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뱀파이어의 성 (8)
쩌엉-!
묵직한 충격에 정신이 한순간 흐려졌다.
서걱!
하지만 흐린 정신 속에서도 휘두른 검끝이 만들어 낸 소음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 버러지 새끼가…!”
앞섬이 베인 것에 불과했지만, 로즈 백작의 분노는 대지에 균열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크윽!”
사사키를 따라 달려들던 플레이어들이 신음을 내뱉으며 주춤 뒤로 밀려났다.
“찢어 죽여 주마.”
등골이 오싹한 선언.
붉은 안광이 시뻘겋게 불타며 어깨가 움찔거렸다.
쐐애애액!
그와 동시에 생겨나는 장벽은.
“……시, 발! 저거… 어떻게 막아?”
절로 암담함을 느끼게 만드는 공수(攻守)였다.
채찍으로 만들어진 장벽의 안쪽으로 살의를 터트리는 백작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쾅, 콰콰쾅!
대지가 요동을 친다.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전부 레이드를 경험해 보았다.
보스 레이드.
계획을 세우고 합을 맞춰 단체로 달려들어야만 상대가 가능한 존재들.
“…이건, A급보다 더 위험해.”
소름이 절로 끼쳤다.
“빨리… 치유해!”
사사키 후유에게 달려든 힐러가 식은땀을 흘렸다.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다.
전신을 가리고 있던 검은 무복은 이미 찢겨, 반바지나 겨우 입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드러난 살은, 채찍에 얻어맞아 부풀고 찢겨 흉물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치유의 손길.”
한 명의 힐러로도 모자라 두 명의 힐러가 붙었다.
C급의 수준.
치유력은 심각하게 아쉬울 정도였다.
“…힐러를 더 요청해야…….”
팀 버튼은 그 모습을 보며 손톱을 씹었다.
전황은 전혀 낙관적이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에서 온 S급으로도 전황을 유지하는 게 전부였다.
설마하니.
“유서린과 강세기, 김하란으로도 모자랄 줄이야….”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곤 예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낙승이라 생각했는데….
“드레이크의 둥지보다 더한 곳이야…….”
지금도 오싹했다.
자신을 향한 기운이 아님에도, 팀 버튼은 버티고 서 있는 게 전부였다.
그조차도 자신의 경호원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애를 쓰지 않았다면 무리였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요청은 어떻게 됐어!”
사사키 후유의 치유 장면을 보며 팀 버튼이 소리쳤다.
사사키 후유는 A급 플레이어다.
미국으로만 놓고 보면 강자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리 드물지 않은 수준.
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국민 영웅이라고까지 불리는 사사키 후유는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국격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이라는 나라는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로 수준이 낮은 국가가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팀 버튼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저 자식이 가만히만 있었으면……!”
때문에 데니 라이언이 원망스러웠다.
사자?
S급의 강자이자 자이언트 길드의 수장이면 냉정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제 수하들을 구한 건 헌터라고 예상되는 전혀 다른 인물에다가.
사사키 후유와 합을 맞추며 적을 공략하기 위해 뛰어든 자이언트 길드원은 하나둘씩 목숨을 잃고 있는 중이었다.
원망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저 고양이 새끼…!”
결국, 팀 버튼은 욕설을 내뱉었다.
이 욕설이라도 듣고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면서.
사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끝내 데니 라이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이 이어진다.
자신의 주변을 방어하다가 쓱 뻗어지는 채찍은 꼭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사키 후유가 아니었다면, 사상자가 생기는 게 아니라 전멸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신에 상처를 입은 사사키 후유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후유 길드장!”
“……조금만, 더…….”
손발이 떨리는 게 팀 버튼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충격으로 인해 찢어졌음에도 부은 눈꺼풀 안쪽의 눈동자만이 한계에 다다른 육체와는 달리 혁혁하게 빛나고 있었다.
덥석.
팀 버튼은 그런 사사키 후유의 손목을 잡았다.
“가지 마시오!”
