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뱀파이어의 성 (6)
마른 침을 삼킬 여력조차 없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다 비명을 질렀다.
이런 예민함을 느끼는 건…….
‘미치겠군….’
정신을 뒤흔들 정도의 충격이었다.
콰앙!
채찍이 내리치는 순간 터지는 것은 지면뿐이 아니다.
‘사람이 찢기고 있어….’
세 명의 S급.
네 명의 적.
사사키 후유는 자연스럽게 나머지 한 방향을 맡게 되었고, 여러 플레이어들이 자신과 함께 방어에 나섰다.
공격 태세를 갖췄던 게 무색하리만큼 강력한 적의 등장에 기함했지만.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A급과 B급의 플레이어들로 이루어진 전력은 충분할 것이라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첫 일격에 B급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이어지는 일격엔 한 플레이어의 허리가 두 동강이 났다.
사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플레이어들은 상대의 무기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호호. 죽어라, 버러지들아!”
여왕님, 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외형.
가죽옷을 입고 풍만한 육체를 드러낸 채로 망토만 걸치고 있는 뱀파이어 여성의 채찍은 채찍질 하나하나가 다 스킬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했다.
“막아야 해.”
“방법은?”
“……죽을 각오를 해야지.”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정예라고 부르기엔 손색이 있지만, 다들 B급 이상인 만큼 어지간한 경험치는 충분히 쌓여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사사키는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움직였다.
달려드는 검사의 그림자에 숨어.
촤악!
“……크윽!”
공격에 당해 팔 한쪽을 잃은 검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
그림자에서 벗어난 사사키의 단검이 뱀파이어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스윽.
채찍을 회수하는 뱀파이어의 붉은 눈동자가….
“……!”
자신의 눈동자와 부딪치자 사사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쑤셔 넣어…!’
검은 단검에 모든 마력을 불어넣는다.
‘S급이 아니란 게 아쉽군…….’
A급은 마력을 다루기 시작한다.
스킬로서가 아닌, 마력을 마력 그 자체로 다룰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수준은 S급에 비하면 미약하다.
A급 플레이어의 수준이 이계의 엑스퍼트와 비슷했으니 차이는 명확했다.
때문에 사사키는 자신의 실력에 한탄했다.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예리하게.
조금 더 은밀하고, 조금 더 강력했다면…….
‘내 마력을 더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면…….’
누구는 그런 아쉬움에 낙담하기도 할 테고.
누구는 그런 아쉬움을 원동력으로 삼아 더 발전할 터였다.
그리고 사사키는.
움찔.
‘……이 느낌은 뭐지?’
명백한 후자였다.
사사키는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르는 마력을 느꼈다.
냉기조차 뿜어내지 못한 채, 오로지 단검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 일격.
기습은 실패했지만 작은 상처라도 내거나 틈이라도 만들겠다는 집념의 일격은.
‘계속… 흐르고 있어.’
그의 재능을 자극했다.
사사키의 재능은 진짜였다.
총리의 경계를 받고, 자국을 위한 일을 하느라 던전에 들어간 횟수가 적음에도 그는 A급 플레이어가 되었다.
더군다나 바른 성향과 곧은 심성으로 뭇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까지 하는 인물이었으니, 그가 성장에만 목을 매지 않았다는 건 부패한 일본에서 존경받는 플레이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 그였다.
그가 만약 초창기의 강세기처럼 총리의 지원을 받았다면, 아마 일본도 세 번째 S급 플레이어를 탄생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발끝에서부터 단검에 이르기까지.
단검을 내지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사사키는 수많은 변화를 느꼈다.
그리고 그건.
이미 옅게 균열이 가 있던 그의 재능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까앙!
단검이 가로막히자마자 사사키의 몸이 회전했다.
뒤축으로 뱀파이어의 얼굴을 친 사사키가 후욱, 뒤로 몸을 날렸다.
일련의 과정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사사키는 자신의 발목에 느껴지는 감촉에 등골이 오싹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잡혔다.’
단검부터 발차기까지.
모든 게 막혔음에도 사사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상대는 강하다.
그리고 자신은 약하다.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니까.
자신의 일격이 가로막히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건 의지가 되어 또다시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금 더… 빠르게.’
자신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린 뱀파이어를 보며.
사사키가 자세를 낮췄다.
[ 동화율 : 79% ]
“넌…….”
그런 사사키를 향해 뱀파이어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맺힌 미소는 모두의 시선을 한순간 강탈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런 미소를 지은 뱀파이어가 또각, 한 걸음 사사키를 향해 걸으며 손을 뻗었다.
“이 로즈 백작의 취향이구나!”
촤악!
바닥을 후려친 백작의 붉은 눈동자에 탐욕이 어렸다.
* * *
내리꽂히는 전격 사이로 작은 구가 만들어졌다.
주변을 전부 장악한 전격이 유일하게 넘보지 못하는 영역.
‘검으로 방어막을 만들었다.’
검막(劍幕)이었다.
마스터의 육체 능력을 지닌 정우조차 검의 궤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로드를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번개가 쪼개지듯 흩어지는 것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가만히 늘어트린 손은 도무지 검을 휘두른다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태연했다.
수많은 전격 사이로, 놈의 붉은 눈동자가 정우를 꿰뚫었다.
‘온다.’
갑자기 전격이 비틀린다.
그 사이로 생겨나는 붉은 선은 소름 끼칠 정도로 빨랐다.
다급히 몸을 비튼 정우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
작은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지팡이의 끝이 잘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세계수의 가지로 만들어진 지팡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이 잘릴 정도라면.
‘위험해.’
상당히 위험한 인물이란 뜻이었다.
