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뱀파이어의 성 (7)
쿠르르르르르릉!
요란한 굉음엔 저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갔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유서린은 자신을 눈앞에 두고 흠칫, 고개를 돌리는 스피어 공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굳게 땅을 디딘 발이 땅을 밀어내며 공기를 가른다.
한껏 뒤로 당겼던 팔을, 랜스처럼 뻗어 낸다.
‘일점…!’
점차 시야의 외곽부터 검게 물든다.
성기사의 능력.
분명히 처음에는 보조적인 역할에 치중하려던 그녀였다.
하지만 상대를 본 순간, 그녀의 본능은 채 바꾸지 못한 무기와는 달리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검게 물든 시야의 가운데에 보이는 건 그야말로 일점(一點)이었다.
단 하나의 목표만을 본 그녀의 표정에 희한한 열감이 떠올랐다.
버서커.
달리 광전사라 불리는 그녀의 성질이 성기사의 그것을 밀어내고 우위를 점했다.
좁아진 시야 너머로 보이는 약점을 향해 달려드는 유서린의 기세가 맹렬했다.
흠칫!
그 기세에 다급히 고개를 돌린 스피어 공작의 눈에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어딜……!”
레이피어가 다급히 휘어졌다.
좁아진 시야 가운데로 훅 들어오는 레이피어의 모습이 보였지만, 유서린의 검은 망설임 없이 찔러 들어갔다.
“……큭!”
기세 좋게 방향을 틀었던 것과는 달리 레이피어의 끝은 유서린의 검 끝에 부딪히지 못했다.
낭패를 본 스피어 공작이 혀를 차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버서커의 특기는 방어가 아니다.
공격.
그것도 상대의 방어를 무시한 채 공격을 가하여 빈틈을 만들어 공격하는 무식한 공격이 바로 버서커의 특기이자 전유물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찰나의 빈틈을 정확하게 잡은 상황.
일견 뱀파이어처럼 보이는 붉은 안광의 유서린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
방어로나 쓰일 방패까지 휘둘러 공격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광기 어린 눈동자 안쪽엔.
‘…….’
어딘지 모를 조급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 * *
“정화(淨化).”
리플렉트로 반사된 공격을 방어하는 로드의 빈틈을 노려 지팡이의 스킬을 사용한 정우의 주변으로 밝은 빛이 퍼졌다.
붉은 안개를 밀어내며 제 영역을 넓히는 밝은 빛에.
‘마나를 조금 더 정순하게 바꾼다.’
조금씩 정우의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가지로 만들어진 지팡이는 그 어떤 것보다 순수한 기운을 좋아했다.
바로 정령력 말이다.
이질적인 마력을 방어하는 성질과 이질적인 마력을 정화하는 성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두 종류의 스킬은, 정령력에 기인하고 있었다.
때문에 정령력을 주입하면 스킬의 효력이 강해졌다.
정우는 정령력을 다룰 줄 알았다.
마나를 변환시킨 편법에 불과했지만, 그 편법으로 카이롤레움을 불러냈으니 편법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잠시 움츠러들었던 로드가 정우를 방해하기 위해 힘을 뿜어낼 땐, 이미 정화 스킬이 성벽에 닿은 시점이었다.
화악!
성벽에 걸려 있던 디버프가 한순간에 해제된다.
세계수의 가지와 더불어 정우의 마나까지 합쳐진 정화는 예상 밖으로 강력했다.
휘청!
디버프가 해제되는 순간, 정우는 분명히 보았다.
공격을 가하려던 로드가 휘청거리는 것을.
‘왜지?’
의문과는 달리 정우의 반응은 기민했다.
다른 여러 마법이 전개된다.
초급 마법에 불과한 것들이었으나, 정우의 마력을 머금은 그것들은 유의미한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디버프가 약해졌어.’
해제되었다가 복구된 디버프의 영향력은 이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어지간한 플레이어에겐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내가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아니니까.’
정우에겐 아니었다.
약간의 차이.
하지만 크게 느껴지는 그 차이점을 주시했을 때.
‘…그렇군.’
로드의 휘청거림이 다시 떠올랐다.
‘연결해 놓은 거야.’
“…그레이트 실드.”
쿵!
묵직한 충격에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정우는 지팡이를 확인했다.
‘정화의 쿨타임이 1분 남았군.’
의외로 정화의 쿨타임은 짧았다.
정우로서는 다행인 상황.
‘이번엔 패턴까지 익힌다….’