폭음과 비명이 들렸다.
팀 버튼은 사력을 다해서 사사키 후유를 잡아당겼다.
휘청.
일반인인 자신의 손에 상체가 흔들릴 정도로, 사사키 후유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조금만…… 더.”
하지만 사사키 후유의 시선은 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 뼘.
딱 그 한 뼘만 넘으면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뇌리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그렇기에.
‘부나방이라도 상관없다…….’
사사키 후유는 부나방을 자처했다.
빛에 이끌려 날아갔다가 온몸이 타들어 가는 자살이 되어 버리는 부나방의 그것처럼, 자신의 눈앞에 돌연 나타난 한 줄기의 빛을 그는 놓을 수가 없었다.
“치유를…….”
때문에 그는 자신의 곁에 붙어 있는 힐러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자, 잠시만요…….”
이를 앙다문 힐러들이 안간힘을 써봤지만.
“사, 상처가 너, 너무 많아서….”
악화만 막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효과를 본 것인지, 사사키 후유는 멍한 머리가 조금은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움찔.
단검까지 놓친 왼손을 쥐었다가 폈다.
‘정상은 아니군.’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정상이 아닌 게 아니라 비정상 그 자체였다.
탈진에 가까운 몸은 경련을 이불 삼아 덮고 있었으니까.
그대로 잠에 빠져들어야 정상인 상태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점차 냉정을 되찾아 간다.
그것뿐이랴.
막지 못한 일격에 얻어맞기 전에 휘둘렀던 단검의 감촉이 머릿속에 재현된다.
비록 옷에 불과했지만.
‘…닿았다!’
그 사실이 아드레날린을 자극했다.
전투가 끊임없이 떠오른다.
자신의 움직임과 상대의 움직임.
상대의 공격에 대한 자신의 대처.
당시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움직임이 한 발 떨어지자 아쉽게만 느껴졌다.
한 명의 목숨이 사라지는 짧은 순간.
사사키 후유는 전투의 복기를 마쳤다.
결론은 동일했다.
‘이길 수 없다. 그건… 인정하자.’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할 정도였다.
전신에 상처를 입었고 팔도 한 번 부러졌었지만, 저 정도의 몬스터를 상대로는 호각인 셈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라는 걸, 남들도 알고 자신도 알았다.
‘……죽겠지.’
상대가 되지 않을 걸 분명히 알지만 전투를 이어 나가는 ‘동료’처럼.
사사키 후유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오른손의 단검을 꾸욱 틀어쥐었다.
그리고 한 발.
죽음으로의 첫발을 떼었다.
“지금 가면 죽어.”
“……!”
“어…? 다, 당신 누, 누구….”
누군가가 사사키 후유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를 만류하던 팀 버튼은 어리둥절 자신의 손을 보았다.
꾹 잡고 있던 손아귀는 허공만을 잡고 있었을뿐더러.
“누, 누구냐!”
바로 옆에 있던 사사키 후유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서 있었으니까.
갑작스러운 난입자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A급 플레이어조차 그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물며 눈 깜짝하는 사이에 사사키 후유에게서 떨어트려진 팀 버튼의 놀람은 오죽할까.
그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릴 여력도 없이 허우적대며 다급히 사내에게서 사사키 후유를 떼어 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사내는 팀 버튼에겐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품에서 무언가를 꺼낼 뿐이었다.
흠칫 놀라는 사람들 사이로 꺼내진 건, 오색 빛깔이 영롱한 약병이었다.
“…어?”
팀 버튼은 그걸 알아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엘릭서(Elixir)!”
불치병마저 치료해 준다고 알려진 영약이었으니까.
“마셔. 그러고 나서 싸워.”
* * *
공략.
보상.
그리고 성장.
이 순서는 플레이어에게선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아니, 어쩌면 S급조차도 모르고 지나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자신도 그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그렇게 남들은 모르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나니 보인다.
벽을 향해 돌진하고자 하는 저자의 상태가.
