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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급 던전의 찬탈자-219화 (219/293)

219화

-뱀파이어의 성 (9)

원래라면 성의 디버프의 범위는 더 넓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뱀파이어의 성이라고 하더라도.

‘시스템’이 설정한 범위는 넘을 수가 없었다.

방대한 영역이 되어 버린 미해결 지역조차 초창기엔 훨씬 더 좁은 땅덩이에 만족했어야 했던 것처럼.

드레이크의 둥지는 그 어디에서도 드레이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협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랜드 캐니언의 협곡은 넓다.

지구에 난 커다란 상처가 아닐까 할 정도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해가 아예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게 우연일까?”

대지를 진동시킬 정도의 격돌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랜드 캐니언은 무너지지 않는다.

진동과 함께 흙먼지와 작은 돌덩이를 아래로 떨어트리는 한이 있더라도, 견고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게 가능한 것일까.

사내.

리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팀 버튼은 다시 시작된 전투에서 눈을 뗀 후, 관람자가 되어 버린 상대를 보았다.

‘저보다 강합니다. …훨씬.’

경호원의 속삭임은 듣지 않느니만 못했다.

누가 보더라도 사내는 강해 보였으니까.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조차 그렇게 느낄 정도로, 사내의 모습은 예리한 검 한 자루나 다름이 없었다.

경호원의 조언은 확인 사살에 불과했다.

“팀 버튼 협회장.”

“……!”

팀 버튼은 사내가 자신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에 놀랐다.

자신은 이 사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말이다.

“덕분에 자연을 지켰다고 생각해.”

덕분에?

팀 버튼은 급박한 상황도 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사내의 복면 안쪽 눈동자가 사사키 후유가 아닌 허공을 향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이 정도 전투가 벌어지는데 협곡이 무너지지 않는 게 가능이나 할까.

‘설마… 협곡을 지키면서 전투를 벌인다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가정이 아니고서야 작금의 상황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마력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경호원이 묘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헛소리 아니냐, 하는 의심이 담겨있는 표정이었다.

이 일대엔 마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니 당연한 소리였다.

유서린은 절로 소름이 끼치는 기운을 상대와 마찬가지로 뿜어내며 난폭하게 굴어댔고.

김하란은 이따금씩 밀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차분히 상대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강세기의 주변은 남극이라도 된 것처럼 사방에서 빛을 반사시키는 얼음이 튀어나오고 녹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A급 플레이어들로 이루어진 이쪽은 처참함 그 자체였고.

하물며 공중에서 대결을 펼치는 건 감히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대마법이 등장하고, 일격으로 태산을 가를 검격과 마법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대체 어떻게 인간이 저런 힘을 지닐 수 있는지, 도무지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협곡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저 위의 인물 덕분이라면.

‘…엄청, 나다.’

감탄밖에는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리정환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사사키 후유.

이름과 얼굴만 알 뿐이었던 사내의 탈피가 눈에 들어왔다.

‘거의 다 부쉈다.’

S급은 마력의 성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깨달음의 영역.

그리고 도전의 영역.

사사키 후유는 지금 깨달음으로 도전을 하는 중이었다.

긴 마라톤의 종착지를 목전에 둔 그를 보자 아련히 떠오르는 과거가 있었다.

통나무를 이고 절벽을 타던 때나.

힘겹게 오른 절벽에서 밀려 떨어질 때나.

한계를 느껴야 한다며 기절할 때까지 물속에 갇혀 있었던 때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구나.’

이런 전투 도중에 벽을 부수는 건….

‘응원할 수밖에 없지.’

리정환은 눈을 빛냈다.

* * *

후욱!

뜨거운 열기가 밀려들었다.

치이익.

피가 증발하며 만들어 낸 열기는 마법과도 같았다.

“…마검사.”

정우가 마스터의 능력을 사용하기로 한 것처럼, 로드 역시 마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붉은 선을 가르는 투명한 선과.

불꽃을 죽이는 폭우나 그런 폭우를 증발시키는 열기나.

그야말로 백중지세였다.

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일대를 지키는 데 쓰는 마력을 없앤다면 모르겠지만, 여간 피곤하군.’

상대의 수준이 생각보다 뛰어났다.

설마하니 로드 따위에게 이런 골머리를 앓을 줄이야.

정우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정화까지 사용하여 성에 걸린 버프를 없애 나갔다.

공격과 방어.

일진일퇴의 공방이 빠르게 이어졌고, 승기를 잡는 건 분명히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정우는 애가 닳았다.

‘유서린도, 김하란도 위험해. 강세기는 비등하지만… 여기도 결과는 같을 것 같고….’

하지만 가장 위험한 건 사사키 후유였다.

A급이라는 실력으로 지금까지 버틴 게 신기할 정도였다.

‘벽을 부수고 있지만… 모자라.’

그렇게 신경이 분산되니, 막상 의지를 다잡았던 것치고는 영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찰나.

단 한 번 겪었지만 익숙한 기감이 정우의 마력을 자극했다.

‘이건… 리정환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의 등장에 정우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제이의 아들이자 그의 능력을 고스란히 빼닮은 마스터 실력자.

S급 플레이어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의외였다.

제이의 능력을 배운 것이라면, 채찍을 쓰는 진조와의 상성은 훌륭하다 못해 우월하기만 했으니까.

리정환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그는 엘릭서를 쓰면서까지 사사키 후유에게 전투를 양보했다.

몇 조각 남지 않은 벽을 이참에 두드려 깨부수라는 기다림.

피식.

정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퍼억!

“……!”

그 대가로 어깨를 거칠게 얻어맞았음에도.

로드의 기세가 날카로워진다.