정우의 주변으로 떠오른 냉기의 화살들이 회전하며 거칠게 쏘아졌다.
붉은 폭풍에 닿는 순간 모조리 으스러져 버렸지만, 상관없었다.
‘시간을 번다.’
로드의 수준은 강하다.
하지만 그게.
‘성의 마력과 연결하여 만든 편법이라면… 오히려 손해일 거다.’
속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성의 방어막은 월등하다.
격변의 시대를 겪고 수많은 플레이어가 등장한 뒤.
플레이어는 가족들의 안전을 위한 여러 안전지대를 만들었다.
한국의 A, B 지구처럼.
땅덩이가 넓고 국력이 뛰어날수록 안전지대의 수는 늘어났고 영역 또한 넓어졌다.
당연히 필요한 자원이나 인재의 수요가 활발해졌다.
그럴수록 발전하는 건, 과학.
지금에 이르러선 마법을 비롯한 여러 스킬이었다.
백의 연금술사로 불리며 MJ 그룹의 총수가 된 제임스 밀러 역시 그런 시기를 겪었다.
무수한 시도와 발전의 시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발전되었던 시대의 발자취를 답습하는 것에 불과했다.
바로 모든 안전지대의 궁극체였던 최후의 도시, 유토피아를 말이다.
‘뱀파이어의 마법은 인간의 것과는 다르다. 피에 담긴 마력 자체를 한 번 정제하고 순환하기 때문에, 형태는 물론 패턴이나 흐름 모든 게 달라질 수밖에 없어.’
당시 뱀파이어의 성을 무너트릴 땐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걸 짓누를 뿐이었다.
뱀파이어의 마법을 감상하거나 메커니즘을 파악하지 않았다.
때문에 먼 훗날인 지금에 와서 머리가 아프긴 하지만.
‘못 할 짓도 아니지….’
검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다.
때문에 파악하기 어렵지만.
고성에 걸린 마법은 경우가 달랐다.
심지어 고성의 그 막대한 마력을 치환하여 오러로 사용하고 있는.
‘리치와 같은 방법이라면…!’
라이프 배슬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형태라면 더더욱.
라이프 배슬이 조금 더 커지고 단단해지며 특별한 방어 체계를 지니고 있을 뿐.
‘목표는, 성이다!’
성만 부수면 모든 게 순리대로 풀려 갈 것이다.
* * *
마법을 쳐 낸 로드는 가만히 눈을 빛냈다.
작은 움직임.
꿈틀거리는 마력까지.
상대의 생각이 여실히 읽혔다.
스멀스멀!
부정적인 감정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온다.
화르륵!
타오르는 마법을 벤다.
‘이전’에도 가능은 했지만, 마력을 머금은 피 자체가 디스펠에 준하는 능력을 발휘하니 마법을 베는 건 너무도 쉬워졌다.
하루도 쉬지 않고 단련한 육체를, 가만히 쉬고 있음에도 뛰어넘는 육체.
평생을 명상한 마법사의 마력을 압도하는 마력까지.
과연 뱀파이어는 초월종이라 불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짓눌러라.’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린다.
꽤 자주 생겨나는 부정적인 감정은 강인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짓누르기가 불가능했다.
광전사의 그것이 이러할까.
로드는 ‘피’를 탐하는 자신의 본능을 억눌렀다.
그리고 순수한 실력으로 상대와 부딪쳤다.
상대의 실력은 뛰어나다.
하지만 자신을 절망시켰을 때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없었다.
로드는 그게 아쉬웠다.
‘성을 노리겠군.’
로드의 판단은 정확했다.
찰나의 흐트러짐을 눈치챈 상대는 자신을 묶어 둔 채로 성의 공략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성에 걸린 마법을 ‘정화’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거기까지 눈치챈 건가.’
로드는 붉은 눈을 잠시 감았다.
상대의 판단이 옳았다.
저 성은 자신의 마력 저장고였다.
막대한 도움으로 완성된 걸작이자 자신의 힘을 증폭시키고 상대의 힘을 반감시키는 서로 다른 능력을 동시에 보유한 성물이었다.
관에 담겨 제물이 된 뱀파이어 중에는 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작 이하의 귀족들.
진조라 불리는 이들 중 네 명을 제외한 모두가 다 제물이 되었다.
뱀파이어에게 피는 힘이고 생명이다.
본래라면 손수 흡수해서 강화시켰을 힘과 생명을, 이번엔 방법을 달리하여 강화했다.
일대를 장악하는 힘.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힘.