마나를 습득했다.
고리를 만들었으며, 언령을 개화했다.
그것만으로도 정우는 마탑주였던 시절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당시 정우가 로드를 짓이길 때의 수준이 바로 마탑주였던 시절이었다.
그랬던 정우가.
‘……!’
붉은 검을 피하는 데 사력을 기울였다.
정우가 본 가장 복잡한 마력 패턴은 아라크네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당시보다 더 힘겨웠다.
‘…성. 대체 저곳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거지?’
뱀파이어의 성.
자신의 손으로 소멸시켰던 그것이, 전혀 다른 능력을 들고 나타난 로드처럼 변해 있었다.
‘마력 역장, 역행, 마력 방해, 마력의 저주…….’
마력과 관련된 수없이 많은 디버프가 성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종말의 검.”
전격 사이에서 들리는 음성에 정우는 소름이 끼쳤다.
핏빛 검이 생성된다.
한 개, 두 개.
족히 기백은 될 것 같은 수의 검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이제는 내 차례다.
그렇게 외치는 듯한 손짓과 함께.
“낙뢰(落雷).”
검이 낙하한다.
콰콰콰콰콰콰쾅!
방어막을 펼치고 매직 미사일을 쏘아 내고, 염동으로 밀어내고.
반사적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정우였지만.
움찔!
‘……밀린다.’
조금씩 바닥으로 밀리고 있었다.
타닥.
‘부유 마법이 흔들리고 있어.’
마력의 컨트롤이 문제가 아니었다.
‘저 성을 없애야 해….’
성이 문제였다.
예전엔 없던 여러 디버프가 자신을 괴롭혔다.
특히나.
‘제대로 준비를 해왔어.’
어깨에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한 정우가 지팡이에 오러를 덧씌웠다.
‘여기서는 허리를 비틀며 내질러.’
깡!
허공을 단단히 디딘 채로 정우의 팔이 쭉 뻗었다.
‘날….’
검과 로드.
그리고 그 뒤편의 고성을 보는 정우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지구로 넘어오기 전까지 다니엘이라는 사람에 대한 모든 대비를 끝낸 게 보였다.
마법사로서의 역량.
자신의 능력과 마법.
그 모든 것을 계산에 넣어 둔 게 눈에 보였다.
그렇기에 정우는 가슴이 무거웠다.
뱀파이어 로드는 약했다.
자신의 패에 연신 뒷걸음질 치다가 결국 쓰러져 버렸으니까.
물론, 어지간한 대마법사보다 뛰어난 로드가 작심하고 만든 디버프라면 효과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정도로.
‘완벽하게 날 틀어막진 못해.’
몸을 회전한 정우의 손이 허공을 짓눌렀다.
날아오던 검이 휘청,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매직 미사일.’
수많은 벌떼가 날아가는 것을 본 정우가 입술을 씹었다.
뱀파이어와 손을 잡은 놈 중에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건, 두 명이었다.
안나.
그리고.
‘…칭 샤오.’
잡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두 번이나 놓아준 인물.
‘대체 왜!’
자신을 위한다면서 이런 사태에 참여한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힌 정우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력 방해가 심해. 이걸 해결하기엔 로드가 버겁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검사로서 싸우는 것.
‘방법은 알아. 메아리처럼. 이미 살짝 경험한 적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던 정우가 멈칫했다.
까먹고 있던 두 가지의 스킬이 생각난 것이다.
‘…한번 해볼 가치는 있겠어.’
고민은 길었지만 판단은 빨랐다.
‘일단 먼저 큰 기술을 쓰게 만들자.’
정우는 조금씩 마법 배합을 달리했다.
작은 상처는 물론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모든 공격을 방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는 검만 방어하는 전략으로 바꾸었다.
콰쾅!
은밀히 다가와 휘둘러지는 검의 위력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이대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 의지를 보여 주는 것처럼.
조금씩 다가간다.
충격에 한 발 뒤로 밀리면 두 발 내디뎠다.
저릿저릿!
손아귀가 뻐근했다.
하지만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는다.
팔꿈치가 저릿했다.
오히려 이게 전부냐, 는 듯한 도발적인 눈빛을 보낸다.
어깨가 욱신거렸다.
오히려 입꼬리를 비틀어 말아 올린다.
‘와라…!’
마법을 사용했음에도 뻐근한 육체가 신경 쓰였다.
마법의 반동이 스스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만한 공격을 연이어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솔직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소드 마스터 두 명이 연이어 공격을 날리는 듯한 연격이었으니까.
멈칫.
‘……온다!’
지었던 미소가 진해졌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공격 사이에 공백이 생겼다.
불과 1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했다.
이 공격이 꽤 강한 축에 속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과연.
인지하기도 전에 세계가 갈라진다.
아니, 갈라졌다는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느낌만이.
수없이 싸워온 전투의 감각만이 겨우 세계를 수직으로 가른다고 느꼈을 뿐이다.
‘내 마나를 전부……!’
미소 안쪽으로 이를 간 정우의 눈이 번쩍였다.
더불어 지팡이 역시.
“리플렉트!”
스킬의 사용.
콰아아앙!
묵직한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밀려들었다.
욱신! 지끈!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럼에도.
씨익.
정우의 미소는 오히려 짙어진다.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느껴졌다.
세계를 가르던 공격이 다시 세계를 가르며 반대로 쏘아졌다는 것이.
서걱!
그 증거로 들리는 아주 미세한 소음과 함께.
쿠르릉.
뱀파이어 성의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비스듬히 잘린 단면을 타고 주르륵!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정우는 지팡이의 또 다른 스킬을 사용했다.
“정화(淨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