마스터의 경지는 단순히 보상을 더 많이 얻는다고 오를 수 있는 일반적인 벽이 아니다.
보통 마스터의 경지인 S급은 벽을 넘는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넘어본 사람은 안다.
넘는 게 아니라 ‘부수는’ 것임을.
사사키 후유는 지금, 벽을 부수는 중이었다.
심지어 벽에 균열까지 심하게 가, 작은 틈을 만들어 내 반대편의 광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애가 닳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렇기에 곧 무너질 몸을 이끌고도 한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 한 발을 내딛는 건, 보통의 의지로는 가능한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엘릭서를 내놓았다.
자국의 플레이어도 아니고 타국의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공통의 적을 앞에 둔 상황에선, 동료일 뿐이지.’
꽤나 낭만적인 생각을 하며 그는 복면 아래로 옅게 미소를 지었다.
목울대가 꿈틀거린다.
엘릭서는 입안에 넣자마자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실제로 꿀떡거림은 그저 습관에 불과할 정도로, 식도를 타고 넘어간 양은 매우 소량에 불과했다.
치이- 익!
하지만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C급의 힐러 두 명이 달려들어도 치유하지 못했던 상처들이 옅은 연기와 함께 치유된다.
탈력감에 경련이 일던 손가락에 힘이 생기고.
당장이라도 눕고 싶던 정신이 한순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니, 최상의 컨디션으로 바뀌었다.
사사키 후유는 자신이 마신 물건의 효능에 감탄했다.
순식간에 멀쩡해진 상태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복면에 검은 무복.
자신과 비슷한 행색의 상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젊다.’
하지만 상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체가 궁금하긴 매한가지였지만, 적을 막는 게 더 우선이었다.
때문에 사사키 후유의 눈빛이 바뀌었다.
쩡!
회복된 마력으로 빈 왼손에 얼음 단검을 만들어 냈다.
고마움의 인사는 나중으로.
둘은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선후를 나누었다.
사사키 후유는 묻지 않았다.
누구인지.
왜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건지에 대해서.
그저 아른거리는 빛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스윽!
흙먼지조차 나지 않는, 아주 조용한 움직임으로.
촤아악!
잠시 멈췄던 로즈 백작의 기세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연신 달려드는 부나방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방어와 회피를 우선시하는 놈들이라 죽이는 게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적’은 자신의 온 신경을 잡아끌었다.
엘릭서가 등장하고, 자신을 귀찮게 하던 파리가 그걸 마셨을 때까지.
로즈 백작의 눈은 ‘적’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적은 아예 팔짱까지 꼈다.
두고 보겠다는 듯.
“감히…!”
심지어 그 평가가 자신을 상대로 한, 얼음을 사용하는 암살자 같은 인간을 향한 것이었으니.
“날… 한낱 과녁처럼 여긴 것이냐!”
그녀의 분노는 당연했다.
이곳에서 강자는 자신이었다.
인간들은 자신의 채찍에 쓰러질 장난감이요, 흡혈이 금지된 상황에서의 분풀이에 불과했으니까.
여기에 인간들은 언제든 죽일 수 있는 버러지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분노는 당연했다.
쩌적!
관자놀이 옆에서 떡 멈춘 얼음 단검의 냉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막았지만.
관자놀이에서 이어진 연격을 막는 그녀의 표정은 점차 굳어 갔다.
채찍이 살짝 늦었다.
오싹한 추위가 뒷목을 슬쩍 어루만지고 사라졌다.
아무리 해도 미풍밖에 되지 않았던 냉기의 수준이 겨울의 삭풍처럼 짙어졌다.
조금씩.
‘다가온다고?’
접근하는 버러지의 냉기에 그녀는 처음으로 사사키 후유에 대한 가벼움을 지웠다.
촤악!
상당한 힘을 실은 채찍이 허공을 찢어발긴다.
쩌엉!
얼음 단검이 채찍의 끝을 위로 쳐내며.
은빛의 선과 함께 짓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