물론 ‘마법’에 한하는 반편이에 불과했지만.
‘충분하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저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알아차릴 거란 생각은 했다.’
생각보다 빠를 뿐, 성을 공략해야만 승산이 있다는 걸 아는 건 시간문제였다.
“토네이도!”
상대의 음성을 듣자마자 로드는 검을 들어 올렸다.
가볍게 내리긋는다.
아래로 떨어졌던 검이 사선으로 솟구치더니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상하로 움직이는 검이 만들어 낸 형상은 이리와 같았다.
입을 쩍 벌린 이리.
붉은 선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이빨이 바람을 물어뜯었다.
콰직!
‘견제는 말 그대로 견제일 뿐이다.’
로드는 흩어지는 바람 너머의 상대를 가만히 주시했다.
들끓는 마음을 짓누르는 ‘탐식’의 감정 또한 억누른 채로.
검을 틀어 올린다.
대화는 없었다.
단지 검을 올렸을 뿐.
하지만 성을 보던 상대의 눈이 다시금 자신에게 향하는 순간.
로드는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 * *
‘그렇다 이거지?’
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토네이도를 가볍게 찢어발기는 검을 보는 순간, 상대의 의도를 알았다.
견제 따위로는 어림도 없다.
상대는 검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검을 틀어 올리는 순간 느껴지는 눈빛의 감정은 성이 아닌 ‘자신’을 보라는 듯 기묘한 감정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리치에게 라이프 배슬은 심장이다.
육체가 부서지고 심지어 봉인까지 당해도 리치는 라이프 배슬만 있으면 부활할 수 있다.
외부에 저장한 생명.
때문에 리치의 공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라이프 배슬을 찾는 것이었다.
라이프 배슬만 찾아 없애면 치열해야 할 전투가 터무니없이 가볍게 끝나 버릴 테니까.
로드에게 성이 그랬다.
그렇기에 성을 부수는 순간.
‘아니. 성에 걸린 마법만 해제해도 로드를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다.’
공간 이동부터 여러 마법까지 사용이 자유로워질 터였다.
반대로 말하면 로드는 성을 지켜야 했고, 정우는 라이프 배슬을 노리던 지팡이의 끝을 다시 로드에게로 돌려야만 했다.
싸워라.
이따위 견제가 아닌, 목숨을 위협할 만한 중상을 입히고 성을 강탈해라.
그런 의지가 전해졌다.
‘집중하자.’
의지를 다잡는다.
마법에서 의지는 비단 집중력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일류 마법사와 이류 마법사를 나누는 가장 큰 요인인 ‘컨트롤’이 바로 의지에서 나온다.
마법은 생각하는 학문이고, 보이지 않는 걸 보이도록 다루는 방법이었으니까.
의지가 명확할수록 마력은 스스로가 운영하는 대로 움직인다.
연결만 해두었을 뿐, 미처 파악하지 못한 고리의 개수마저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더 집중해.’
찰나의 시간, 정우는 몸속을 관조했다.
커다란 고리를 중심으로 걸려 있는 여러 작고 얇은 고리들이 쇠사슬처럼 이어져 있었다.
웅웅!
공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마녀의 전유물이었던 ‘공명’은 고리를 만나 날개를 폈다.
끼리릭.
기계음이 돌아가는 듯, 고리가 떨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로드와 전투를 벌이며 감각이 예민해진 지금, 정우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마녀의 공명은 너무 강해. 얇은 고리가 버티기엔 버거워.’
첫 번째 고리.
모든 고리를 그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것을.
‘고리의 부조화. 그게 고리가 불안정하다고 느꼈던 이유였다.’
로드의 검이 주변을 붉게 물들인다.
수십 개의 검은 사라졌지만, 제 손에 들린 단 하나의 검이 내뿜는 살기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매서워졌다.
일도양단(一刀兩斷).
로드의 자세를 본 정우는 자신 역시 일격을 준비해야 함을 알았다.
대마법처럼 파괴적이나 그만큼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 즉각적인 일격을.
‘얇은 고리를 합친다.’
공명과 동시에 고리의 합일을 진행했다.
그에 따른 반발력은.
우우우우-!
지팡이로 불어넣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기 시작한 지팡이로부터 압도적인 기세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것마저… 이용한다!’
눈을 부릅뜬 정우의 정신이 요구하는 건 단 하나.
보석이 박힐 법한 지팡이의 끝에 생긴 길고 반투명한 ‘날’이었다.
‘고리의 완성과 더불어 오러의 활용까지! 모두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