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뱀파이어의 성(5)
대치하던 뱀파이어들이 뒤로 물러났다.
네 마리의 진조와 그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로드.
고작 다섯의 숫자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특히나 자신의 공격을 무산시킨 로드.
검고 붉은 여러 선이 얽힌 가면을 쓴 로드의 존재감은 정우조차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로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지시를 받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인 뱀파이어들이.
“……놔둘까 보냐.”
동서남북으로 각자 움직인다.
정우가 염동을 사용하고 마법을 전개하며 놈들의 움직임을 막으려고 했지만.
“……!”
스윽.
어느새 다가온 로드의 붉은 검이 자신의 상체를 노리고 있음에 침음을 삼키며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놓치면… 안 돼!’
네 마리의 진조.
세 명의 S급.
부족한 수보다도 놈들이 사방으로 퍼졌다는 것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서걱!
“…….”
정우는 상체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깊진 않지만… 훨씬 빨라.’
로드는 물러서는 자신을 가만히 두고 보았다.
한 개의 붉은 검.
피로 만들어진 검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내뿜으며.
‘…오러 블레이드.’
허공에 떠 있었다.
오러까지 뿜으며.
“……너, 내가 아는 로드가 아니구나.”
그것을 보는 즉시 정우는 자신의 기억과 대조했다.
자신에게 무력하게 쓰러졌던 로드.
악몽이라고까지 불리던 게 무색할 만큼, 터무니없이 약했던 뱀파이어의 시조.
놈은 약하지 않았다.
정우가 강했을 뿐.
놈이 억울한 건 단 하나였다.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
어지간한 대마법사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정도의 강력하고 대단한 마법을 연신 사용했던 로드였지만, 상대가 나빴다.
고작 그 차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로드만이 아니야. 다들… 무기를 들고 있었어.’
뱀파이어는 따지고 보면 마검사였다.
마법과 검의 달인.
어중간한 게 아니라 극도로 단련된 검사와 마법사의 조합.
로드는 그중에서도 마법에 치중했던 놈이었다.
오스카 백작은 메테오를 기억했다.
더불어 자신의 손에 소멸했던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이 어떻게 다시 목숨을 건진 건지는 알 수가 없지만….
놈들은 분명히 자신의 손에 한 번 멸절했던 놈들이었다.
그렇다면 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흘렀고 놈들 역시 준비를 했으니, 다른 재능을 개화시킨 거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아니다.
정우의 눈엔 보였다.
놈의 마력은.
오롯이 오러로만 채워져 있다는 게.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군.”
마법을 극한까지 습득했던 로드의 경우 아무리 검을 다뤄도 마법사로서의 마력 패턴이 살아 있어야 옳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로지 마법을 배제한 오러만이 가득했다.
뱀파이어라는 종만 배제하고 보면, 로드는 검사 그 자체였다.
소드 마스터.
정우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로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옆!’
정우는 다급히 몸을 회전시키며 지팡이로 옆구리를 막았다.
가가각!
‘…큭.’
막았음에도 충격이 내장을 뒤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충격으로 날아가던 정우가 방향을 바꾸어 외쳤다.
“내리쳐라!”
쿠릉, 콰지지지직!
셀 수 없는 번개의 다발이 갑작스럽게 주변을 장악했다.
눈이 멀 정도의 번쩍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달라.
그 부탁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거야.’
유서린은 한 호리호리한 뱀파이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넌… 증오스러운 힘을 품고 있구나.”
품평하는 것처럼 위아래로 눈을 흘겨본 뱀파이어가 말했다.
“너 역시 증오스러운 힘을 품고 있고.”
“흐흐.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는 게 꽤나 재밌겠구나.”
고상한 행동으로 검을 들어 올린 뱀파이어가 유서린을 주시하며.
“영광으로 여기거라. 위대한 왕의 첫 번째 자손이자 신하인 본 공작이 네 생을 거둬 갈 낫이니라.”