자신을 두고 감히 한눈을 판 상대에게 살의를 뿜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 너로서도 궁지에 몰렸겠지!’

이미 성벽까진 모든 디버프를 정화시켰다.

남은 건 곧장 이어지는 내성뿐.

그곳이야말로 진실된 라이프 배슬이자 자신의 마력을 억제하고 주변을 장악하는 기이한 마력의 결정체가 깃들어 있는 장소였다.

즉.

“저곳만 정화하면 된다는 소리지.”

정우가 어깨를 털며 지팡이를 흔들었다.

벌써 압박감이 약간은 줄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한 대 얻어맞기는 했지만 줄곧 승기를 잡는 건 자신이었다.

마검사.

둘의 형태는 비슷했다.

로드가 검을 주로, 정우가 마법을 주로 사용한다는 것만 빼면.

때문일까.

정우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리정환이 등장했다고 모든 게 낙관적으로 변한 건 아니다.

시간의 문제일 뿐.

‘어차피 무너지는 건 아군이야.’

정우는 날아오는 검을 염동으로 붙잡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힌 검이 흐물거리며 피처럼 녹아내렸다.

‘폭사!’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한 정우가 배리어를 전개했다.

툭, 투둑!

강한 산성을 머금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정우는 구 안쪽에서 터진 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검이 폭사할 때마다 느껴지는 은은한 충격이 거슬리기만 했다.

핏물을 증발시킨 정우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가 떨어졌다.

“샤이닝 샤워(Shining Shower).”

하늘의 반짝이는 결정체들이 아래로 낙하한다.

“정화!”

쿨타임이 되자마자 정화를 사용하는 정우가 눈을 빛냈다.

‘이제 한 번이다.’

정화의 흐름을 익혔다.

디버프로 인한 방해만 아니었다면 진즉 습득했을 스킬이었다.

성녀나 사제가 사용할 능력이었기에 습득이 늦은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정우의 마법 이해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게 억제된 상황일 뿐.

역시 시간문제였다.

마법과 오러로 시간을 끌던 정우가 빠르게 로드에게 접근했다.

로드 역시 정화의 쿨타임을 알아차리고 피했다.

대신 정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피의 검을 던져 움직일 뿐이었다.

씨익.

정우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쿨타임이 돌았다.

정신없는 전투 중에서도 잊지 않은 3분의 시간.

“정화.”

또다시 퍼지는 정화의 물결 속에서.

정우의 고리가 공명했다.

‘…그렇군.’

고리의 공명을 보며 정우는 나지막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하려던 것과 비슷해.’

강제로 만든 작은 고리들을 하나로 합치는 작업.

그건 고리의 안정화를 위해 필요한 작업이었다.

한데.

‘…정화 역시 그와 비슷하다.’

정령력의 본질 때문일까.

정우는 정화 스킬이 새롭게 다가왔다.

성녀나 사제.

즉, 성직자들이 사용하던 능력인 신성력은 그들의 고유 능력이라고만 여겼다.

실제로 정우조차 신성력을 다루는 건 무리였으니까.

마치 건드릴 수 없는 무언가가 신성력의 분해를 막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스킬로 변화한 그것은 아니다.

변화가 자유롭다.

이해가 여유롭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스킬을 분해하고.

‘익힐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판단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과거엔 불가능했던 정화 스킬을 체득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막상 체득에 성공하자, 뜯어 본 정화 스킬은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게 한다는 사전적인 의미보다는 다른 아주 간략한 의미에 가까웠다.

‘……안정화.’

예전에 느껴 보았던 감각이었다.

마력의 안정화.

지금의 자신에게 큰 토대가 되어 준 변화.

그때의 감각이 고스란히 재연되는 건 신기하다 못해 놀라운 순간이었다.

때문에.

스윽!

한 손을 휘젓는 정우의 공간 안에 담기는 마력은 정순했다.

바로 지팡이의 첫 번째 스킬 ‘정화’였다.

‘안정화…….’

디버프는 불안정이다.

일부러 불안정을 조장하는 능력이었다.

때문에 정화는 그런 디버프를 안정되게 바꿔 버린다.

그렇기에 성은 아군에겐 유리한, 적에겐 불리한 능력을 뿜어내는 힘을 잃는다.

로드는 정우의 손아귀에서 3분에 한 번씩이나 터져 나오던 정화의 빛이 넘실거렸음에도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검을 휘두르며 마법을 전개할 뿐이었다.

3분에 한 번씩 정화를 사용할 때도 승기를 잡던 정우였다.

연이은 사용이 가능할뿐더러.

‘공명….’

마나까지 공명하여 그 세를 불려 나가는 정화는, 이젠 정우의 주변에서 조금씩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로드는 정화의 빛에 닿으면 죽는 사람처럼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자연스럽게 성이 노출되었고.

치치치치익!

성의 마력은 정우의 손에 정화되어갔다.

“……그만.”

그때였다.

무수한 전투 중에도 단 한 번의 신음이나 말조차 내뱉지 않았던 가면 뒤 로드의 입이 열렸다.

그 말에 수긍했기 때문일까.

기세등등하게 영역을 넓혀 가던 정화라는 포식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신만만히 뻗었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힘없이.

로드는 그런 정우를 공격하지 않았다.

정우도 그런 로드를 제압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 바라볼 뿐이었다.

“…….”

단 한마디.

짧은 음성.

하지만 정우는 그 음성에서 진한 감정을 읽었다.

기시감?

아니, 이건 본능이었다.

뇌리에 각인되고 영혼에 각인된 본능….

“서…… 설마.”

확신은 없었다.

그저 익숙한 음성에 의심할 뿐.

하지만 그 의심 속에서도.

정우는 기어이 한 단어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아, 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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