

이미 한번 경험해 본 기운.

그리고 이미 정복해 본 기운이었기에.

무겁게 내려앉은 감정과는 별개로 정우의 본능은 너무나 훌륭했다.

마나가 동조한다.

더불어 공명한다.

마녀의 비기인 공명이 잊고 있던 기운의 패턴과 공명하여.

울컥!

자신에게 밀려들었다.

‘……이건, 위험해!’

마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는 것만 같은 기세였다.

그 어떤 저항도 없이, 밀려들기 시작한 기운이 모두 녹아 버렸다고 생각한 전신을 뜨겁게 달구었다.

덜덜!

그 압박감에 정우는 몸을 떨어댔다.

이젠 잊었다고 느낀 통증이 다시금 밀려든다.

파스스!

정우는 인지하지 못했다.

든든한 바닥이 되어 주었던 고성이 한낱 먼지처럼 변하고 있다는 것을.

쩌적!

갈라지는 모양새는 세계수를 품고 있었던 아라크네의 그것과 비슷했다.

바스러진 성 가운데에서.

세계수의 빛과 함께 정우만이 자리한 채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그런 정우의 주변으로.

성을 가득 채우던 어둠이 밀려든다.

뱀파이어.

빛을 꺼리는 그들의 터전.

그리고 어둠.

모든 건 상관관계가 있었다.

세계수에서 정우에게로.

대부분의 어둠이 밀려들어 왔을 때.

정우의 모습은 더 이상 육안으로든 마력으로든 확인되지 않을 정도였다.

검은 구가 정우를 감쌌다.

육안으로도 단단해 보이는 검은 구는 정우를 조금의 빈틈도 없이 가렸다.

비록 한 시간에 불과했지만, 정우는 분명히 세계와 단절된 시간을 겪었다.

툭!

그리고 그 검은 구의 표면이 딱지처럼 떨어졌을 때.

기다렸다는 듯, 세계수의 기운이 동조하며 구 안을 가득 채웠다.

화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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