검을 뻗었다.
번쩍하는 순간 코앞으로 다가온 검을, 유서린은 이를 앙다물고 빗겨 쳐올렸다.
가가각!
방패를 타고 위로 솟구치던 검날이 사라진다.
‘…또 온다!’
어느새 회수한 검이 다시금 쇄도했다.
“블러드 스피어.”
나지막한 어조와는 다르게 난폭한 찌르기의 연속.
다급히 검과 방패를 휘두르며 레이피어를 막아 가던 유서린이 으득, 이를 갈았다.
“성광(星光)의 강림!”
그녀의 주변으로 별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챙, 채채챙!
성광이 레이피어를 쳐 내기 시작했다.
“호오. 제법이로구나!”
흥이 돋는 듯 스피어 공작이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
“너희의 힘을 만방에 떨치거라. 앞을 가로막는 것을 모조리 부수며, 단 한 발도 뒤로 물러서지 말고 전진하고 또 전진하라. 피할 바엔… 죽어라.”
로드의 명령을 떠올린 공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잔인하기까지 한 명령이었지만 자신들을 믿지 못한다면 내릴 수 없는 것이었기에.
대부분의 힘을 회수한 로드였지만.
“우리 넷이 왜 왕의 곁을 지키는 것인지, 넌 잠시라도 고민했어야 했다.”
모든 걸 부수라.
“진정 마음에 드는 명령이 아니더냐.”
오싹!
‘뒤로 물러나야…!’
생각보다 빠르게 본능은 공작과 거리를 벌렸다.
더불어 스킬까지 전개한다.
“천신의 가호.”
황금빛 막이 그녀의 전신을 보호했다.
“제법.”
웃음기 가득한 음성과 함께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한다.
“블러드 폴.”
그것은 폭포와 같았다.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핏방울들이 무기가 되어 낙하했다.
이를 간 유서린이 검을 내질렀다.
“천사의 일격!”
* * *
“얼음장 같은 놈이군.”
강세기는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뱀파이어를 가만히 주시했다.
특색조차 없는 일반적인 장검을 늘어트린 채.
저벅.
천천히 다가오는 놈의 압박감은 거셌다.
‘……이상하군.’
그것에 강세기는 의아함을 품었다.
‘내가 아무리 세뇌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S급이다.’
심지어 총리의 방해로 성장이 저해된 수준이 지금이었다.
그만큼 그의 재능은 빛나는 것이었다.
‘……갈수록 감당이 안 돼.’
레이드가 필요한 보스가 아닌 이상에야 던전 브레이크에서 이 정도 놈들을 보는 건 불가능했다.
여태까지 전례가 없었던 사건이었다.
S급 플레이어의 사상자가 발생한 드레이크 던전 브레이크에서 느꼈던 존재감조차 로드라 불린 놈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의 반이나 될까.
유서린에게서 들었던 머맨의 왕도 그렇고, 뱀파이어도 그렇고.
‘현 수준을 넘어서는 놈들이 등장하고 있다.’
강한 놈들의 출현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그런 것치고는 머릿속은 뜨거운 모양이군.”
“…훗. 전투를 앞두고 무슨 생각인 건지.”
뱀파이어의 말에 강세기는 고개를 털었다.
눈앞의 상대는 딴생각을 하면서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집중해도 모자라….’
뇌신을 볼 때의 압도감이 절로 느껴질 정도의 강자.
강세기는 차분히 호흡을 고르며, 뱀파이어를 노려보았다.
“준비가 된 모양이군. 와라.”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와 손짓이었음에도, 강세기는 감히 경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은 머리로 생각한다.
전투의 흐름을.
‘선수필승….’
냉막한 표정으로 강세기가 스킬을 전개했다.
“프로즌 필드.”
“꽤나.”
나지막한 감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앞에 두고 움직이지 않는 뱀파이어를 보며 강세기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흡혈귀.’
“붐(Boom).”
얼어붙은 일대의 모든 것이 폭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럼에도 여유가 느껴지는 침음을 들은 강세기의 마력이 요동쳤다.
후우우웅!
삭풍이 부는 것처럼.
거대한 마력이 선언한다.
“아이스 테일.”
지면에서 솟구친 거대한 채찍이 뱀파이어를 후려쳤다.
콰아앙!
뒤로 튕겨 나간 뱀파이어를 향해, 강세기는 여러 마법을 계속 시전했다.
창, 우박, 냉기의 바람까지.
던전 하나를 모조리 찢어발길 것 같은 마법이 이어졌다.
‘승기를 잡았을 때 몰아붙여야 해.’
강세기는 본능을 믿었다.
상대는 강하다.
자신보다 더.
이 기회를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든 마법엔 캐스팅 시간이 필요하다.
스킬 역시 마찬가지.
강세기는 낮은 수준의 마법을 호화롭게 사용하며 상대를 압박했지만.
이대로는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1초다.’
1초의 공백.
여러 마법을 시전한 후, 새로운 캐스팅을 하는 1초.
그 1초만 버티면 또다시 공격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눈을 빛낸 강세기가 계획대로 여러 마법을 사용한 뒤, 캐스팅에 들어갔다.
프로즌 필드보다 더 강력한 마법이자, 자신의 성명절기가 된 그것.
동결(凍結).
강세기에게도 이건 승부수였다.
하지만 첫 얼음이 깨어지고.
뒤이은 냉기가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강세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벅.
상대의 흐릿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난폭한 존재감이 냉기를 녹인 채로 접근하고 있었다.
까강, 가가가강!
수십 발의 아이스 스피어를 쳐 낸 검은 보이지도 않았다.
“강하기는 하나… 실망이군.”
찢어진 의복 사이로 보이는 핏빛 갑주가 꿈틀거렸다.
“나의 이름은 존 러쉬. 후작이다.”
검이 번쩍였다.
* * *
“크하하하! 제법이군, 인간!”
광소를 터트리며 연신 무거운 할버드를 휘두르는 괴력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몸을 비튼 김하란이 회전하며 검을 내질렀다.
“분광(分光).”
여러 개로 쪼개진 검격이 각자의 색채로 뱀파이어를 갈라 버렸다.
스윽.
“속도도 이만하면 제법이고.”
‘…잔상.’
갈랐다고 여긴 뱀파이어는 태연하게 뒤로 물러서서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그 무거운 할버드를 들고 이 정도 속도라니…. 사기군.”
“영광으로 알아라. 내 할버드에 죽은 수백의 강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달려든 뱀파이어의 할버드가 단숨에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콰아앙!
지면이 들썩거렸다.
가히 막강한 일격.
“호오….”
뱀파이어는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죽었으리라 생각한 적이 자신의 할버드를 빗겨 낸 채로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까.
“…쉽게 당할 것 같으냐.”
“푸흐. 그래. 발악해 봐라. 그래야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받지 않겠나!”
히죽 웃은 뱀파이어가 할버드를 휘두르며 말했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인간 따위는 견디지 못할 인고의 시간….”
대지 가르기.
할버드의 충격파에 김하란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재밌게 해준다면, 널 첫 번째 사도로 삼겠다.”
그런 김하란을 향해 빠른 속도로 할버드를 휘두르는 뱀파이어의 눈이 붉게 빛났다.
“이 카이저 후작의 사도로!”
콰앙!
김하란이 입가에 흐른 피를 거칠게 닦아 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나?”
퉤, 피가 섞인 침을 뱉은 김하란이 검을 틀어쥐었다.
“바로 모기야.”
섬멸(殲滅) 제1초.
김하란의 검이 시퍼렇게 타오르며 세상을 쪼개기 시작했다.
“이 모기 새끼야.”